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중공 제1차당대회 대표 13명의 운명

중은우시 2009. 7. 1. 16:47

글: 노위병(路衛兵)

 

중국공산당 제1차당대회에 참가한 대표 13명은 피바람이 몰아치던 시대에 함께 세계최대규모의 정당을 만드는데 최초의 방향을 제시했었다. 제1차당대회이후, 그들은 피와 불의 세례를 받으며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어떤 사람은 일찌감치 혁명을 위하여 희생했고, 어떤 사람은 반도, 매국노가 되어 공산당과 적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당을 탈당했다가 다시 재입당하기도 했고, 당연히 그중 일부는 당의 최초신념을 견지하고 최종승리를 맞이하기도 했다. 당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고, 목표와 이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다른 인생의 궤적을 걸어갔다. 그들의 최종인생결말 역시 똑같지는 않았다.

 

탈당하거나 제명된 7명

 

장국도(張國燾): 1차대회의 풍운아, 별도의 중앙을 세운 배신자

 

이 사람은 제1차회의를 주재했고, 제1차대회에서 중앙3인국에 포함되었으며 조직주임을 맡았던 풍운아이다. 그러나, 그는 별도로 중앙을 세우고 당과 적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제2, 4, 5, 6차대회에서 모두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5월에 중공 제5기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상임위원이 된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그는 중국공산당의 5인상임위원중 1인이었다. 중공제6차대회후에는 중앙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되고, 모스크바에 남아서 중국공산당의 코민테른대표단에서 일했다. 1931년에 귀국한 후, 당중앙은 그를 악예환혁명근거지로 파견하고, 악예환중앙분국서기 겸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게 한다. 1935년 6월 홍군 제4방면군을 이끌고 사천성 무공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 제1방면군과 회합한 다음 홍군총정치위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며, 북상을 반대하고 마음대로 제4방면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별도의 당중앙을 세운다. 1937년 3월 중공중앙은 회의를 개최하여, 그를 우경분열주의자로서의 잘못을 청산하고, 그를 섬감녕변구정부 부주석을 계속 맡게 한다. 1938년 4월, 그는 혼자서 섬감녕변구를 도망쳐나와 국민당에 투항한다. 4월 18일 중공중앙은 그의 당적을 박탈한다. 1949년 장국도는 홍콩으로 이주하고 다시 브라질과 카나다로 간다. 1979년 12월 병으로 터론토에서 사망한다.

 

이달(李達): 이론의 재주는 있으나, 정치의 재능은 없다.

 

제1차대회에서 당중앙3인국의 구성원이고, 선전주임을 맡았다. 제1차대회이후 중국노동조합 서기부 위원이 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첫번째 출판기구인 인민출판사를 창립한다. 1922년 중국공산당 제1차대외에서 장국도에게 배척받아 중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후 점차 당과 멀어진다. 같은 해 11월 모택동의 요처으로 장사에 가서 호남자수대학의 총장이 된다. 1923년 국공합작이 무르익을 때, 이달은 국공당내합작에 반대하고 국공당외합작을 주장한다. 이리하여 진독수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장국도의 행태에도 반감을 가져, 마침내 1924년 9월 탈당을 한다. 이후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연구에 심취하여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이론가가 된다. 1937년에 출판한 <<사회학대강>>은 모택동이 "중국인 자신이 쓴 첫번째 마르크스주의 철학교과서"라고 칭친한 바 있다.  1949년, 이달은 호남평화의거에 참가한다. 건국후 유소기의 소개와 모택동 이유한등의 사람들이 증명하여, 이달은 다시 입당한다. 그후 호남대학, 무한대학의 총장과 중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한다. 1966년,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박해를 받아 무한에서 서거한다.

 

이한준(李漢俊): 학자형의 이론가, 홀로서기식 혁명자

 

중국공산당의 최초 조직발기인의 하나이고, 제1차대회 준비업무를 수행한 사람의 하나이다. 마르크수의이론연구가로 동필무는 그를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스승"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22년 이한준은 지독수, 장국도와 의견차이를 보이면서, 중공중앙을 떠난다. 1925년에는 철저히 중국공산당을 떠나서, 1926년에 중국국민당에 가입한다. 1927년 국민당 호북성당부집행위원, 성정부위원 겸 교육청장, 성당부청년부장이 된다. 1927년 12월 무한에서 계계(桂係) 군벌에 살해당한다. 1952년 모택동은 그의 가족에게 "혁명희생공작인원가족증"을 발급한다. 거기에는 "이한준동지는 대혁명과정에서 영광스럽게 희생되었다. 업적은 영원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진공박(陳公博): 중공1차당대회의 유약한 도망병, 나라를 배반하고 적에 투항한 제2호 매국노

 

