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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은 정치적이다

by 중은우시 2010. 1. 29.

글: 양문도(梁文道)

 

예전에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이 김용(金庸, 진용)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쓴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다." 생각해보라 1980년대초에 등소평과 같은 사람들까지 김용의 소설을 보았을 정도이니, 김용이 중국인세계에서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독자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에 대한 논쟁과 비판도 나오게 된다.

 

일찌기 이삼십년전에, 대만(臺灣, 타이완)과 대륙의 양쪽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김용의 소설을 금지한 바 있다. 대륙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그가 중화민족을 모욕하고, 공산당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만에서는 오히려 그가 모택동을 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렸을 때 대만에서 공부했는데, 그 때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을 대만에서 <<대막영웅전(大漠英雄傳)>>이라고 고쳐 불렀다. 왜냐하면, "사조"라는 두 글자때문에 사람들이 모택동이 쓴 사(詞)에서 언급된 '사조'라는 말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영웅'과 나란히 제목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만에서는 이 책이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타협책으로, 김용은 어쩔 수 없이 제목을 <<대막영웅전>>으로 고쳐야 했다.

 

그의 소설이 정말 정치와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아마도 그런 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정치와 관련이 있을 뿐아니라, 현대독자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독자의 눈으로 보자면, 김용은 어느 정도 여성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고, 그의 의식형태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강렬한 민족주의 심지어 인종주의적 색채가 있다. 일종의 중화쇼비니즘을 드러낸다. 이와 유사한 비판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먼저 여자문제를 얘기해보자. 김용의 무협소설세계 속에서, 여성과 무협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소설속에서는 무공이 출중한 여인이 여럿 나타난다. 그러나 천하최고의 상승무공을 수련한 여성은 아주 적다. 1사람을 제외하고. 동방불패. 그런데 동방불패가 여인인가? 그는 남자이다. 그는 규화보전을 익히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했다. 이것은 원래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김용은 그럼에도 그를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로 그렸다. 동방불패는 원래 사나이였는데, 거세를 한 후에는 수화(繡花)를 좋아하고, 여홍(女紅)을 좋아하며 사람 자체가 여성처럼 바뀐다. 마지막에는 곁에 있는 젊은 미남을 쫓아다닌다. 이를 보면, '규화보전'은 비록 천하제일의 무학이지만, 한 남자를 여성으로 바뀌게 만드는 무학이다. 그러므로 규화보전은 <<소오강호>>에서 아주 문제있는 책이고, 사파무공이며 익혀서는 안되는 무공이 된다.

 

이를 보면 김용의 무학에 대한 어떤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만일 무학이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 그 무학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음진경>>의 경우 매초풍이 구음백골조를 익힌 후에 무섭게 바뀌었고, 주지약도 마찬가지이다. <<구음진경>>을 통해서 익힌 것은 독랄한 사파의 자잘한 기술이거나 살상력이 강하지 않은 그저 화려한 무술이다. 어쨌든 모두 정파무공은 아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김용이 뼛속부터 여성에게는 비우호적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여성을 성차별했다고 말한다.

 

김용소설과 정치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더 재미있는 것이 있다. 김용은 민족주의, 국가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당시 김용은 홍콩 <<명보>>의 사주였다. 매일 사론을 쓰고, 동시에 무협소설을 썼다. 홍콩이라는 특수한 시공에서, 특히 양안의 적대적인 상황이 아주 첨예한 역사시기에, 그의 무협소설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창작궤적을 회고해보면, 초기의 무협소설은 일종의 강렬한 민족주의정서를 드러낸다. 일종의 한족중심주의이다. 곽정과 같은 민족영웅, 홍화회의 반청복명, 모두 강렬한 민족정서가 느껴진다.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무슨 일이든 정치에 끌어붙이는 사람들도 김용은 민족감정이 아주 농후했다고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는가? 예를 들어, 초기의 <<서검은구록>>에서 홍화회와 같은 조직의 소위 '반청복명'은 사실 '반청불복명(反淸不復明)'이었다. 그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건륭이 자신이 한족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전체 체제를 바꿀 필요도 없다. 이는 상당히 천진하고 유치한 민족주의이다. 황제가 한족이면 되고, 황제가 한족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계속 이어가면, 우리는 <<천룡팔부>>의 교봉, 즉 소봉을 보게 된다. 그는 거란인이다. 그러나 죽은 후에 중원의 여러 무사들을 말한다: "아. 생각지도 못했다. 이 거란인이 우리 중원인들보다도 더 영웅호한일줄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아마도 우리 한족들이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영웅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신분'문제가 이미 더더욱 복잡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녹정기>>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발전한다. 당연히 강조해둘 것은 <<녹정기>>라는 작품은 지금까지도 논쟁거리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주 좋아하고, 심지어 이것을 김용의 소설중 최고의 작품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주 싫어해서, 이것은 아예 무협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인공 위소보는 무공을 할 줄 모른다. 일반소설의 영웅주인공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이 아주 특별하다고 본다. 그것은 반무협소설인 무협소설이다. 그것은 김용의 일생동안의 무협창작의 귀결점이다. 필자는 이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다시 <<녹정기>>의 정치를 보자. 진근남은 천지회의 대영웅, 대호걸이고 무공이 개세적이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공이 가장 뛰어난 사람도 나중에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리고 위소보가 보기에, 이 천지회는 모조리 쓸모없는 늙은이로 가득 차있다. 왜 반청복명을 해야 하는가? 현재 이 만주족이 황제를 해도 괜찮지 않은가? 강희가 황제의 자리에 있으니, 천하가 태평하고, 이전의 한족황제들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여기에서는 은근히 <<서검은구록>>에 나오는 건륭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외에, 가장 교묘한 것은 위소보의 신분문제이다. 그는 '민족신분'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심지어 그의 부친이 누구인지도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모친은 기녀이기 때문에, 부친이 누구인지를 아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는 사람을 욕할 때, 왕팔(王八)이 낳은 아이라거나 네 모친이 기녀이다라는 식의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같은 욕을 위소보에게 하려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기녀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시원시원하다. 그의 세계에서, 그가 자신의 궤계, 고혹과 일종의 홍콩사람같은 잔머리를 가지고 무슨 일이든지 완벽하게 해낸다. 마지막을 보자. 위소보가 승리자이다. 곁에는 많은 예쁜 여인들이 부인으로 있다. 마음 속으로는 러시아 지하성보의 보물을 생각한다. 얼마나 통쾌한가.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김용소설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정치적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