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신량(吳信良)
아미산은 신선문화, 도교문화, 불교문화의 영향을 수천년간 받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객관적으로 아미산은 신선문화, 도교문화, 불교문화가 융합된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이리하여 소림의 선불(禪佛)무술, 무당의 도가무술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촉국다선산, 아미막난필(蜀國多仙山, 峨嵋邈難匹, 촉국 즉 사천에는 신선이 사는 산이 많지만, 아미에 필적할만한 산은 없다)"는 당나라 이백의 싯구처럼 진나라이전부터, 아미산은 사람들에게 신선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위서. 석로지>>의 기록에 따르면, "헌원황제가 아미산에 도를 물으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도대체 누구에게 도를 물었을까? <<포박자>> 18권(地眞)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미산에 도착하여 천진황인(天眞皇人)을 옥당(玉堂)에서 만나서, 진일지도(眞一之道)를 물었다. 황인은 말했다: 그대는 이미 사해의 군주이면서, 다시 장생불로를 얻으려 하니 너무 탐욕스러운게 아닌가?" 그는 장생불로의 도리를 물으러 갔던 것이었다. <<삼동주낭.상호품>>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황인은 키가 구척이다. 검은 털이 몸에 붙어 있고, 머리카락은 수촌에 이르며, 아미산의 북쪽 절벽의 바위 아래에 거주한다" 그리고 산 위에는 복희, 여와, 귀곡의 여러 동굴이 있다.
천진황인, 복희, 여와, 귀곡자등은 모두 당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신선이다. 한나라때의 문사인 유향(劉向), 진(晋)나라때의 유명한 양생가 갈홍(葛洪)의 글을 보면, 아미산을 선산(仙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선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도교 불교문화가 아미산에 들어오기 전에, 아미산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신선이 사는 산이었다. "선(仙)"이라는 글자는 말 그대로 사람(人)이 오랫동안의 수련을 거쳐 장생불로하게 되어 산(山) 속에 산다는 의미이다. <<석명.석장유>>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을 선(仙)이라 한다. 선(仙)은 천(遷)이다. 산으로 옮겨가는 것(遷入山)이다. 그러므로 글자를 만드는 사람이 사람 인(人) 변에 산(山)자를 썼다." 이는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서 선(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람이 아주 오래동안 장수하면 바로 신선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단 신선이 되면 왕왕 인간세상을 떠나서, 산으로 옮겨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게 된다. 속담중에 "신선처럼 즐기다(快樂如神仙)"라는 말이 있다. 신화에 나오는 신선은 장생불로하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천자, 황제의 관심을 끌고, 아래로는 일반백성의 관심을 끌었다. 모두 신선을 그리워했다. 아미산은 고대 파촉(巴蜀)의 선주민들이 그리워하던 신선의 땅이다. 신선문화는 자연스럽게 고대 파촉지구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무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최초의 역사문헌인 <<죽서기년>>에 따르면, 은왕(殷王) 하단갑(河亶甲)의 통치시기의 기록에, "3년, 팽백(彭伯)이 비(邳)를 무너뜨렸다. 4년 남이(藍夷)를 정벌했다. 5년 신인(侁人)이 반방(班方)에 들어갔다. 팽백 위백(韋伯)이 반방을 정벌했고, 신인이 와서 복종하였다." 일개 양생가인 팽백이 반란을 일으킨 비주(지금의 江蘇 徐州)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반방을 정벌하고, 신인으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면, 사람을 놀라게 할만한 '법술'과 뛰어난 무술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화양국지. 서지>>에는 "팽조(彭祖)는 원래 촉에서 태어났고, 은나라의 태사(太史)를 지냈다." 팽조는 파촉 아미무술의 맹아기에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팽조의 원래 이름은 전갱(籛鏗)이다. 병력을 이끌고 당시 '비'로 불리던 서주를 정벌하여 역사책에 '팽백극비(彭伯克邳)로 이름을 남긴다. 서주를 봉토로 받은 전갱은 서주를 팽성(彭城)으로 개칭한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전갱을 팽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말년에는 촉의 무양(武陽, 지금의 사천 팽산현)에서 살다가 죽었으므로, 팽조는 어려서부터 아미산에서 유행하던 신선문화와 무속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 "물아상융(物我相融)", "이생위귀(以生爲貴)"의 경험적 사고와 가무의식을 통하여 귀신과 접신하는 무속은 당시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시절에 팽조와 같은 지식인들에게는 깊은 영향을 주었다. "신선과 무당현상은 사천에서 고대 정신문화의 주요한 창조자였다. 그것은 사천의 문화와 무술의 추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천문, 지리, 역법, 산술, 군사, 역사, 악무(樂舞), 의약, 기예(技藝)등의 방면에서 신선문화와 무속활동과 관련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화양국지. 파지>>에는 "주무왕이 주(紂)를 정벌할 때, 파촉의 군사를 얻었다" "파촉의 군사는 용감하고 날카로웠으며, 가무(歌舞)로 은나라 사람들을 압도했다." 이곳의 가무는 "파투무(巴渝舞)"이다. 실제로는 아미무술의 초식의 원형이고, 무술(巫術)과 박살술(搏殺術)이 결합된 실전술이다.
