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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상업시대의 무림문파: 허구에서 현실로

by 중은우시 2012. 4. 20.

글: 간천하(看天下) 잡지.

원제목: 당대무림정전, 소림 무당 아미 청성 공동 생존현상조사

 

"팔대문파가 어떻게 무대에 오르는지가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 명확히 쓰여져 있지 않으니, 여러분들이 아이디어를 내주세요." 제남군구 문공단 감독인 장과(張戈)는 시간표를 만지작거리면서 눈썹을 찡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몇초가 흐른 후, 공동(崆峒)의 장문인인 백의해(白義海)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에 올라간 후 포권(抱拳)을 하고 한사람 한사람이 시범을 보인 후, 모두 함께 형을 이루고 오초간 유지한 후에 무대에서 내려오지요. 이 오초가 아주 중요합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을 마치고 그는 한손은 들고 한손은 내리고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2012년 3월 23일 오후, 사천성 성도시 용천역구(龍泉驛區) 탁대고진(洛帶古鎭) 영웅원호텔 210호실에서 180센티미터의 두 탁자를 놓고, 장과가 벽쪽에 앉아 있고, 공동파 장문인 백의해,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장문인 유국순(柳國順), 무씨태극권(武氏太極拳) 장문인 손건국(孫建國) 그리고 소림사 무승단(武僧團)의 석덕조법사(釋德朝法師)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1회 중화무술문화제다 다음날 개최되고, 장과가 해야하는 일은 장문인들과 다음 날의 공연의 세부사항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각 문파는 이전에 정해준대로 순서에 따라 공연했다. 단체사진은 인터넷에 올라갔다. 여기에는 여러 장문인들이 무대 위에 서 있고, 그들의 뒤에는 노란색 깃발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위에는 "소림" "무당" "아미" "청성" "공동" "곤륜"등 각 대문파의 명칭이 쓰여져 있었다. 어떤 네티즌은 놀라서 소리쳤다: "육대문파가 다시 광명정을 포위공격하려는 것인가?"

 

무림문화제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사이다. 문화제 조직위원회 주임인 포자겸(浦子謙)은 이렇게 말한다. 성도는 지금 중국에서 최초의 중화무술문화창의산업원을 만들려고 한다. 투자금액은 3억위안에 달한다. 산업원에는 서소림(西少林), 서무당(西武當), 촉곤륜(蜀崑崙), 천공동(川崆峒)등 무림각대문파의 분점이 건설될 것이다. 거기에는 무림일조가(武林一條街), 민속일조가, 초약(草藥)일조가, 무의(武醫)일조가등 프로젝트가 초보적인 기획에 포함되어 있다; "무림일조가에는 객잔, 주가, 표국, 도검포, 재봉포, 서국등이 만들어질 것이고, 무의일조가에는 무림각대문파의 의관과 초약을 유통시키는 약방이 들어설 것이다."

 

이것은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일찌기 2,3십년전에, 중국의 무림문파는 상업의 시대붐에 휩쓸려들었다. 그들은 공연을 하고, 무술학교를 개설하고, 회사를 만들면서 날로 커져갔다. 하나의 거대한 산업을 이룬 것이다. 강호를 돌아다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이 얼마나 높은 것이냐가 아니라 소비자의 수요에 어떻게 영합하고 창조하느냐는 것이다. 문파는 대기업이고, 장문인은 CEO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무림의 진실한 모습이다.

 

무림의 부흥은 먼저 무수한 소설, 영화, TV드라마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상업운영에 착실한 대중심리기반을 닦았다. 그리하여, 기존의 문파는 허구의 세계에 의존하기 시작하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았던 문파도 허구를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진짜와 가짜, 허허실실의 배후에는 '천하는 모두 이익을 쫗아서 움직인다'는 원칙이 있다.

 

이번 무림문화제는 원래 김용(金庸), 황이(黃易)를 초청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유명한 두 무협소설가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제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이번 게임에서, 그들은 불가결한 역할이 아니다. 그들이 창조한 무협세계는 이미 그곳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신기한 강호이다. 산절벽에 비급이 숨겨져 있고, 경서 속에 지도를 숨기고 있다.소실산의 위에는 목인항이 있고, 자금성은 일찌기 결투장이었다. 복성인 구양씨는 왕왕 백타산장에서 오고, 당문출신은 암기의 절기를 품고 있다...

 

이 무협팬들이 잘 알고 있는 강호는 지난세기 무협소설이 유행한 이래 갖가지 문파가 나타났고, 거기에서 활동하는 협객들은 방대한 환상세계를 만들어 냈다. 동해 바깥의 도화도에서 설산 속의 영취궁까지, 무림문파는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자들은 현실에서 그 흔적을 찾고가 시도하게 된다.

 

허구의 문파는 도대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소설가들의 영감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협세계의 강호는 결국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무협소설가 온서안(溫瑞安)의 말이다.

 

무협소설의 역사는 당나라때의 전기소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화민국이전에, 무협이야기의 문파특색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다. 1930년이 되어 <촉산검협전>이 세상에 나온다.

