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소설과 회고록: 어느 것이 진실인가?

중은우시 2009. 12. 22. 16:47

글: 장영구(張永久)

 

잠춘훤(岑春煊)은 말년에 상해에서 살면서, 자서전적 회고록 <<낙재만필(樂齋漫筆)>>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 해(1928년), 조강지처 유부인이 호북에서 여행도중 병사하고, 장남 덕고(德固)가 따라 죽었다. 처음에, 덕고는 기부금을 내고 주사직을 얻어, 신축년 경자과거보충선발에 거인으로 뽑힌다. 그리고 모친을 모시고 북경으로 가서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했다. 무창에 이르렀을 때, 유부인이 돌연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했다. 덕고는 모친의 병에 가슴이 아파서 몸과 마음을 상한다. 양호총독 장지동이 조정에 글을 올려 정표(旌表)를 요청하여, 은상을 받았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그리하여 병이 들고, 근력이 날로 약해지고, 나랏일로 노심초사하다보니 쉴 틈이 없었다. 나중에 나타난 여러가지 쇠약한 현상은 모두 이때 비롯된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의 배경을 알고 싶다면, 조금만 연구해보념, 이 말에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춘훤이 상해에 거주한 시간은 바로 그의 관료생활에서 실의에 빠져있던 몇년간이다. 조정의 거두 구홍기(瞿鴻)와 결탁하여, 혁광(奕)과 원세개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 발등을 찍게 된다. 원세개는 간단한 수법을 써서, 도태 채내황을 시켜 잠춘훤과 강유위가 같이 찍은 사진을 서태후에게 보낸다. 순식간에 잘나가던 잠춘훤은 무너져 버린다.

 

서태후의 신임을 읽게 되자, 괜찮은 관직은 더 이상 차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잠춘훤은 의욕을 잃고 상해로 은거한다.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낼 준비를 한다. 누가 알았으랴. 실각한 대신에게 흉사가 이어질 줄은. 연이어 두 가지 소식이 들려오는데, 바로 조강지처 유부인과 사랑하는 아들 잠덕고가 한구(漢口)에서 연이어 병사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에 잠춘훤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같았다. 모든 의욕을 잃었고,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나중에 나타난 여러가지 쇠약한 현상은 모두 이때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냥 듣기에는 애절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잠씨집안의 큰아들인 잠덕고가 북경으로 과거를 치러 가는데, 부친은 그에게 한가지 일을 시킨다. 즉 모친을 북경에 모셔다 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창에 이르렀을 때, 모친은 풍한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병사한다. 효자 잠덕고는 하루종일 밥도 먹지 않고, 영구를 붙들고 통곡을 한다. 더더욱 의외인 것은 이 대효자는 모친의 죽음을 가슴아파하다가 자신의 몸까지 상한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도 모친을 따라서 죽는다. 불귀의 황천길로 간 것이다. 양호총독인 장지동은 이 소식을 듣고는 적시 조정에 보고하여 효자문을 세워달라고 청한다. 잠덕고는 모친을 따라 죽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의 작은 일이지만, 이 일은 백성의 기풍과 효도와 관련된 큰 일이다. 효자의 사적이 그대로 묻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서 백성들을 모범이 되게 하고, 그 사적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들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다보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효자가 모친을 그리워하고 가슴아파하는 것이 죽음에 이를 정도인가? 효도를 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효도를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두렵기까지 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잠덕고의 죽음은 이상하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오견인(吳人)의 소설 <<이십년간 목도한 괴이한 현상>>을 읽고서야 수수께끼가 풀렸고, 확실히 깨닫게 된다.

 

