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추수(庄秋水)
"오늘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 중국문화대학 교수 호란성이 7월 25일 일본에서 병사했고, 향년 75세이다.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호란성은 심장쇠약으로 25일 도쿄도 오우메(靑梅)시의 자택에서 병사했다. 그가 타이완의 교수직을 사임한 후, 1976년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호란성은 일찌기 왕정위정부에서 관직을 역임했고, 중공이 대륙을 점령한 후, 그는 1950년에 일본으로 와서 정치적 망명을 했다"
1981년 7월 28일자 AP통신이 도쿄발로 보도한 짧은 통신기사는 호란성이라고 부르는 문인(文人)의 죽음을 전하고 있다.
1개월후, 호란성의 장례가 훗사(福生)시 청암원(淸巖院)에서 거행되었다. 문상하러온 사람들은 선물을 하나씩 받았는데, 거기에는 호란성이 손으로 쓴 "강산여몽(江山如夢)"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호란성의 마지막 부인인 사애진(佘愛珍)은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안에 붙은 '강산여몽'이라는 글자는 망부가 여러해동안 마음 속으로 생각해온 것인데, 늦은 봄날의 어느 밤에 돌연 읊은 것이다. 소위 강산은 고국의 산하, 양자강과 태산을 가리키는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고국 그 자체이다. 소위 몽(夢)은 공(空)이고, 색(色)이며, 선(善)이고, 미(美)이며, 진(眞)이다. 요(遙)이며, 영원한 이상이다. 잘 받으시고, 호란성을 추억해주기 바란다."
만일 호란성의 배경을 잘 모른다면, 아마도 이 정이 묻어나는 말에 감동을 받을 것이고, 이것은 분명히 이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한 애국지사가 최후의 탄식이며, 부모의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십여년전에 그는 스스로 뒤집어썼던 '민족배신자(漢奸)"라는 모자는 그리 쉽게 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재자 호란성을 기억하고, 그와 여작가 장애령(張愛玲)간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랑을 얘기하기를 즐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가 왕정위집단에 들어가서, 왕정위 정부의 선전부 정무차장, 행정원 법제국장,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왕정위집단의 기관보인 <<남화일보>>총주필등을 역임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왕정위정부에 투신하다
호란성이 왕정위집단에 들어가게 된 것도 '글'로 인한 악연때문이다.
1937년, 31세된 호란성은 광서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유주일보>>에 글을 발표했는데, "대일항전을 하려면, 반드시 민간에서 병력을 모아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기운과 결합시켜야 하고, 지방군인이 중앙과 서로 다투고 타협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 글은 지방군벌의 분노를 불러와서, 33일간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고향인 절강성 승현 하북향 호촌으로 가서 오래 헤어져있던 가족을 만난다.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던 이 젊은이는 이 나이대에 보편적으로 부닥치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몸에는 가진 것이 없는데 부모도 봉양해야 하고 자녀도 양육해야 했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호란성은 <<금생금세. 천하병기>>에서 자신의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각설하고 나는 광서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상해를 들러서, 고영금을 만났다. 그는 지금 중화일보에 있다. 나에게 그글을 써보라고 했다. 호촌에 도착한 후 나는 중국수공업을 논하는 글을 썼고, 그해의 관세숫자를 분석하는 글을 한편 써서 부쳤다. 모두 일본대륙신보에 실리게 된다. 그리고 경제학논문발췌 월간잡지에도 전재된다. 중화일보는 얼굴을 알렸다고 생각하여 나를 주필로 청했다. 원래는 총주필을 하게 하려고 했는데, 내가 임백생을 사절하고, 왕정위파에 가입하기 싫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총주필은 고영금에게 양보했다.
그의 이 자술은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중화일보>>는 무명문인의 두편의 경제에 관한 글때문에 그를 총주필로 모시려고 한단 말인가? 호란성의 일생은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여자에 대하여뿐아니라 그의 경력에 있어서도 분식한 부분이 많다. 항일전쟁 승리후 그가 온주로 망명할 때, 장가의(張嘉儀)라는 가명을 썼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은 북경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다. <<금생금세>>에서는 자신은 당초에 그저 북경의 연경대학 부교장실에서 문서를 1년간 써주었다는 것으로 경정했다.