최근들어 삼협댐지역인 개현(開縣)의 거구진 여가패의 고고발굴에서 보기드물게 큰 전국시대의 묘장군이 발견되었다. 묘마다 7,8건의 과(戈), 모(矛), 검(劍), 월(鉞)등의 청동병기가 나왔는데, 이는 고파촉 선주민들이 무술을 숭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외에, 청동병기의 신비한 부호, 문양, 호랑이, 뱀, 괴수등의 토템은 무속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교한 도안이 조각된 청동검은 파촉의 선주민들에게 일반적인 검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대하고 신비한 역량을 지닌 신검, 무검(巫劍)이었다. 바로 고파촉 선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바로 전신(戰神)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신선(직업무당)은 사실 최초의 성과 이름을 가진 조상이다. 황제(黃帝), 치우(蚩尤)는 모두 무술(巫術)을 최고조로 연마한 신선(巫師)이다. 황제는 '유웅(有熊)'부락의 추장이고, 치우는 소(牛)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추장이다. 쌍방이 크게 한 번 싸웠는데, 각자 화신(火神), 뇌우지신(雷雨之神), 이매망량(魑魅魍魎), 한발(旱魃)등의 신괴(神怪)인물이 출동한다. 치우는 신에게 빌어서 비를 내리게 하고, 황제는 한신천녀(旱神天女)에게 비를 멈추게 한다. 황제와 치우의 교전에서 치우가 실패하여 피살된다. 최종적으로 황제부락이 승리했고, 중원을 통치하게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무당의 싸움이다. 이 전투는 바로 오늘날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염황자손"이라고 칭하지, "치우자손"이라고 칭하지 않게 된 근거이다.
사실, 종교목적의 신선 이외에, 많은 소위 "신선"은 실제로 백성의 마음 속에 있는 현인명신(賢人名臣)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천재인재를 막아주고, 악을 징벌하고 선을 선양하며, 재물을 불러모으고 좋은 운을 가져다 주며, 복을 더하고 목숨을 늘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황제, 관공, 마조, 복희, 여와, 귀곡, 팔선, 팽조, 악비등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신선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적지 않은 문인방사(文人方士)는 수련을 통하여 신선이 되기 위하여 아미산에 은거했다. 무사중에 사도현공(司徒玄空)이라는 사람이 있다. 호는 동령자(動靈子)이고, 산속에서 경작하여 먹고 살았다. 아미산의 영후(靈猴)가 아침저녁으로 항상 함께 했다. 원숭이의 동작을 본떠서 공격과 수비가 민첩한 "아미통비권(峨嵋通臂拳)"을 만든다. 사도현공은 항상 백의(白衣)를 입었으므로, 제자들이 그를 "백원조사(白猿祖師)"라고 칭했다. <<중국무술사>>에서는 "전국시대의 백원은 성이 백(白)이고 이름이 사구(士口)이다. 자는 의삼(衣三)이며, 도호가 동령자(動靈子)이다."라고 적고 있다. 1989년 사천과기출판사의 <<사천무술대전>>에서는 "통비권은 춘추전국시대에 백원공이 만든 것이다(성이 백이고 이름은 사구이며 자는 의삼이다. 도호는 동령자(洞靈子)인데, 바로 사천의 사도현공이다. 사도가 나이가 들었을 때 사람들이 백원도인이라고 칭하였으며, 아미산에서 받아들인 제자가 아주 많았다)" 2001년판 <<낙산지>>의 기록에 따르면, "백의삼은 전해지기로 전국시대에 산의 원숭이를 본떠서 아미통비권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격과 방어가 민첩하며, 아미산에서 제자를 아주 많이 받아들였다." <<아미산현지>>에서는 "전국시대에 '백원공' 사도현공(성은 백, 이름은 사구, 자는 의삼, 도호는 洞靈子)이 아미통비권, 원공검법(猿公劍法)을 만들어 세상에 전했다."고 하고 있다.
동한의 조엽(趙曄)의 <<오월춘추. 구천음모열전제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협인 월녀(越女)가 월왕 구천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가는 도중에 검을 들고 스스로 '원공(猿公)'이라고 칭하는 노인을 만나서 대나무를 가지고 초식을 겨룬다. 원공은 몸을 날려 나무로 올라가서 흰원숭이(白猿)가 되었다; 명나라의 애국장수이며 우첨도어사인 당순지(1507-1560, 가정회시장원)은 아미도인들이 권법을 수련하는 것을 보고는 <<아미도인권가>>를 만들었다. <<형천선생문집>>권2에 그중 두 구절이 남아 있는데: "도인갱자출신기, 내시산중백원수(道人更自出新奇, 乃是山中白猿授)". 이는 백원조사라는 얘기와 일치한다. 사도현공을 신격화한 경향이 있다.
위에서 쓴 것처럼, 양생술로 역사책에 기록된 팽조때부터 최초의 조국통일대업을 이루는데 불후의 공적을 세운 '파투오(巴渝午)' 및 파촉의 선주민 그리고 아미통비권을 만든 사도현공까지, 이들이 무속문화를 기반으로 한 아미무술의 기초를 닦았다. 처음부터 내수(內修)와 외련(外練)을 모두 중시하고 융합하였고, 천인합일, 물아상융을 중시했으며, 수련을 통하여 장생불사를 추구했다. 이렇게 하여 아미무술을 처음부터 형신겸비(形神兼備), 내외쌍수(內外雙修), 강유상제(剛柔相濟)의 무술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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