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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고강(高崗)은 어떻게 "동북왕(東北王)"이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8. 13.

글: 노위병(路衛兵)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고강은 아주 특수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특수한 점은 그가 당을 분열시키고, 당과 국가최고권력을 찬탈하려고 한 "고요반당연맹(高饒反黨聯盟)"에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상 이것은 그의 권력이 강대해진 후에 권력욕이 팽창해서 일어난 일이다. 이전에 고강의 정치적 성장은 수직상승이었다. 그는 32세에 섬감녕(陝甘寧, 섬서, 감숙, 영하)변구보안사령부 사령관이 되고, 36세에 중공중앙 서북국(西北局) 서기가 되었으며, 40세에는 중공중앙 정치국위원에 선임되고, 44세에는 동북국 서기, 동북군사령관 겸 정치위원, 동북인민정부 주석을 겸임했다. 한 지방의 당정군의 권력이 그 하나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경우는 고강 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하여 명실상부한 '동북왕'이 된다.

 

고강이 '동북왕'이 된 것은 이후 그가 정치적인 야심을 팽창시킨 것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는 동북이라는 이 땅에서 물만난 고기와 같았고, 정치적으로도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존귀한 '동북왕'이라는 지위는 그에게 너무나 큰 퀀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점점 야심을 팽창시켰고, 그는 현상에 더이상 만족하지않게 되고, 중앙에 더욱 많은 권력을 빼앗고자 한다. 그러다가 결국은 일패도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강은 어떻게 '동북왕'에 오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때문일 것이다.

 

첫째, 고강은 비교적 행운아였다.

 

고강은 섬북홍군(陝北紅軍)과 섬북근거지의 창시자중 하나였다. 경력과 공헌에 있어서 강점이 있었따. 섬북은 특수한 지역이다. 중앙홍군이 국민당의 소탕작전으로 2만5천리의 장정을 거쳐 최후에 도착한 목적지였따. 이곳은 중앙홍군이 재기하는 출발점이었다. 중공중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하여, 중공중앙은 이 근거지의 지방지도자를 더욱 잘 보살펴주게 된다. 그리고 섬북근거지의 또 다른 두 명의 창시자인 유지단(劉志丹)과 사자장(謝子長)은 모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이는 고강의 신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둘째, 고강은 놀랄만한 홍색이력을 가지고 있다.

 

고강의 행운은 그의 개인자질과 능력때문이다. 고강은 학생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횡산현립제1중학에서 그는 학생회주석이었다. 그는 신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구식교육에 반대하는 수업거부를 조직했다. 섬북에서 문화사상전파의 중심지라는 명성이 있는 유림중학으로 전학온 다음에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나중에 당조직에서 파견보내어 풍옥사의 혁명연군에서 병력수송업무를 담당한다. 그후 국민당의 좌파대표인물인 우우임(于右任)이 만든 서안중산군사학교에서 정치교관을 지낸다. 이 생애는 그의 정치적 재능을 갈고닦은 시기이다. 그는 군사에 대한 강의로 유명한 유지단과 함께 "중산군사학교의 쌍벽"을 이룬다. 이때의 고강은 섬서농민운동에도 가담한다. 그리하여 농민운동경험도 쌓는다. 여기서도 출중한 조직능력을 발휘한다. 모택동이 섬북에 온 후에, 농민운동에 가담한 바 있던 고강은 더욱 총애를 받는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농민운동을 제대로 벌이다보니 1927년 6월에 전성에 현농민협회가 50개, 회원이 41만명, 농민자위무장인원이 10여만명에 이른다. 이러한 실적을 얻는데, 고강의 공헌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중에 고강은 기층의 각현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이때 사자장, 유지단과 함께 군벌 소우생(蘇雨生)의 부대로 들어가서 병력운송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사자장, 유지단이 이끄는 섬감유격대에 참가하며, 섬북의 땅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둔다.

