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동부서귀(東富西貴)"는 북경성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 뜻은 북경성의 동쪽에는 돈많은 사람이 비교적 많고, 서쪽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 비교적 많다는 말이다. "동부서귀"라는 말은 현상을 묘사하는 것일 뿐아니라, 역사적인 유래도 있다. 다만, 역사상 최초로 나온 "동부서귀"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동부서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명나라때이다. 이 말이 나온 것은 대운하(大運河)와 관련이 있다.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를 만들 때, 그 대운하가 나중에 북경에 이런 고정된 국면을 남길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대운하가 완공된 후, 북쪽의 종점은 바로 현재의 북경동부의 통주구(通州區)이다. 과거에는 통현(通縣)이라고 불렀다. 원나라때, 곽수경(郭守敬)이 통혜하(通惠河)를 건설하는데, 현재의 이화원에서 서직문(西直門)을 거쳐, 적수담(積水潭)에 이르고, 다시 일직선으로 통현의 대운하종점에 연결된다. 즉, 원나라때는 대운하가 남방에서 운송해온 물자를 배에 싣고 계속 운항하여 적수담까지 가져왔다. 적수담은 현재 북경의 후해(後海)지역이다. 당시 적수담의 면적은 오늘날보다 훨씬 컸다. 원나라의 대도성(大都城)에서 가장 번호한 지역은 바로 종루(鐘樓),고루(鼓樓)에서 덕승문(德勝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오늘날의 사가(斜街, 비스듬하게 난 길)인다, 당초에는 적수담의 제방을 따라 건설된 길이었다. 장사하는 거상들이 대부분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때의 대도성에는 "동부서귀"라는 말이 없었다.
명나라의 북경성은 원나라의 대도성과 많이 달라졌다. 명나라의 북경성은 북쪽의 성벽을 방어의 편의를 위하여, 원대도보다 남쪽으로 내려 줄여버렸다. 이것이 현재의 북이환로(北二環路)이다. 서북지역 모서리의 서직문은 시공여건, 지질조건등의 제한으로, 성벽을 직각으로 만들지 못하고, 각도를 기울여 성벽을 쌓게 되는 바람에, 적수담의 일부분이 성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나중에 이곳을 태평호(太平湖)라고 부르게 된다. 바로 문혁때 노사(老舍) 선생이 몸을 던져 자살한 그 호수이다. 현재는 모두 메워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저 이름만 남겼다. 예를 들어, 고량교(高梁橋)가 있다. 고량교라는 이름은 역대이래로 이곳에 고량하(高梁河)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나라때 만든 통혜하는 자금성을 지나가므로, 명나라사람들은 이것이 황실의 존엄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운하에서 통혜하를 거쳐 적수담에 이르는 수상항운의 꼬리를 잘라버린다. 이후, 통현방향에서 운송해오는 물자는 대부분 북경성의 동부에 집중된다. 원나라때처럼 직접 적수담까지 운송해오지 않게 된다. 대운하는 중요한 수상의 상업길이다. 종점부근에는 시장이 형성된다. 그리고 상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경성 "동부"의 유래이다. 그러나, "동부서귀"는 명나라시기에는 북경성의 동서 두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숭문문(崇文門), 선무문(宣武門) 일선 이남의 남성지역을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대체로 말하자면, "동부"는 현재의 숭문구를 말하는 것이고, "서귀"는 지금의 선무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귀"의 형성에도 일정한 역사적 원인이 있다. 명나라의 조정고관은 상인들과 이웃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주지로 상인들이 비교적 적은 남성의 서부지역을 선택하게 된다. 즉, 현재의 선무문 이남지역이 된다. 예를 들면, 현재의 호광회관(湖廣會館)은 옛날 장거정(張居正)의 집이었다. 청나라때는 기효람(紀曉嵐)도 이곳에 살았다. "서귀"의 또 하나의 원인은 과거제도와 관련이 있다. 원나라초기에 과거를 중단한다. 나중에 회복시킨다. 다만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나라 대도로 과거시험에 참가하러 오는 지방의 선비들은 수가 많지 않았다. 명나라는 대규모로 과거제도를 회복시킨다. 전성기때는, 북경으로 와서 최종단계의 시험에 참가하는 사람의 수가 만명에 달했다. 그들은 모두 선무문남쪽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 전국각지에서 오는 선비들은 대부분 각각의 동향 "회관(會館)"에 머물렀다. 선무문남쪽지역이외에도 약간의 "회관"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아주 적다.
중국고대사회는 글을 읽는 것이 성공의 가장 좋은 방안이었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집중하여 거주하는 선무문남쪽지역은 자연히 상인들이 집중하여 거주하는 숭문문남쪽지역보다 고귀했다. 여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붙고, 관료로서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선무문남쪽지역에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지위가 "고귀"함은 부유한 상인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서귀"의 또 하나의 원인은 <<사고전서>>와 관련있다. 청나라는 10년의 시간을 들여, 많은 국내의 일류 학자들을 끌어모아서, <<사고전서>>를 완성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선무문남쪽에 거주했다. 일부 상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경성최대의 서시(書市, 책시장)를 열었는데, 나중에 문방사보, 골동품의 집산지가 된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유리창(琉璃廠)이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문인들의 필묵방향(筆墨芳香)은 절대로 사인들의 돈냄새(銅臭)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부서귀"는 나중에 변화를 겪게 된다. 청나라후기에, 서방인들이 속속 북경으로 온다. 그들이 북경에 도달하는 노선은 대부분이 해로로 천진(天津)에 도착한 후, 천진에서 서쪽으로 통현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는 것이다. 즉, 외국인들은 동쪽방향에서 북경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북경성의 동쪽에 사관(使館)지역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당시, 북경으로 온 서방인들은 숭문문지역의 상업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선무문지역의 중국문화분위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교민항(東交民巷)이 사관지역이 된 후, 많은 외국인들이 동쪽에 거주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대사관지역도 북경성의 동쪽에 집중되어 있다.
그때의 외국인은 부자였다. 이리하여 "동부서귀"의 말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비록 나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돈있는 외국인이야말고 진정으로 고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뼈대있는 중국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비록 북경성의 동부는 확실히 현대화되었고, 불빛이 휘황하고, 고급소비가 이루어지지만, "동부서귀"의 이미지는 여전히 북경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예전에 과거시험에 참가하던 선비들이 선무문남쪽에 밀집되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북경성의 서부에는 많은 대학이 밀집되어 있다. 마치 명나라때 형성된 "동부서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것같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주 "부귀(富貴)"를 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처럼 그다지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재의 "동부"는 부귀를 추구하기 시작하고, 현재의 "서귀"도 재물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동부서귀"는 지금은 그저 역사의 잔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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