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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용연향(龍涎香): 중국에 아편보다 먼저 들어온 춘약

by 중은우시 2009. 12. 11.

글: 정계진(丁啓陣)

 

모두 알고 있다시피, 100여년의 중국근대사는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치욕사이다. 서방열강, 동양도적이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로 중국의 대문을 열어제낀 후에, 중국을 살찐 양, 케이크로 생각하여, 도살하고, 나눠가지고, 유린하고, 약탈하느라고 너무나 바빴다.

 

중화민족의 이 기간동안의 피눈물나는 치욕사에서, 일반인들은 그것이 아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아편무역에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데, 중국에서 제지당하자, 1840년의 중국과 영국간의 충돌, 보통 말하는 아편전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방열강이 중국의 대문을 열기 위하여 쓴 것에는 아편 이외에 또 하나가 있다. '용연향'이라고 부르는 약물이다. 아편과 비교하면, 용연향은 서방강도덜이 더욱 먼저 사용했던 무역품이었다.

 

소위 용연향은 바로 향유고래의 장내분비물을 말린 것이다. 향유고래가 낙지를 삼킨 후, 위장에서 분비되는 회흑색의 밀납형의 배설물인 것이다. 용연향은 미감(味甘), 기성(氣腥), 성삽(性澁)하여, 기혈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고 통증을 멈추어주는 등의 약효가 있다. 그리하여 약재로 사용한다. 건조한 후에 오랫동안 향기가 나기 때문에 향료로도 쓴다. 용연향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마다, 동서양의 각 지역마다 서로 쓰는 방법이 달랐다.

 

중국의 명나라 가정연간(1522-1566)에, 몇몇 방사들이 용연향을 '불사약' '만세향병'의 주요원료로 썼다. 소위 '불사약'은 실제로 춘약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전국에서 이 용연향을 수집하도록 시킨다.

 

가정황제 명세종 주후총은 이 춘약을 중시했다. 이유는 있었다: 그가 우연히 얻게 된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하루빨리 자식을 낳고 싶어했다(명무종 주후조가 31살에 급사하면서 자식을 두지 않아서, 흥헌왕의 장남인 13살의 주후총이 황제가 된다). 그러나 일은 뜻과는 달리 진행된다. 비록 그가 세 명의 황후를 두었지만, 10년동안 여전히 자식이라곤 아들이건 딸이건 두지를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한편으로 도교에 귀의하고, 다른 한편으로 각종 기이한 약물을 끌어모아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황제가 입을 열자 당연히 수량은 엄청났다. 가정34년(1555년)에 호부에 '향 백근'을 구하도록 시킨다. 용연향은 비록 중국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고, 발견된 시간은 은상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희귀품이었다. 국내의 수량은 제한적이었다. 시장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후 용연향의 주요산지인 광동에 조달책임을 맡긴다. 비록 조정에서 용연향을 구매하라고 하였고, 근당 1200냥의 고가였다. 그래도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이리저리 끌어모아도 겨우 십여냥에 불과했다. 백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중국에서 얻기 힘든 용연향이 포르투갈인들의 손에는 적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용연향에 대하여 일찌감치 인식하고 응용했다. 1265년에 이미 alambre(ambre의 정관사 형식. ambre는 용연향의 포르투갈어 명칭임)가 나타나고, 대항해기간에, 포르투갈의 동방에 관한 서적에는 여러 곳에서 용연향이 언급되어 있다. 용연향은 포르투갈에서의 용도는 주로 두 가지였다. 향료와 약물. 포르투갈인들은 용연향을 아주 중시한다. 이것을 황금, 상아, 서각, 해마아(海馬牙)등과 같은 귀중품으로 여겼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포르투갈인들은 한 때, 인도양과 대서양의 용연향무역을 독점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용연향의 유럽집산지가 된다.

 

중국황제가 대량의 용연향을 급히 구하는데, 포르투갈인들의 손에는 용연향이 많았다. 이런 수요공급관계로 인하여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를 차지하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를 차지하게된 원인에 대하여 뇌물설과 패점설(覇占說), 구도설(驅盜說)등이 있다. 연구가 심도를 더해가면서, 이들 이론은 모두 한계성을 드러냈다. 모두 해결되지 않는 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용연향설'은 가장 이치에 맞았다. 가장 먼저 '용연향설'을 제기한 학자는 대만의 양가빈(梁嘉彬, 1910-1995)이었다. 일찌기 1968년에, 그는 <<명사고불랑기전고증>>에서 이런 글을 썼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에 중국과 통상을 할 때, 포정사 오정거는 황상에 올릴 향이 부족한 고로, 파격적으로 그들에게 시장을 열 수 있게 해주었다; 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마카오경내에 거주하도록 허용했다; 청나라때 아편에 세금을 거두게 된 연고로 그들은 영원히 마카오를 관리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마카오를 잃은 것은 첫째는 용연향에 잃은 것이고, 둘째는 아편에 잃은 것이다."

 

양가빈의 이후에 마카오 학자인 김국평, 오지량등이 이 견해를 취한다. 그리고 여러 편의 논문을 쓴다. 그 요점은 광동의 관리들이 대담하게 마카오를 포르투갈인들에게 빌려주어 거주하게 한 것은 겉으로는 정을 대신하여 오랑캐가 바치는 2만과 땅임차료 500냥을 받을 수 있고, 속으로는 자신들이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약간의 뇌물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로부터 가경제의 춘약배합재료인 용연향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때문에 광동관리인 해도부사 왕백, 포정사 오정거등은 대담하게도 상사와 싸우면서,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거주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이렇게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용연향이 포르투갈인들을 마카오에 거주하게한 가장 결정적인 요소중 하나 혹은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배후에는 제도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가설은 역사에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한번 해보는 것도 무방하다. 만일 세상에 '부녀와 교합시에 특효가 있고 뇌와 위를 건강하게 해주는'(포르투갈인들의 글에 나오는 문구임) 용연향이라는 물건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중국근대사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