오견인은 청나라말기의 유명한 견책소설 작가이며, 잠덕고가 한구에서 죽을 때, 그는 마침 한구에 있는 한 미국인이 만든 신문사에서 주필을 맡고 있었다. 이 사건의 내용을 잘 알았다. 그의 필기 <<廛續筆>>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당당한 고관의 아들은 확실히 계집질하다가 죽었다. 성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리고 큰 도시에서 모두가 보는 데서 죽었는데, 이를 모친을 따라 죽은 것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역사에 기록하도록 하고, 효자전에 넣도록 했으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오견인의 붓아래에서 대효자 잠덕고의 죽음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십년간 목도한 괴이한 현상>>의 제85회 <<꽃을 그리워하는 공자가 모친의 상을 지내다" 제86회 "효자문을 세워서 하늘을 속이고 큰 거짓말을 하다"에 쓴 내용은 바로 청나라말기 모 관료의 아들인 진치농(陳稚農)이 운남에서 모친의 영구를 호송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한구에서 상해까지 술먹고 계집질을 한다. 결국 상해에서 홍기녀 임혜경을 사랑하게 되어 원래 들었던 성병이 심해져서, 결국 황천으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오견인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진치농은 모친의 영구를 고향까지 호송하다가 가는 길에 곳곳에서 술과 계집을 즐겼다. 매일 꽃밭에서 놀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는 몸에 양회색의 외국옷감으로 만든 겉옷과 검은색의 외국비단 마괘, 우단으로 만든 과피소모를 걸치고, 복숭아크기의 백사선모결을 걸쳤는데, 밝고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한구에 이르러, 진치농은 몸이 좋지 않다고 느껴서, 의사를 찾아가서 진맥을 받는다. 한 강호의 의사는 성병의 무서움을 몰랐고, 그에게 아주 강렬한 춘약을 만들어준다. 이리하여 진치농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계집질을 하도록 만든다. 두번째 의사는 좀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한다: "이 병은 오래되었다. 든 병은 성병이다. 그가 보통사람처럼 서고 앉고 한다. 약간 귀찮아할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병같지 않지만, 사실 그는 보약으로 버티는 것이다. 일단 무너지면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석류꽃 아래에서 죽으면 죽어서도 풍류이다. 진치농은 죽기 2,3일전에 그리워하던 홍기녀 임혜경을 만나서 밤낮없이 함께 지낸다. 속담에 색(色)은 뼈를 깍는 무쇠칼(刮骨鋼刀)라고 하였던가? 병색이 완연했던 진치농이 이런 "행복"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과연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는 목숨을 잃는다. 집안의 종에 따르면, 한밤중에 진치농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소변을 보고자 했는데, 제대로 서지 못하여 쓰러진다. 종이 한참 걸려서 일으켜 세웠는데, 당시에는 잘 몰라서, 생강탕과 인삼탕을 먹였다. 얼마 안 지나 그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춥다고만 한다. 이불을 하나 더 덮어주었지만, 계속하여 춥다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늘이 밝아졌을 때, 진치농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둔다.

 

책에 나오는 인물인 진치농은 바로 잠덕고의 화신이다.

 

잠춘훤이 관직에서 쫓겨나서 상해에서 우울하게 살고 있을 때, 집안에서 이런 남부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마음이 아주 급했을 것이다. 다행히 호광총독 장지동이 적시에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 잠춘훤은 비로소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지동이 인심을 다독거리는 방법은 잠춘훤의 아들에게 효자라는 명분을 얻게 해주는 것이었다. 과거에 효자, 절부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한 마을 한 현에 효자, 절부가 나오면 지방관리는 층층이 위로 보고하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 인근 현 또는 인근 성의 지방관리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명을 받아 조사확인하는 지방관리는 효자 절부가족으로부터 뇌물을 받지 않더라도 고향의 명예는 확실히 얻게 된다. 그래서 효자, 절부의 패방은 곳곳에 서있는 것이다. 사실 내막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장지동은 관직에 오랫동안 굴러먹었으니, 뺀질이라고 하기에 부끄럼이 없다. 잠덕고를 위하여 작성한 글에서 그는 여러가지 효자의 효행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는 중요하지 않고 부모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그 뜻은 모친을 모시기 위하여, 잠덕고는 심지어 과거에 응시하는 것도 포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해를 넘겨, 북경에서 예부의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가면서 가는 길에 <<사친시>> 80장을 지어, 일시에 도성에 유행하니, 재자라는 이름도 얻는다." 글이 내용은 전부 없는 얘기를 만들어 낸 것이고 순 헛소리이다.

 

장지동은 조정의 중신이므로, 그가 올린 글에 대하여 조정이 허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물며 주청대상인 대효자는 옛날 서태후가 총애하던 신하인 잠춘훤의 아들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광서 계림 영천현에는 여전히 효자방석비가 서 있고, 석인, 석마, 화표, 패방이 있다. 이렇게 허구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마치 소리없이 한 황당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같다. 패방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서림잠덕고순모사장>>. 위나라 비문체로 쓰여진 한자는 역사가 사람에 의하여 잘못 읽히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무서운 일인지 보여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잠덕고는 죽기 전에 절명사 1수를 짓고, 숙부인 잠춘명(岑春蓂)(당시 호북도대)에게 서신을 하나 보낸다. 그 서신에서는 자신의 여러가지 불효한 행위를 고백하고, 선조를 뵐 면목이 없으니, 시신을 강에 버려 물고기밥이 되게 해달라고 적었다고 한다.

 

똑같은 사건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록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웃고나서 다시 진실과 허구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잠춘훤과 오견인은 모두 청나라말기의 유명한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정계의 요인이고 한 사람은 문단의 거두이다. 똑같은 사건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적었으니, 그 중에 한 사람은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상식대로라면, 회고록은 진실이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잠춘훤의 회고록과 오견인의 소설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면, 그러한 상식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허구이어야할 소설이 진실을 얘기하고 있고, 진실이어야할 회고록이 허구를 얘기하고 있다. 이는 정말 난감한 일이다. 만일 마음으로 역사를 읽어본다면, 우리가 읽은 역사에서는 이렇게 진실이 전도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