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1669년(강희8년), 안휘(安徽) 선원현(仙源縣)의 거인(擧人) 왕치화가 북경으로 회시(會試)를 치러 와서 북경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번이 벌써 그에게는 4번째 낙방이었다. 여러 해동안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왕치화로서는 비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때의 과거제도는 두 단계로 나뉜다. 하나는 과거의 초보시험이고, 하나는 과거의 정식시험이다. 과거의 초보시험에도 3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시(童試), 하나는 세시(歲試), 하나는 과시(科試)이다. 동시는 일반적으로 소고(小考)라고도 부른다. 어려서 초시에 응할 때를 '동생(童生)'이라고 부른다. 동생이 일정한 시험을 통하여 선발되고, 현(縣)에서 선발된 후 독학(督學)에 가서 시험을 친다. 독학시험에 합격하면 그때부터 "수재(秀才)"라고 불리게 된다. 수재는 매년 1회 시험이 있다. 이것도 우수한 자를 선발하는 과정이고, "세시"라 한다. 매3년마다 한번씩 큰 시험에 참가하는데, 이것을 "과시"라 한다. 그 목적은 '거인(擧人)'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거인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이어지는 것이 과거의 정식시험이다. 여기에도 3종이 있다.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향시는 매3년마다 1번씩 시행된다. 즉, 자(子), 묘(卯), 오(午), 유(酉)의 해의 8월에 향시가 거행된다.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라고 부른다. 거인은 실제로 후보관원이다. 이때부터 관리가 될 자격이 생긴다. 청나라때의 과거제도에 따르면, 거인은 이부에 등록하고, 일정한 관직을 부여받을 수 있다. 현관(縣官)이 될 수 있다. 당연히 이 직위는 아주 적으므로, 매년 겨우 40명에서 130명가량의 인원밖에 없다. 거인의 수도 적지만, 거인중에서 관원이 되는 것은 더욱 적다. 이것이 첫번째인 향시이다. 이어지는 것은 회시이다. 회시는 향시에 이어서 그 다음해 2월에 거행된다. 향시는 첫해의 8월에 시험이 끝나고, 회시는 다음해 2월의 봄에 북경에서 시험을 친다. 그리하여 "춘시(春試)"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회시이다.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라고 부른다. 진사는 매번 약 300명가량이 뽑힌다. 회시를 치른 이후에 세번째 시험인 전시가 치뤄진다. 회시가 끝난 두번째 달에 진행된다. 개략은 4월경에 진행된다. 전시는 황제가 태화전에서 직접 주재한다. 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흠정(欽定)의 진사이고 직접 관원이 된다. 이것이 청나라때의 과거제도이다. 명나라때부터 형성된 아주 엄격한 과거시험제도이다.
왕치화는 집안이 가난했다. 가난한 거인으로서, 그가 관원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0에 가까웠다. 당시 거인 신분으로 관리가 되는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적었다. 봉모인각(鳳毛麟角)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그는 집안이 가난해서 아래위로 부탁할 기반도 없었다. 그가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회시를 통과해서 진사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여러번의 회시에서 계속 낙방을 하다보니 그는 실망하고 기운을 잃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부모님과 고향어른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는 떠나올 때, 고향어른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부모의 눈빛은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는 고향으로 서신을 보내어, 그가 북경에서 문인이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베끼는 일거리를 찾았다고 적었다. 스스로 일하면서 공부하고, 다음번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집안을 빛내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적었다.
경성은 쌀값도 비싸고, 그냥 지내기는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 왕치화는 집안에서 두부를 만드는 것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기술이 그를 도와주었다. 생계를 위하여, 그는 북경이 안휘회관 부근에 집을 빌려 두부를 만들었다. 낮에는 길거리에 나가서 팔고, 밤에는 협소한 집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다음해 시험을 준비했다.
두부장사는 괜찮은 편이었다. 왕치화는 장사도 하고 글도 읽으면서 지냈다. 기쁜 일과 슬픈일을 모두 겪어가면서.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한번은, 왕치화가 두부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그날 다 팔아버리지 못했고, 조금 남게 되었다. 어떡할 것인가? 마침 여름이어서 남은 두부는 쉽게 곰팡이가 피고 변질될 수 있었다.
왕치화는 황급히 귀를 잡고 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그는 두부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서 약간 햇벝을 쬐고, 다시 소금, 화초등을 뿌려서, 단지에 담궈두었다. 그는 이렇게 하면 두부에 곰팡이가 피는 것을 늦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남은 두부를 팔아버리지는 못하더라도, 남겨서 자기가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후 그는 글을 읽느라 이 일을 점점 잊어버렸다.