 

돌발적인 사건 하나가 고강을 섬북홍군의 주요지도자의 지위로 끌어올린다. 고강은 한번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그리하여 성위원회로 되돌아와서 병력운송업무를 다시 맡는다. 1933년 7월, 성위원회는 배신자로 인하여 파괴되고, 주요지도자들이 체포되며, 혁명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때 고강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는 성위위원의 신분으로, 적시에 서북민중항일의용군 총사령관 왕태길(王泰吉), 섬감변특위책임자 습중훈(習仲勳), 장방영(張邦英), 홍4단 당장 황자상(黃子祥), 섬감변유격총대 및 현급 유격대 책임자를 조직하여 과감하게 진가파회의(陳家坡會議)를 개최한다. 이 회의는 중대한 의미가 있었따. 그는 혁명의 위기시기에 어떻게 혁명역량을 결집해야하는지를 보여주고, 섬북주력홍군을 건립하는 문제를 확정했다. 습중훈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진가파회의에서 노선차이가 나타났다. 하나의 의견은 집중영도에 반대하는 것이었따...고강은 지휘부를 성립시킬 것을 주장했고, 통일행동을 주장했고, 섬감변의 신소비에트구의 확대와 건립을 주장했다. 회의가 끝날 때에는 고강의 노선이 승리했다" 진가파회의는 섬감변홍군임시지휘부를 구성한다. 왕태길이 총지휘를 맡고 고강이 정치위원이 된다. 나중에 유지단이 부총지휘 겸 참모장에 임명된다. 고강의 이러한 조치는 섬감홍군의 역량을 결집시킨 큰 일을 해낸 것이다. 위급한 시기에 섬감지역의 혁명역량을 구해내고 이로서 섬감홍군의 주요지도자의 반열에 오른다.

 

1935년 2월 상황의 필요에 의해, 중공서북공작위원회와 서북군사위원회가 성립된다. 섬감과 섬북의 두 형명근거지를 통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지단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고, 사자장이 부주석, 고강은 정치위원이 된다. 반개월후, 사자장이 옛날에 입은 상처가 도져서 사망한다. 고강이 부주석의 직을 맡는다. 그리하여 유지단의 뒤를 이은 2인자가 된다. 다음해 유지단이 전투중에 전사한다. 고강은 이 중공중앙이 생존을 의존하던 근거지에서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이후 승진에 정치적인 기반이 된다.

 

셋째, 고강은 정치적으로 강점이 있었다.

 

1935년, 고강은 왕명의 '좌경노선'문제때 감옥에 갇힌다. 당시 '숙반'운동으로 근거지는 다시 피해를 입는다. 유지단, 고강, 습중훈등이 모조리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곧이어 중공중앙이 섬북에 오면서 그들은 풀려난다. 중공중앙과 모택동은 섬북근거지의 창시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따. 모택동은 격정적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감사한다. 여러분이 이 근거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이 근거지를 보존했기 때문에, 비로소 당중앙과 홍군이 발을 디딜 수 있는 땅을 마련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더욱 중시된다. 유지단은 와와보경비사령관 및 북로총지휘가 되고, 고강은 섬감성위 소수민족공작위원회 서기가 된다. 유지단이 얼마후 전투중에 전사한다. 고강은 섬감녕변구보안사령관이 된다. 현재로 말하자면 북경위수사령관에 해당한다. 이처럼 중요한 직무를 맡긴 것을 보면 중앙이 고강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넷째, 모택동은 고강을 높이 평가했다.