그는 시골의 총명한 아이처럼, 글을 읽은 후, 세상을 나돌아다녔다. 강약수(江弱水)가 말한 것처럼 "민간에서 얻은 것은 강호기(江湖氣)이고, 역사로부터 얻은 것은 명사기(名士氣)이다. 양자가 합쳐지면 호씨 특유의 책사기(策士氣)가 이루어진다" 그는 왕정위집단에 투신한다. 이것은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가 세상에 드러난 것도 왕정위 계파에서였다. 그가 보기에 장개석과 왕정위는 그저 하나는 '정책(正冊)' 하나는 '부책(副冊)'이었다. 각자 승리할 가능성을 절반씩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승패라는 것은 그저, "도화꽃이 지면 연꽃이 피고, 우리가 가면 새 사람이 온다. 그게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시골농촌 출신의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조상을 빛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 그리고 계산과 술책에 뛰어나다. 그는 국민정부에서라면, 그가 빛을 보는데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왕정위를 따라서 새로운 왕조를 열면, 그의 활동공간도 넓고, '개국'원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에 대하여도 그는 전혀 악감정이 없었다. 심지어 친척으로 생각했다. "나는 일본에 대하여 항상 고난을 함께 겪는다는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고, "내가 일본에 있는 것은 마치 친척집에 손님으로 있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남경공항의 연도에 늘어선 일본군인을 보고는 '일종의 큰 기운이 느껴졌다"고도 했다. 심지어 악명높은 극사비이로(極司斐爾路, 지금의 萬航渡路)76호(왕정위의 특무부대 소재지)에 대하여도 양산박의 '양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의 이런 헛소리들도 '민국세계' "일통하산'과 같은 큰소리로 포장되었다.
상해가 함락된 후, 호란성은 홍콩 <<남화일보>>의 총주필이 된다. 필명인 유사(流沙)로 사론을 썼다. 동시에 왕정위파가 통제하는 울남서점(鬱藍書店)에서도 일을 하며, 전시의 국제정세를 연구했다. 임백생, 매사평, 반중운등과 달을 나누어 보고서를 한편씩 썼다. 호란성의 명성을 드날리게 된 계기는 그가 <<남화일보>>에 쓴 일련의 사설때문이다. 왕정위집단의 여론조작과 신문선전을 진행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왕정위의 부인인 진벽군에게 인정을 받고, 왕정위집단의 핵심에 들어간다.
1938년 12월 22일, 일본수상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대중국성명을 발표한다. "중국과 우려를 동감하며, 탁월한 식견을 지닌 인사와 협력하여, 동아시아 신절서를 건설하는데 매진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투항요구서에 다름 아니다. 이 성명에서 고노에 후미마로는 "선린우호, 공동방공, 경제합작"의 3원칙을 제시한다.
하노이로 이미 도망쳐 있던 왕정위는 여관에서 넘어져서 다리에 부상을 입는다. 침대에서 고노에 후미마로의 성명을 읽는다. 비록 중광당(重光堂) 밀약이 있었지만(1938년 11월 12일 왕정위와 일본이 체결한 왕정위의 평화운동참가조건), 차이가 아주 컸지만, 그는 이때 이미 강물을 건넌 졸자(過河卒子)에 불과했다. 그는 성명을 초안하여, 일본과 강화하겠다는 주장을 12월 31일 <<남화일보>>에 발표한다. 이것이 바로 악명높은 "염전(艶電)"이다.