가을바람이 불고, 날씨가 하루하루 서늘해갔다. 왕치화는 갑자기 예전에 단지에 묻어두었던 남은 두부가 생각났다.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미 못먹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단지를 열어보았는데, 과연 두부는 이미 청록색을 띄고 있었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이것을 먹을 수 있을지 맛을 보았다. 작은 조각을 떼어서 혀에 대어보았는데, 약간 짜고, 약간 늘어붙는 것같았지만, 먹으니 냄새 속에 향이 있었고, 향이 아주 진하고 맛이 좋았다. 그는 아예 한 조각을 입안에 넣고 먹어보았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있었다.
왕치화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단지에 담궈두었던 이 두부를 꺼내서 몇개를 고향사람들에게 맛보게 했더니, 모두 좋다고 감탄을 했다.
정말 일이 묘하게 되었다. 왕치화는 생각지도 않은 행운에 기뻐했다. 이 처우떠우푸(臭豆腐)사업은 독점해서 할 수 있으니 반드시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왕치화는 이미 과거시험의 팔고문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딱딱한 틀에 맞추어 글을 만들고 문장을 찾는 부유(腐儒, 썩은 선비)가 되기 보다 오히려 처우떠우푸에 인생을 걸어보기로 결정한다. 삼백육십업종에 모두 장원이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과거 분야에서는 자기가 진사에 오르지 못했지만, 다른 분야에서라면 자신이 장원을 할 수도 있다. 과거를 통하여 공명을 얻는 것은 포기하고, 장사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왕치화는 이때부터 '처우떠우푸'사업에 매진한다. 이 독특한 맛을 지니고 가격은 싸며, 입맛을 돋구는 음식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판매처를 점차 늘여가며 사업은 번성한다.
강희17년(1678년)에 왕치화는 전문(前門) 밖의 연수사가(延壽寺街)에 가게를 하나 매입하여, 처우떠우푸공장을 연다. 앞은 가게이고 뒤는 공장이다.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름은 "왕치화남장원(王致和南醬園)"이라고 짓는다. 처우떠우푸를 주업으로 하여 장두부(醬豆腐), 두부간(豆腐干) 및 각종 장채(醬菜)를 팔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우떠우푸는 동북, 서북, 화북의 각지로 퍼져간다. 왕치화 처우떠우푸의 이름은 사방으로 퍼져간다. 그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돈을 많이 벌었다.
왕치화는 기술과 생산공법을 개선하는데 노력했다. 여러번의 개선을 거쳐, 그의 처우떠우푸는 품질이 더욱 좋아졌고, 명성도 더욱 커졌다. 청나라말기에는 궁중에까지 들어간다. 서태후도 늦가을 초겨울에 즐겨 먹었다. 그리하여 어선소채(御膳小菜)로 정해진다. 그 모양에 따라 이름은 '청방(靑方)'이라고 붙인다. 처우떠우푸는 어선소채로 지정된 후 더욱 유명해진다.
"왕치화"의 문앞에는 3개의 편액이 서 있고, 채색의 용머리가 있다. 그 의미는 '궁중에서 사용한다'는 뜻이다. "왕치화남장원"이라는 여섯글자는 두 개의 편액이 있는데, 각각 장원 손가내(孫家鼐), 노기광(魯琪光)이 써준 것이다. 손가내가 쓴 것은 두 폭의 장두대(藏頭對)인데, "치군미미전천리(致君美味傳千里) 화아천기양촌심(和我天機養寸心)", "장배용반조작약(醬配龍蟠調芍葯), 원개계척종부용(園開鷄跖鍾芙蓉)"인데, 머리글자를 연결해서 읽으면, "치화장원(致和醬園)"이 된다.
왕치화의 사업이 날로 번성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모방하기 시작한다. 청나라 광서연간에 선무문밖의 연수사가등지에 왕정화(王政和), 왕지화(王芝和), 치중화(致中和)등의 장원(醬園)이 생겨났다.
1956년에 공사합영되고, 1958년에 왕치화, 왕정화, 왕지화, 치중화의 4개 사영공장은 합병하여 국영 전촌양조창(田村釀造廠)이 된다. 현재는 북경왕치화부유창(北京王致和腐乳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과거제도로부터 버림받은 왕치화는 상계에서는 총아가 된다. 썩은 선비 한 명은 줄어들었지만, '중화노자호(전통점포)'는 하나 더 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지방 > 북경의 어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경에는 몇 개의 왕부(王府)가 있는가? (0) | 2010.02.08 |
---|---|
동교민항(東交民巷): 북경 최초의 대사관구역 (0) | 2009.11.09 |
북경의 동부서귀(東富西貴) (0) | 2009.01.10 |
청나라 팔기(八旗)와 북경지명 (0) | 2008.11.06 |
장성과 운하 (0) | 2008.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