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은하(水銀河)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았다. 금년의 노벨문학상은 독일의 여작가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네티즌들은 중국은 언제나 노벨문학상을 품에 안을 수 있을지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실상 1968년에 스웨덴의 심사위원회는 투표로 노벨문학상을 중국작가 노사(老舍)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아쉽게도 사정이 있어, 일본인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노벨문학상을 주워가게 되었다.
노사는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노신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파금(巴金)처럼 함축적이고 무겁지도 않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는데 뛰어나서 한사람 한사람의 비환리합(悲歡離合)을 잘 그렸다. <<사세동당>>, <<낙타상자>>, <<차관>>은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이들 작품을 다 읽어보면, 다큐멘터리를 볼 필요가 없고, 사료를 뒤적일 필요가 없다. 그 시대의 현실생활, 인간의 고통이 마음에 그대로 와 닿는다.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명실상부하고 칭호에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한다.
노사선생이 이렇게 좋은 작품을 써냈는데, 그것은 완전히 생활과 현실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북경의 사합원에서 자라난 아이로서, 노사는 어려서부터 하층인민과 함께 생활했고, 매일 접촉한 사람들이 차부(車夫), 수공업노동자, 소상인, 하급예술가, 창기(娼妓)등 사회하층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도시빈민이었다. 매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모두 이들의 희노애락이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창작소재였고, 항상 노사를 훈도했다. 인간세상의 비극을 너무 많이 목도한 후에, 문학의 길로 들어선 노사는 평민생활을 자신의 창작방향으로 삼았다.
1926년, 노사선생은 첫번째 장편소설 <<노장의철학>>을 발표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노사"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이 사건은 노사문학창작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노장의철학>>이 완성된 후, 그는 연이어 <<조자왈>>, <<이마>>를 발표한다. 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후하여, 그의 셋째딸인 서우재(舒雨才)가 막 태어났다. 그는 의연히 처와 딸을 떠나, 항일구국의 흐름에 가담한다. 1938년에 성립된 "중화전국문예항적협회"에서 노사는 총무부 주임을 맡는다. 항전기간동안, 그는 단편집 <<화차집>>, <<빈혈집>>, 장편소설 <<화장>>을 출판하고, 일생중 가장 중요한 장편거작 <<사세동당>>의 전2부인 <<투생>>과 <<황혹>>을 완성한다. 소설은 기씨(祁氏) 4대의 고난의 경력을 통하여, 함락지역 인민의 비참한 처지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들은 환상이 깨진 후에 마침내 깨닫고, 항전에 가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노사의 강렬한 애국주의정신을 드러내주는 거작이다. 중화인민의 항전이 남긴 위대한 기념비이다.
해방후의 노사는 자신의 '노사'라는 필명에 부끄럽지 않게, 매일 글을 쓰기를 쉬지 않았고, 죽어라 창작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문예계의 "노동모범"이라고 일컬어진다. 동시에, 그는 곡예(曲藝)에도 관심이 많아서, 상성(相聲), 하북방자, 대고(大鼓), 단현(單弦)등의 곡예작품을 창작한다. 그의 작품은 여러 외국어로도 번역된다. 놀랍게도 스웨덴어까지 있었다. 이를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사의 문학적 성취는 결국 1968년 노벨문학상의 심사위원회를 정복한다. 당시 후보자는 모두 5명이었는데, 노사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스웨덴 주중국대사는 기뻐하며 중국에서 노사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런 회신도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노사가 이미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벨상에는 불변의 원칙이 하나 있는데,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는 수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의 심사위원회는 문학상을 동방의 작가에게 부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카와바타 야스타리가 그 해의 수상자로 된다.
사실상, 노사는 문혁이 시작된 1966년에 공격과 박해를 받았다. 문련(文聯)의 한 비투회(批鬪會)에서 일군의 여자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한다. 치욕을 견디지 못한 그는 다음날 태평호에 뛰어들어 자결한다. 이리하여 중국은 20세기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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