장개석은 왕정위가 도망친데 대하여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일기에서 "국가의 어려움이 사상유례없는 위기의 때에, 일체를 돌보지 않고, 소매를 떨치고 개인적인 행동에 나서서, 당과 국가를 내팽개치니 이 어찌 우리 혁명당원의 행동이라 할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스스로 느끼고 되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염전"이 공개된 후, 국민당중앙은 왕정위의 당적을 제명시킨다. 5일후에 호란성은 <<남화일보>>에 사평 <<우리의 정중한 성명>>을 발표한다. 국민당중앙상임위원회가 왕정위의 당적을 제명시킨 결의에 항의하는 내용이다. 그는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왕정위가 호당애국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정위와 장개석은 모두 "화(和)"를 원한다. 서로 다른 것이라면, 형세판단과 조건의 해석이다. 그래서 이것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 글은 나중에 <<전쟁도 어렵고 평화도 쉽지 않다>>는 사서평론집에 수록된다. 이 평론집에는 모두 104편의 글이 수록되었는데, 쓴 시간은 1939년 1월 4일 <<우리의 정중한 성명>>부터 시작하여 12월 12일의 <<건군의 사명>>까지이다. 호란성은 입술과 혀를 놀려서 1년동안 평균 3일에 1편씩 정치사설의 글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한다. 그는 왕정위를 위하여 변명하고 적을 욕하며, 시국을 분석하고, 전쟁형세방향을 예측했다. 왕정위는 이 간장(干將)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친히 이 사설집에 서문을 쓴다. "호란성 동지의 소위 '전쟁도 어렵고 평화도 쉽지 않다'는 것은 정말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잘 개괄하고 있다. 호란성 동지가 염전이후에 많은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국내정세 국제형세에 모두 깊이있는 인식과 아주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잘 말했다. 어떻게 적극적으로 '평화'를 쟁취할 것인가이다. 이는 실로 일침견혈(一針見血)의 말이다...호란성 동지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쟁취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증세에 대하여 내린 처방이다. 전쟁과 평화의 대계에 조금이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아무런 정치경험도 없는 일개 서생이 왕정위 집단에 들어간 후 짧은 2년만에, 당영수로부터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다니, 호란성은 혼자서 속으로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왕정위가 하노이에서 상해로 왔다. 그리고 '평화운동'을 고취시키는 기수를 만난다. 호란성의 사후기술은 그의 일관된 바대로 허실이 섞여 있다: "그대 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중화민국역사상 이렇게 유명한 인물과 처음 만나는 것이다. 무슨 느낌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저 산하대지가 모두 제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왕정위와 후란성은 서로 안부를 묻고, 호란성의 일가 식구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도 한다. 이어서 왕정위는 핵심으로 들어간다. "나는 난성 선생에게 선전의 대사를 맡기고 싶다. 중국의 영토와 주권독립을 온전하게 하는 일은 선생의 붓에 달렸다."
장애령은 일찌기 호란성이 "그는 사람에게 쉽게 감격하지만, 그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다"고 한 바 있다. 왕정위의 은혜에 호란성은 십분 감격한다. 그는 왕정위의 문담(文膽)이 되어, 매월 적지 않은 수입을 얻는다. 그리고 거액의 기밀비도 받는다. 그러나 왕정위정부가 성립될 때, 중심은 이미 선전업무에서 정부조직으로 옮아가 있었다. 붓을 놀리는 호란성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왕정위정권의 선전부 정무차장에 앉으며, <<중화일보>>총주필을 겸임한다.
고설요순(鼓舌搖脣)
똑같이 왕정위정권에서 매체업무를 했던 김웅백(金雄白)이 1959년에 옛날 일을 회고하면서, <<왕정위정권의 시작과 끝>>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본 잡지에서 쓴 왕정위정권의 일대를 논하자면, 그중의 인물들은 극소수가 학식이 있고, 포부가 있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그저 오락가락하고, 줄을 대어 먹고 살길을 찾는 자들이었다. 비록 일부는 요행이 뜻을 이루기도 했지만, 좋은 꿈은 쉽게 깨는 법이다. 남가일몽이다. 나의 일생동안 보아온 여러 사람들 중에서 모두 '금방 높은 건물을 짓다가, 금방 건물이 무너져 버리는' 운명을 많이 보았다."