 

모택동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농민운동에 가담했던 고강에 흥미를 나타낸다. 고강은 젊고 능력이 있었다. 일처리도 깔끔하여 모택동이 높이 평가한다. 모택동은 중공중앙의 명의로 친히 고강을 섬북성위서기와 섬감녕보안사령관에 발탁한다. 한번은 정치국회의때, 모택동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강을 가리켰다: "우리가 처음에 섬북에 왔을 때는, 사람도 낯설고 땅도 익숙치 않았다. 고강동지는 중앙기관의 안전에 큰 힘을 썼다. 나중에 비석을 세울 때, 고강동지에게 가장 큰 비석을 세워주라." 이를 보면 모택동이 고강의 업무에 아주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고강을 아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모택동은 고강을 자신의 '호위'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고강에게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은 한편으로 섬북근거지 창시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지방간부가 지방업무에 익숙하고, 기반이 있으므로 업무하는데 장점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택동이 말한 것처럼 "현지간부가 대량으로 성장하고, 발탁되어야 비로소 근거지가 공고해진다"

 

모택동은 고강의 업무에 대하여도 만족했다. 변구보안사령관으로서, 고강은 한편으로 외부의 적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특무와 반도를 숙청했다. 이렇게 하여 중공중앙지도자들의 안전을 보위했다. 이 업무는 고강의 장점으로 어김없이 드러났다. 모택동등 지도자들이 모두 높이 평가했다. 모택동은 <<당의 작풍 정돈>>이라는 글에서 고강에 대하여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내가 섬북에 온지 5,6년이 되었다. 그러나, 섬북의 상황을 이해하고, 섬북인민과 연락하는 것이 고강동지와 비교하면 차이가 많다." 이를 보면, 모택동은 고강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하는 태도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1953년이후에 출판된 <모택동선집>에는 고강의 이름이 삭제되고, 뒷쪽의 말을 '일부 섬북동지와 비교하면 차이가 많다'로 바뀌었다.)

 

이후 고강은 수직상승한다. 1938년 5월 중공섬감녕변구위서기가 되고, 1940년 9월에 중공섬감녕변구중앙국서기가 된다. 1941년 4월, 중앙이 서북국을 만들고, 고강이 서기가 된다. 그리하여 서북지구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1945년 6월 제7기 1중전회에서는 정치국에 진입한다.

 

다섯째, 고강은 동북에서 물만난 고기였다.

 

1945년 9월, 중공중앙은 동북국의 업무를 강화한다. 이렇게 하여 후방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 중공중앙은 우수간부를 동북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고강은 스스로 그 임무를 맡겠다고 나선다. 그리하여 북만분국위원 겸 북만군구사령관이 된다. 고강은 동북에서 아주 출중한 실적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중공중앙의 인정을 받는다. 아래의 세 가지 사건은 고강이 더욱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1) 비적소탕업무가 순조로웠다. 업무분장에 따라, 고강은 북만주의 비적소탕업무를 지휘한다. 반년의 시간을 들여 효과를 보고, 기본적으로 비적을 뿌리뽑았다.

 

(2) 친히 하르빈해방전투를 기획 조직한다. 하르빈은 동북국의 주재지가 된다. 1948년 1월, 동북민주연군은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명한다. 임표는 사령관 겸 정치위원이 된다. 고강이 부사령관이 된다. 고강은 동북에서 임표의 뒤를 잇는 2인자가 되는 것이다. 8월, 동북의 필요에 따라, 동북인민해방군은 동북야전군과 동북군구로 분리된다. 임표와 고강이 나누어 사령관을 맡는다. 동북국이 성립된 후, 고강은 부서기가 된다. 임표가 전선에 나갔을 때는 고강이 동북국의 업무를 주재했다.

 

(3) 뛰어난 지방업무. 고강은 토지개혁업무를 주재했다. 그는 큰 성공을 거둔다. 요심전투가 끝난 후, 심양을 접수할 때, 고강은 "각자 계통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까지, 원래대로 건드리지 않고, 먼저 접수한 후에 나눈다"는 성공적인 경험을 만들어내어 중앙의 인정을 받는다. 1948년 임표가 중원으로 내려가서 작전을 지휘한다. 이렇게 하여 고강은 순조롭게 동북국의 서기가 된다. 1949년 8월, 고강은 동북인민정부 주석에 당선된다. 이리하여 당정군의 권력이 그 하나에 집중되어, "동북왕"이 되고, 권력이 한때 하늘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