진공박은 제1차당대회대표중 유일하게 전체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대표이다. 대회는 상해의 프랑스조계지역인 망지로106호에 소재한 이한준의 형인 이서성(李書城)의 집에서 개최되어을 때, 프랑스 경찰의 수사를 받아, 진공박은 수사를 당하면서 놀란데다가, 그날 밤에 그가 머물던 여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다음날 어디론가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호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광주로 돌아간 후에는 중공중앙과 반대편에 서서 진형명의 반란을 지지했고, 진독수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후 독립행동하며, 당의 구속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광주당조직회의에서 명확히 선포한다: 다시는 당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 1923년 진공박은 당적을 박탈당하고, 1925년 국민당에 가입한다. 국민당의 제2차대회에서 그는 집행위원회 위원이 된다. 항전시기에 진공박은 왕정위를 따라 매국의 길로 들어선다. 왕정위정부에서 입법원장을 맡고, 왕정위가 죽은 후에는 그가 대리주석 겸 행정원장을 맡는다. 그는 제2호 매국노가 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일본으로 도망치나, 국민정부의 요구하에 인도된다. 그리고 1946년 6월에 처결당한다.

 

주불해(周佛海): 이익에 눈이 어두워 탈당하고, 왕정위정권하에 제3호 매국노가 되다

 

주불해는 일본에 유학한 해외대표이다. 제1차당대회후 그는 당의 지시를 받아 상해노동조합서기부의 업무를 이끈다. 주불해는 강력한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 1923년 그는 졸업후 귀국하여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국민당 중앙선전부장 대계도가 그에게 비서를 맡아달라고 한다. 1924년 겨울 주불해는 공산당을 떠나 국민당에 가입한다. 1931년 국민당 제4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된다. 항전이 발발한 후'저조구락구'를 조직하여 '전쟁을 하면 반드시 패한다. 평화적 방법으로 대란을 막을 수 있다"는 투항주의 이론을 고취시킨다.1938년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하자, 왕정위국민당중앙집행위원, 왕정위정부의 경정부장, 행정원부원장 겸 재정부장, 상해시장, 행정원장대리의 직무를 수행한다. 왕정위가 죽은 후에는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다. 항전승리후 국민당 남경고등법원은 "적국과 내통하여 본국에 반항"한 죄행으로 주불해를 사형에 처한다.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1948년 2월 심장병으로 남경노호교 옥중에서 사망한다.

 

포혜승(包惠僧): 감정적인 성격은 그의 인생에 곡절이 많게 했다

 

포혜승은 실제로는 진독수를 대신하여 제1차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진담추가 '폭도'라고 놀리는 감정적인 열혈청년인 그는 대혁명시대에 미친듯한 열정을 보였다. 제1차대회후 중국노동조합서기부 자강지부주임, 중공무한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제1차국공합작시기에 중앙당부 당원훈련반위원 겸 광동대학사범부 교원, 철갑차총대정치교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 황포군관학교 제3단 당대표를 지내고, 제2차동정에 참가한다. 그후 황포군관학교 교도사 당대표 겸 정치부주임이 된다. 1926년 1월, 국민당 제2차전국대표대회 대표가 되고, 1927년 국민혁명군 독립제14사단의 당대표 겸 정치부주임이 된다. 8.1 남창의거후, 포혜승은 중국공산당과 조직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1930년 국민당당적을 회복한다. 한때는 인구국 국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1948년 국민당을 떠나 가족을 이끌고 마카오로 가고, 해방후에는 북경으로 되돌아온다. 국무원 참사를 맡기도 했는데, 1979년 7월에 병사한다.

 

유인정(劉仁靜): 제1차대회의 가장 젊은 대표, 어용저격수의 최종결말

 

유인정은 제1차당대회의 가장 젊은 대표였다. 당시 겨우 19살이다. 그는 또한 가장 늦게 세상을 떠난 제1차당대표이기도 하다. 제1차대회후 그와 등중하는 함께 사회주의청년단의 기관간행물 <<선구>>를 창간한다. 그후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제4차대표대회에 참가한다. 1923년 단중앙서기가 된다. 1926년 모스크바 레닌학원에서 공부하고 트로츠키파의 활동에 참가한다. 귀국후에는 트로츠키파의 "십월사"를 조직한다. 1929년 당에서 축출된다. 1948년 그는 국민당 선전부 부부장 도희성에 의지하여, 그의 지시하여 <<모택동의 <현재형세와 우리의 임무>를 평함>>등 반공문장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국민당의 어용저격수로 공산당을 공격하는 선봉이 된다. 해방후 유인정은 다시 공산당으로 되돌아온다. 1950년 북경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나중에는 인민출판사에서 편역업무에 종사한다. 1987년 8월 북경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당을 위해 희생한 4명

 

진담추(陳潭秋): 총을 들고 적을 죽인 전쟁영웅, 죽음앞에 굴하지 않은 혁명전사

 

진담추는 제1차당대표중 유일하게 총을 들고 전쟁터를 누빈 혁명전사이다. 제1차대회후 중공무한지위, 무창지위, 호북지위의 주요책임자가 된다. 1923년에는 경한철로노동자대파업을 조직하고 참가한다. 강서성위서기를 맡고 있을 때 비밀리에 남창의거에 협력한다. 1934년 1월 제2차 전국소비에트대표대회에서 진담추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 집행위원, 양식인민위원이 되고, "소탕'작전에 대응하여 부대물자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뛰어난 공헌을 한다. 중앙홍군의 장정후에도 그는 중앙소비에트지구에 남아서 유격전을 전개한다. 그는 포위돌파작전에서 총에 오른쪽 귀를 맞기도 한다. 1935년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 참가하고, 코민테른에 남아서 일을 한다. 1939년 귀국후에는 중공중안 주신강대표와 팔로군주신강판사처 책임자가 된다. 1942년 9월 신강군벌 성세재에게 체포되어 옥중에서 뜻을 굽히지 않고 죽는다.