 

<촉산검협전>의 작가는 환주루주(環珠樓主)이다. 어린시절에 자주 청성산과 아미산으로 가서 놀았다. 소설속에 나오는 허구의 청성파, 아미파등의 문파는 그후 여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환주루주와 동시대의 소설가인 백우(白羽)는 "무림(武林)"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든다. 문파가 빽빽이 들어선 무협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백우와 이름을 나란히 하던 소설가 정증인(鄭證因)은 어려서 무술을 배워서 강호세계를 잘 알았다. 방회규율도 잘 알았다. 그의 소설은 "방파기격파(幇派技擊派)"로 불린다. 그의 붓아래 쓰여진 많은 강호문파는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초기의 무협작품에서 문파의 개념으니 강호사단(社團)의 성격이었다. 김용의 첫번째 소설인 <서검은구록>에서 진가락(陳家洛)이 이끄는 홍화회(紅花會)는 주거도 부정하고, 사방을 떠돌아다닌다. 그후의 소설에서, '문파'는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속속 명산대천으로 들어가 진주한다.

 

양우생(梁羽生)이 <칠검하천산>을 쓴 후, 천산파(天山派)가 널리 알려진다. 김용의 <소오강호>에서는 태산파, 화산파, 항산파, 형산파, 숭산파가 함게 등강한다. 오악이 일망타진된 것이다.

 

여러 문파중에서 등장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소림과 무당이다. 허구의 강호이야기는 현실의 명산대천과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대입감을 더욱 심어준다. "소림무당은 모두 진짜 그 문파가 있고, 진짜 무공이 있고 진짜 기인기사가 있다. 만일 이것을 이용한다면 무공에서 힘을 빌려서 때리는 것처럼 창작에서 쉽게 더욱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온서안의 말이다.

 

양우생과 김용은 명문대파의 가치를 거의 다 개발했다. 고룡과 온서안은 소설에서 명문대파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고룡의 후기작품에서 주인공은 왕왕 독행객(獨行客)의 신분으로 천하를 주유한다. 온서안의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방회는 성으로 표시하는 가족이다. 역사가 유구한 '당문'을 제외하고 그가 개발한 것은 화기를 잘 다루는 뇌가(雷家), 독을 잘 쓰는 온가(溫家)등등의 무림세가이다.

 

"일부 명문정파는 일찌감치 유명작가들에 의하여 무수히 써왔다. 나는 중복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다시 쓰더라도 더 잘 쓸 수가 없었다." 온서안의 말이다. 그래서 전통문파를 주축으로 하는 것은 지난세기의 작품중에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고, 현실에 의존하여 문파를 창조하는 것도 변화했다. "우리 세대의 창작인들은 왜 자신의 강호를 만들고, 자신의 문파와 방파를 만들고 다시 자신의 감정과 이상을 거기에 투영하지 않는가. 그러면 더욱 친절하고 생명력이 있지 않을까?"

 

선협소설의 신비문파에서 역사와 결합된 명문대파까지, 그리고 다시 시정의 냄새가 진한 강호잡파들까지, 무협세계는 기나긴 변천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들 문파의 창작영감은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2007년,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김용에게 묻는다: "당신의 소설에서, 많은 무술문파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입니까? 예를 들어, '구음진경' '항룡십팔장'. 당신은 무술을 할 줄 압니까? 시범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김용은 대답한다: "일부 무술문파는 내가 상상해낸 것입니다. '항룡십팔장'은 바로 내가 <역경>에서 상상해낸 것입니다." 그러나, 문파의 상상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어떤 문파는 원래부터 있었다. 소림, 무당과 같은 경우이다. 나는 여러번 소림사를 갔다. 한 고승이 나에게 내공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골치아파서 배우지 않았다. 사실 나는 배울 기회는 있었다."

 

소설가가 쓴 이야기는 왕왕 현실과 호응한다. 양우생의 첫작품인 <용호투경화>는 원래 홍콩을 떠들썩하게 했던 권사들의 격투를 소재로 한 것이다. 당시 백학권의 장문인이 태극권의 고수와 결투를 했다. 그 소식이 나가자, 즉시 홍콩마카오의 신문잡지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 용쟁호투는 나중에 소설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김용은 <서검은구록>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라락과 건륭의 은원은 김용의 고향인 절강 해녕의 민간전설에서 유래한다. 그의 책에서, 많은 부분은 사료와 현실에서 왔다. 김용이 <소오강호>를 창작할 때, 홍콩과 대륙의 정치풍운이 변화한다. 김용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악검파의 아이디어는 당시 홍콩 대만의 파벌투쟁이 격렬한 데서 착안했다. <소오강호>의 문파투쟁은 현실을 광범위하게 투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룡이 쓴 '광대'한 당문은 그 창작영감이 현대무기에서 왔다. 고룡은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검풍류>에서 나는 일찌기 이 집안사람들이 제조한 암기의 방법을 현대화하려 한 적이 있다. 현대의 스파이소설에서 비밀무기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세히 생각해보면 현대의 무기가 실은 암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총과 수전(袖箭)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러나, 온서안의 영감은 그의 어린시절 경력에서 많이 왔다.