"오락가락하고, 줄을 대어 먹고 살길을 찾고, 요행히 뜻을 이루었다"는 것은 호란성의 왕정위정권에서 초반의 몇년동안 잘나가던 때의 상황이다. 그러나 ,금방 그는 다시 감옥에 갇히는 재난을 겪는다.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일에 내가 참가한 것은 그저 봄날 백가지 풀이 다투는 것과 같았다" 그는 철저한 구식 문인이었다. 감정적이고 견고한 사상은 없었다. 스스로는 행동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복잡한 정치투쟁에서 그는 기교가 없었다. 그는 관료의 느낌은 좋아했다. "나는 관직을 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관료의 고귀한 기운은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관료로서의 지혜도 없었다. 왕정위집단의 내부에서 그는 왕정위의 공관파(公館派)에 속하고, 주불해파(周佛海派)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공관파 내부에서도 그는 중량급인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문인의 잘난체하는 개성까지 덧붙여져서 그는 왕정위 한 사람만 따랐다.
1941년, 왕정위정권의 선전부 주상해특파원 목시영(穆時英)이 중경에서 파견한 특무에게 암살당한다. 호란성은 <<중화일보>> 총주필의 직무를 사직하고, 목시영이 사장을 맡았던 <<국민신문>>을 넘겨받는다. 왕정위의 "대변인"에서 주변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마치 왕정위정권의 핵심에서 더욱 멀어진 것같았지만, 그는 시종 왕정위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호란성이 이 신문을 경영하는 목적은 '이 신문을 통하여 평화운동의 당초주장을 다시 내놓은 것이고, 현상을 승인하지 않고, 평화구라고 부르지 않고 윤함구(淪陷區)라고 부르고, 윤함구와 항전구는 모두 하나의 중화민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시 왕정위에게 당초 주장한 것처럼 "평화는 전면적인 평화"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일본군은 강소에서 철수하고 남경정부가 질서를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왕정위는 즉시 일본 육군성 이타다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에게 제안한다. 때마침 일본인들이 정책을 "이화치화, 이전양전(以華治華, 以戰養戰)"으로 바꾸었으므로, 왕정위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리고 단순한 경찰과 특무만으로는 부족하고 군대로 군대를 넘겨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 해에, "청향위원회"가 성립되고, 왕정위는 위원장을 겸임하고, 이사군(李士群)이 주임을 맡아서, 왕정위의 명의로 남경정부의 강소에서의 일체의 군대와 행정, 경제기관을 지휘하게 된다. 호란성은 원래 비서장을 맡고 싶었는데, 최종적인 건의는 경정부 부장인 이사군과 최고군사고문부 고문인 일본인 하루케 요시다네(晴氣慶胤)이 제안한다. 호란성은 결국 여전히 <<국민신문>>에 머물게 된다.
비록 왕정위정부는 성립된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부에는 이미 권력투쟁이 심각했다. 오래지 않아, 호란성은 <<국민신문>>에 발표한 사론으로 인하여 왕정위정권의 실력파 주불해의 미움을 산다. 그리하여 선전부 정무차장의 직위를 잃게 된다. 주불해는 사람을 보내어 <<국민신문>>의 실제지배자인 이사군을 독살해버린다.
이사군이라는 뒷배경을 잃어버린 후, 호란성은 왕정위정부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는 먼저 행정원 법제국장을 맡아서, 왕정위의 방패막이역할을 하다가, 1년후에는 의견이 분분하자 왕정위가 법제국을 철폐한다. 호란성을 전국경제위원회 특파위원으로 보낸다. 이는 거의 면직에 가까운 조치이다.
이미 한가해진 상태하에서, 호란성과 그를 이어 선전부 정무차장의 직을 맡은 곽수봉(郭秀峰)은 함께 매주 토요일 일본대사관의 간담회에 참가했고, 이때부터 일본인과 친밀한 접촉이 시작된다.
그는 일본의 주남경대사관에서 문화사무를 담당하는 서기관 이케다 아쓰기(池田篤紀)를 알게 되고, 이는 그에게 감옥에 갇히는 재앙을 가져다 준다. 이케다와 알게된 후, 그는 1만여자에 이르는 정론글을 쓴다. 이글은 '무의식중에' 이케다가 보게 된다. 이케다는 일본어로 번역하여, 당시의 일본대사에게 보여준다. 나중에는 왕정위에게까지 전해진다. "그것은 내가 태평천국이 패망할 때 충왕 이수성의 진술서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내가 장래에 도망치더라도, 이런 글 하나를 세상에 남겨두고자 했고, 그 글에서는 평화운동을 추진한 것이 그의 원래 뜻과는 다르다고 적었고, 결론은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배하며, 남경정부도 몰락할 것이며, 이를 구하려면 일본의 쇼와유신이외에 중국에서 철수하고, 중국은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예전에 손중산선생이 했던 것처럼 해야한다"고 적었다. 호란성은 나중에 이 글을 쓰게된 이유와 생각을 이렇게 쓴 바 있다.