 

왕진미(王盡美): 일을 많이 하여 병이 들고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1차대회대표

 

제1차대회후 중공산동구지구서기, 중국노동조합서기부 산동분부주임, 산동성위서기등의 직위를 맡는다. 그는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노동자운동을 전개했으며 당을 위해 여러가지 활약을 한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각국 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제1차대표대회에 참가하고 귀국한 후에는 파업활동을 주도한다. 개란오광총동맹파업지휘부의 지도부에 있었다. 1925년 8월, 장기간 피로가 겹쳐 병이 들고, 청도에서 서거한다. 향년27세이다.

 

등은명(鄧恩銘): 열혈로 이루어진 전설적인 일생

 

등은명은 제1차대회후 산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당과 노동자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중공청도지부서기, 산동구위, 성위서기등의 직위를 맡았다. 1925년 그는 청도제사공장 노동자대파업을 이끌어, 5.30운동의 선구가 된다. 그는 또한 사방기계공장의 노동자대파업과 청도시 전체노동자대파업을 이끈다. 청도시 각계연합회와 시의 노동조합연합회를 조직한다. 1928년 배신자의 밀고로 체포된다.  1931년 제남에서 처형당한다.

 

하숙형(何淑衡): 조용했던 혁명지사

 

제1차대회우 중국상구위원회 위원이 된다. 1927년 마일사변후, 상해에서 지하인쇄공장을 만들어 지하공작을 시작한다. 1928년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귀국후에는 상해에서 전국호제회의 업무를 맡아, 체포된 공산당원의 구출작업을 추진하고, 혁명자들을 모아서 소비에트구로 보내는 일을 했다. 1931년 11월, 하숙형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 되고, 임시중앙정부공농검찰인민위원, 내무인민위원과 중앙정부임시법정주석등의 직위를 맡는다. 1934년 중앙홍군의 주력이 장정에 들어간 후, 그는 중앙근거지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했다. 1935년 2월 장정에서 포위돌파전투를 하는 도중에 장렬히 사망한다.

 

끝까지 남아서 천안문 성루에 올랐던 2명

 

동필무(董必武): 당에 일생동안 충성한 혁명지사

 

제1차대회후 중공무한구위위원, 호북민운부 부장, 호북성위위원을 지낸다. 제1차국공합작때 국민당호북성당부를 조직하고, 호북성국민당공작위원회 주임, 국민당 중앙후보위원이 된다. 1928년 모스크바 중산대학, 레닌학원에서 공부한다. 귀국후 중공중앙당교교장, 중앙당무위원회 서기, 중앙공농민주정부 집행위원, 최고법원원장, 공농검찰위원회 부주임을 지낸다. 1934년 10월 장정에 참가한다. 섬북에 도착한 후 중공중앙당교교장, 섬감녕변구정부대리주석을 지낸다. 항일전쟁시기와 항전승리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담판할 때 대표의 한 명이었다. 1945년 해방구를 대표하여 샌프란시스코 유엔제헌회의에 참가한다. 건국후에는 중앙재경위원회 주임, 정무원 부총리, 정무원 정법위원회 주임, 최고인민법원 원장, 전국정협 부주석, 중공중앙감찰위원회 서기,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대리주석을 지낸다. 1975년 1월 제4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되고, 1975년 4월 2일 북경에서 별세한다. 향년 90세였다.

 

모택동(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장 위대한 건설자

 

그는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중 1인이다. 제1차대회의 서기원이다. 당의 첫번재 농촌혁명근거지의 창건자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장 위대한 건설자이다. 모택동은 초기에 당내에서 부침을 여러번 겪었다. 결국 장정도중에 준의회의에서 그의 주장이 인정되고, 그의 영도자로서의 지위도 확립된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역사적인 승리를 만들어낸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서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장엄하게 선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는 1976년 9월 9일에 북경에서 서거하니, 향년 83세이다.

 

중국공산당 제1차대회는 지금으로부터 88년전의 일이다. 당시 겨우 13명의 대표만이 참가했고, 조직이나 준비에 있어서 황급히 이루어졌던 대회였따. 그러나 이 제1차대회는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작이었고, 사상유례없는 신기원을 이룩하게 된다. 13명의 대표들은 서로 다른 인생의 경로를 거쳐 최종운명을 맞이했다. 역사는 영원이 그들이 만든 위대한 시대를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