 

"나는 54년에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객가인이다. 그곳의 중국계는 모두 서로 의존해서 살았다. 조조인들은 조주인들과 서로 도우고, 복건인들은 복건인들과 잘 지냈다. 상해인들은 스스로 한 집단을 이루고, 객가인들도 스스로 일파를 이루었다." 온서안은 말한다. 그의 어린 마음 속에 이것은 각방각파각로풍연(各幇各派各路風煙)"으로 나뉘어졌다. 이것은 그가 이후 가족과 방파를 창작하는데 영감의 원천이 된다.

 

온서안이 소학교를 다닐 때, 반내에 관료자제가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관료자제가 마침내 온서안을 찾아온다. "나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싸우게 되었다. 나는 도망치며 싸우고, 한편으로 울면서 한편으로 공격하고 막아냈다. 사우다가 탁자위에 올라가서 호조와 담퇴를 써서 그의 긴 자와 대걸레를 막아냈다. 마침내 내가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후 반의 친구들에게 나는 어린 영웅이 된다. 부지불식간에 짱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명의 반친구가 그와 결의형제를 맺게 된다. 그후 그는 다시 '신주시사(神州詩社)'를 조직한다. 여러해가 지난 후, 그의 초기작품 <신주기협>시리즈에서 4명이 결의하는 이야기는 '신주결의'로 쓰여진다. 이 '신주시사'는 방파인 '신주결의맹'로 바뀐 것이다.

 

온서안은 소설의 강호국면은 사실 현실을 반영하고 투사한다고 본다. "미국, 프랑스, 독일의 군사역량을 모두 방회로 삼아서 쓸 수도 있고,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등의 축구팀의 경기를 방파투쟁으로 삼아서 쓸 수도 있다. 내 기억에 25년전의 소설에서, '천조문'과 '조천맹'을 썼는데, 지금 인터넷에는 온통 '천조'이다. 이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화산논검과 화산파를 쓰기 전에 김용은 화산을 가본 적이 없다. 2003년에야 처음으로 화산을 오른다. 책에서 쓴 화산논검의 장소는 화산남봉이다. 그러나 체력이 못미쳐, 김용은 겨우 북봉에만 올랐다. 그는 거기서 글을 써서 남긴다. 화산논검의 위치를 북봉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곳은 지금 관광지가 되어 버렸다.

 

순수한 허구의 무협문파는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사천의 당문무관은 일찌감치 개설되어 제자를 모으고 있다. 절강의 도화도관광은 일찌감치 추천항목이 되었다. 하북 형대에는 누군가 소요파(逍遙派)를 창립했다. 광고에서 "그 순양내공은 백일만 수련하면, 비석을 깰 수 있고, 머리로 벽을 받아 무너뜨릴 수 있으며, 더 연공하면 답설무흔이 될 수 있다"고 적었다.

 

"작년 1년동안 4개의 무관(武館)이 우리 잡지에 광고를 실으려고 했습니다. 모두 '항룡십팔장'을 전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무관은 '암연소혼장(黯然銷魂掌)'이 과목에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격과 잡지>의 편장장인 가춘천의 말이다.

 

2007년 8월 3일, 우루무치체육국은 천산파무공을 회복시켰다고 선포한다. 천년명파의 부흥이 도래한 것이다. "그것은 한 무리의 신강상인들이 무술도 모르고, 천산파 상표를 등록한다. 그리고 나를 찾아와서 아미에서 무술인재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현임 아미파 장문인인 왕건(王鍵)이 기자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비록 번영하는 겉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그저 민간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부는 문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외적으로 모두 연구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습니다." 청성파 장문인인 유수빈(劉綏濱)의 말이다. 아미파 장문인 왕건의 정식 직함은 아미무술연구회 회장이다. 유수빈은 청성무술연구회 회장이다. 무당파 장문인인 종운룡(鍾雲龍)의 칭호는 더욱 현대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무당제자는 일반적으로 그를 '종주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종운룡은 무당산 자소궁 관리위원회 주임을 맡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무협세계에 대한 그리움에 대하여 온서안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독자들이 현실역량을 초월하는 갈구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방파를 창립하고싶은 생각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없었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굴곡에서는 어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불공정한 일을 당하면 너는 아마도 잠깐 생각할 것이다. 만일 강대한 문파가 있다면 내가 가입하고, 더 이상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을텐데. 만일 내가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엘리트가 많은 문파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부당하거나 불공정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텐데."

 

그는 말했다. 이런 생각은 서방에서는 물건을 사용하여 스파이더맨으로, 약을 사용하여 헐크로,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캡틴 아메리카로, 외부힘을 사용하여 Fantastic Four로, 재력을 이용하여 아이언맨으로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무협소설의 비급, 절학, 그리고 방회문파가 되었다.

 

온서안은 말한다. 수년동안 그는 자주 중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한다. "이런 곳에서 고인이사를 만나지는 못한다. 오히려 강도를 만나고, 곤란을 겪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