글때문에 화를 불렀다. 그는 상해로12호 "정치공작국"(왕정위 정부의 또 다른 특무조직)에 의 간수소에 감금된다. 체포령은 왕정위가 친히 내렸다. 호란성은 48일간 갇혀 있다가 나중에 이케다등 일본인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2005년 5월호 <<인각문학>>에서는 이려 등이 호란성의 조카 호청운을 방문한 글 <<금생춘우, 금세청운>>을 실었다. 여기서 1943년 호란성이 체포된 내용을 언급했고, 거의 살신지화를 당할 뻔했다고 적었다. 조카딸인 청운이 상해에서 남경으로 달려가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출활동을 하고, 이케다가 나서서 호란성은 비로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난세재자(亂世才子)
호란성은 <<금생금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영어의 몸으로 있을 때, 소청이 출판하는 <<천지>> 월간의 같은 작가였던 장애령은 재주를 아끼는 마음에서, 소청과 함께 주불해의 집으로 가서 왕정위에게 잘 처리해줄 것을 부탁해달라고 청탁을 한다. 이어서 사람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장애령과 호란성의 첫만남이 이루어진다. 호란성은 열정을 가지고 이 재녀를 찾아가지만, 문앞에서 들여보내주지를 않는다. 명함만을 남긴다. 나중에 장애령이 호란성을 답방한다.
1944년 호란성은 상해의 유명한 여작가 장애령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작가의 재주는 그를 자극했다. 2월, 호란성은 <<신동방>> 잡이에 <<'중국의 운명'의 비판>>을 발표한다. 3월, <<신동방>>잡지에 <<조예(皂隸)? 청객(請客)과 내자(來者)>>, <<<중공의 존재 및 그 성격>>을 발표한다. 5월, <<천지>> 월간 제7,8기 합권에 <<과자각(瓜子殼)>>을 발표한다. 5.6월 <<잡지>>월간 제13권 2,3기에 <<평장애령>>을 발표한다....
그는 동시에 둘째, 셋째부인과 혼인관계를 해제한다고 신문에 싣고는 호란성은 장애령과 결혼에 골인한다. "전후, 그가 구석진 작은 도시에 도망가 있을 때, 그녀는 산넘고 물건너 그를 찾으러 갔다. 황혼에 석유등잔의 그림자 아래에서 다시 만난다" 장애령의 유작 <<소단원>>에 여주인공 구리가 이 때의 감정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그 때의 장애령의 심경일 것이다.
이때,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었고, 퇴락하는 기세가 확연했다. 왕정위 정권의 수뇌인 왕정위도 일본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진공박이 "대리주석"이 된다. 사실상 왕정위정권은 서산에 지는 해였다. 오랫동안 놀고 있던 호란성에게는 아무런 구속없이 큰 일을 벌일 수 있는 기회였다. 이해 11월, 이케다와 함께, 호란성은 심계무, 관영길과 비행기를 타고 무한으로 가서 <<대초보>>를 접수한다.
신문발행은 그의 장기이다. 이번에는 일본인의 세를 등에 업고, 금방 성공을 거둔다. 그는 먼저 언론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그 다음에 내부를 정리했다. 그리고 일본인, 조선인의 수중에서 신문의 발행권을 회수한다. 신문사는 금방 자급자족하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그를 많이 돌봐주었다. 일본군대의 미시나(三品) 보도부장, 무한현지의 후쿠모토(福本) 헌병대장, 엔도(遠藤) 연락과장과 한구의 나카노(中野) 총영사등이 모두 그와 밀접한 교분이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가끔 소위 '반일' 언론이 있어도, 이는 신문의 독립성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고, 일본의 더 큰 이익에 부합했다.
