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수우(黃守愚)
백회본소설 <<서유기>>의 진정한 작자가 누구인가? 역시 고증할 방법이 없다.
백회본소설 <<서유기>>가 가장 먼저 간행된 것은 명나라 만력 20년(1592년)이다. 금릉당씨세덕당각본(金陵唐氏世德堂刻本)으로 20권, 100회이다. 여기에는 작자의 성명이 적혀 있지 않다. 책을 간행한 진원(陳沅)의 서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서유>>라는 책은 누가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혹은 천황하후왕지국(天湟何侯王之國)이 썼다고 하고, 혹은 팔공지도(八公之徒)가 썼다고 하고, 혹은 왕자제(王自制)가 썼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때 사람인 오옥(吳玉), 완규생(阮葵生)등과 근대의 노신, 호적등은 학문태도가 전혀 엄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명나라 천계연간의 <<회안부지(淮安府誌)>>에 근거하여, "오승은(吳承恩)"의 작품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회안부지>>는 합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고, 믿을 수가 없다. 백회본소설 <<서유기>>는 다른 판돈에는 "화양동천주인교(華陽洞天主人校)"라고 쓴 것이 대다수이고, 일부는 원(元)나라때의 장춘진인 구처기(丘處機)라고 쓰여 있다. '오승은'이라고 작자를 표시한 것은 없다. 원나라때의 도사 구처기는 확실히 지리서인 <<서유기>>를 쓴 바가 있고, 원말명초의 희곡가 양경원은 잡극 <<서유기>>를 쓴 바 있다.
명나라 천계연간의 <<회안부지>> 권19(예문지>> - <<회현문목>>에는 "오승은이 <<서유기>>를 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다른 성격의 저작인지는 밝혀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청나라때 함풍연간에 새로 발간된 <<회안부지>>에는 오승은이 <<서유기>>를 썼다는 부분을 삭제해 버린다.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오승은의 <<서유기>>는 현재의 소설 <<서유기>>일까? 이는 확인하기 어렵다. 청나라초기의 저명한 장서가인 황우직(黃虞稷)은 <<천경당서목>> 권8 사부(史部) 지리류목록에 오승은의 <<서유기>>를 기록하고 있다. 권수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천경당서목>>에서는 오승은의 <<서유기>>를 지리서적으로 분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오승은이 썼다는 지리학저작인 <<서유기>>는 찾지 못했다. 비록 <<천경당서목>>에는 적지 않은 잘못이 있지만, 지리류에 오승은의 <<서유기>>를 집어넣은 것이 잘못인지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연히, 우리는 "오승은"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확실히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천경당서목>>에 따르면, 오승은은 <<사양선생존고>>를 썼다. 그러나, 지금 오승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시문이나 친구들의 글에서도 오승은이 소설 <<서유기>>를 썼다는 내용은 없다. 양준 선생은 오승은의 시문에서 모산(茅山) "화양동천" "구곡(句曲)" "양상지폐(良常地肺)"등의 기재가 있는 것을 가지고, "금릉세덕당" - "화양동천" - "화양동천주인교" - "모산" - "남경" - 말릉진원의 서문 - 오승은시문집 <<사양선생존고>> - 오승은평생경력 - 백회본 <<서유기>>의 순서로 연결시켜, 오승은이 바로 소설 <<서유기>>의 작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방증이다. 직접적인 증거로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의 추리는 한가지 가능성일 뿐이지, 필연성은 아니다. 이런 논리라면, 당시 남경일대에 생활했던 문인이라면 그리고 시문에서 '화양동천'을 언급한 사람이라면 유사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백회본 <<서유기>>의 작자명단에 오를 수가 있다.
서기1921년 호적은 <<서유기서(西遊記序)>>에서 이를 '명나라 중엽이후 한 무명의 소설가가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에 노신 선생은 <<서유기>>가 오승은의 작품이라고 고취시킨다. 호적은 노신선생이 제공한 사료를 받아본 후, <<서유기고증>>에서 노신의 설을 따라간다. 노신, 호적 두 사람이 근거한 간접자료가 2개, 직접자료는 단 1개이다. 이들 증거는 모두 합법성이 없고,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서유기>>의 작자를 오승은이라는 주장에는 합법적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설 <<서유기>>의 원형은 당나라의 현장법사가 인도로 불교경전을 얻으러 가는 이야기이다. 진실한 사적은 <<대당서역전>>과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등이 있다. <<서유기>>는 집단창작작품이라고 하여야 한다. <<대당삼장취경시화>>에서 원나라때의 <<서유기평화>>, <<서유기잡극>>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 첨삭가미되었다. 거기에 '화양동천주인'이 <<서유기>>의 앞뒤를 교열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다행히 고대인들은 현대인들처럼 지적재산권개념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양동천주인"은 분명히 소송을 벌여서 표절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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