1944년말, 동맹군의 무한에 대한 공습이 갈수록 심해졌다. 일본군도 점차 쇠약해졌다. "공습은 나로 하여금 생명을 직면하게 해주었다. 무엇이 고통인지,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본색인지, 무엇이 번화인지, 무엇이 골력(骨力)인지를 알았다" 호란성은 <<금생금세>>에서 이렇게 말했따. 그는 금방 결혼한 장애령을 버려두고, 17살된 간호사 주훈덕(周訓德)과 전시연애를 즐겼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 된다. 투항의 날이 가까워졌다. 당시 대초보의 호란성은 <<중국인의 목소리>>라는 책을 출판한다. 책에는 31편의 글을 실었는데, 1945년 1월중순에서 3월초까지 쓴 것이다. 호란성은 그 혼자서 '중국인'이 되어 일본인을 위하여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전승하는 것이 미국이 전승하는 것보다 낫다. 일본은 승리하더라도...일본은 식민지 반식민지국가의 해방운동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미전승은 중국에 대하여>>라는 글은 1945년 2월 21일에 썼다. 일본이 투항한 때로부터 반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호란성은 여전히 이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남도 속였다. 이때, 주불해도 2월 9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인정했었다: "시국은 되돌릴 수 없다. 감개무량하다"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고, 호란성은 29군 군장 추평범(鄒平凡)을 종용하여 무한독립을 선언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군으로부터 1만명분의 무기장비를 달라고 한다. 기세등등하여 장개석과 담판을 벌이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돌연히 발생한 질병으로 그의 계획은 복중에서 요절한다. 9월초, 그는 무한을 떠난다. 중경에서 파견나와서 접수하는 원옹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국사(國士)라고 자처한다: "나라가 이제 어려우나, 천명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잠시 피해서, 국민정부가 과연 장주석이 방송하는대로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지 보겠다. 내가 돌아올 것인지 아닌지는 금후 3,5개월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선비는 원래 신하로 삼고싶다고 삼을 수 없고, 욕을 보여서도 안되고, 죽여서도 안된다."
그는 스스로 선비(士)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형적인 책사(策士)의 심리상태이다. 개인의 공명과 이익에 따라 아침에는 진나라 저녁에는 초나라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지모와 계책으로, 말재주와 글재주로, 사방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호란성이 일본에 망명한 후, 여러해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만년에 대만으로 돌아가서 옛날 버릇을 다시 드러냈다. 대만중화문화학원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후 민족배신자의 신분이 들통나서, 대만의 문화인들에게 축출당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몇년후에 다시 외국에서 죽는다. 그는 장경국에게 글을 올린 바가 있다. 무려 2만자에 이르는 장문이다. 거기서 '선비의 문화'등등은 주절이주절이 얘기했다.
"상서, 주례 이래로 계속하여 선비가 정치를 했다. 이것은 또한 중국의 독특한 전통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이다. 총리가 훈정시기에 당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정했다. 중국에서 '정교'는 서양의 '정권'과 다르다. 정치의 본질은 교육적이다. 그래서 중국문화인은 정치에 큰 흥취를 가진다. 그리고 시국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이것은 모두 다른 나라의 문화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다. 중국문화인은 선비이다. 이것은 중국의 독특한 문명전통이다."
여영시는 일찌기 <<선비와 중국문화>>에서 중국의 '선비'는 서방근대의 지식인에 가깝다고 하였다. 선비의 특색은 '통고금, 결연부(通古今, 决然否)"이다. 호란성은 기억하지 못했다. "선비"라는 중국의 독특한 문화전통속에 "사지어도(士志於道, 선비는 도에 듯을 둔다)" 즉, 도를 밝혀 세상을 구해야 하는 것이고, 기본가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참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선비는 강해져야 한다. 임무가 중하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任重而道遠). 인(仁)을 자신의 임무로 하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는가? 죽어서야 비로소 그만두게 되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 천하에 도가 없을 때는 선리라면 반드시 천하의 뜻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그러나, 호란성은 아에 그 자신이 바로 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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