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상업시대의 무림문파: 무당

by 중은우시 2012. 4. 20.

출처: 간천하

 

무협소설에서 소림과 함께 강호를 질타하는 무당은 현실에서는 거의 낙후된 생산력의 대표가 되어 버렸다.

 

"최근 들어 무당의 발전은 약간 늦었고, 약간 느렸다. 첫째는 체제문제이고, 둘째는 도교의 사상이 원래 세상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공명이록을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무당 자소궁 주지인 종운룡의 말이다. 종운룡은 도호가 청미(淸微)이고, 전승상으로 무당산 삼풍파(三豊派)의 제14대 장문인이다.

 

"도교에는 400여개의 문파가 있다. 어떤 문파는 무공을 할 줄 알고, 어떤 문파는 모른다." 무당산에는 수백개의 도관이 있다. 모든 도관에는 자신의 주지가 있다. 소위 주지는 관리위원회 주임이다. 그 아래에 총무, 접대를 맡는 부주임이 있고, 사무실이 있다. 지금 이들 도관은 무당산도교협회에 소속되어 통일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다른 문파들이 상업개발에서 요란스러운 것과 비교하면, 무당은 확실히 조용한 편이다. 종운룡은 주요한 원인이 대량의 접대활동에 너무나 많은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83년, 19세의 종운룡은 소림에서 무당으로 바꾼다. 1988년, 그는 "무당산도교협회 무술총교련"이 된다. 1996년, 종운룡은 만장일치로 자소궁 주지에 당선된다.

 

"무당산 도관 주지 선거제도는 명나라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종운룡의 말이다. 자소궁은 원래 곤도(坤道)를 위주로 한다. "여제자들이 많은 곳에는 끼리끼리 파벌을 이루는 것이 많다. 내가 주지가 되기 전에, 도관의 관리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도교협회의 지도자들은 머리를 짜내서 나를 후보자로 올린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편가르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내가 이전에 그들의 무술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를 하자, 도관의 50여명이 모두 나를 뽑아주었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관리위원회 주임의 생활이 그렇게 피곤할 줄은.

 

무당산도교협회의 집객도 겸하고 있다보니, 종운룡은 매일 눈만 뜨면 바쁘게 각종 접대를 하여야 했다. 그의 봉사대상은 해외관광객과 청급이상의 간부들이다.

 

가장 많이 접대하는 것은 대만관광객이다. 가장 많은 해에는 1년에 300여개 관광단이 왔다.

 

"그들은 의식을 좋아한다. 우리는 그래서 의장대를 만들어, 그들을 산아래에서 맞이하고, 그들이 신에게 절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교문화를 소개한다." 종운룡은 웃으며 말한다. "1993년 우리가 대만에 갔을 때, 그들의 의식은 더욱 융중했다. 의장대가 졸지에 몇 킬로미터나 늘어섰다."

 

종운룡에게 가장 인상깊은 사람은 중공중앙 총서기인 강택민이다.

 

"그는 우리가 평소에 맞이하던 지도자들과 달랐다. 우리가 이야기거리를 찾아내서 그들에게 역사문화를 소개한다. 강선생은 오자마자 먼저 <도덕경>의 구절을 외웠다. 도교협회는 우리에게 태극권 시연을 보여주게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도 할 줄 알았다. 내가 시범을 마치자, 그가 따라 한 것이다. 그는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얘기를 꺼냈다. 나는 즉시 악사를 데려와서 연주를 시켰다. 이것들은 모두 사전에 준비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뭘 얘기하면 우리고 그를 따라갔다." 종운룡은 탄식한다. 이런 접대는 스트레스가 크다. 조금도 잘못이 있어서는 안된다. 가끔 어떤 사람은 민감한 사회문제, 정치문제를 묻곤 한다. 그러면 더욱 조심해서 대답해야 한다.

 

매번 점심, 저녁시간은 왕왕 가장 바쁜 때이다. 연속 몇년간 종운룡은 거의 라면밖에 못먹었다. 어떤 때는 심지어 라면 1개로 하루종일 버틴 적도 있었다. 수행, 타좌(打坐)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2000년, 몸과 마음이 피곤해진 종운룡은 사직을 강행한다.

 

"내가 사직한 데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당시 무당산도교협회의 회장이 우화등선(사망)하고, 새로 부임한 도교협회 회장은 무공을 할 줄 몰랐다. 무술을 중시하지도 않았다." 종운룡을 설명한다. "그리고, 도교는 자연을 연구한다. 진정한 도인은 경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직후, 종운룡은 두 제자를 데리고 무당산 오룡궁의 뒤에 있는 동굴에서 면벽수행한다. 2008년, CCTV기자가 동굴로 종운룡을 찾아갔을 때, 종운룡은 이렇게 말한다. "도인으로서, 원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여러해동안 속세일에 몸을 빼앗기다보니, 이곳에서 장기간 조용히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장래의 수행장소를 준비한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종운룡은 대가족을 가지고 있다. 그가 다 먹여살린다. 어찌 여러해동안 폐관수련할 수 있겠는가?" 자칭 '무당 현무파 내가권종 제14대 장문인'이라는 유현덕(遊玄德)은 중운룡이 폐관한다는데 의문을 표시한다. "현재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포장하기 위하여, 7년, 8년간 폐관한다. 폐관9년이면 달마대사와 동격이지 않은가?. 종운룡이 유명한 것은 현재 지방정부가 그를 계속 선전하기 때문이다."

 

속무에서 몸을 빼낸 종운룡과 비교하면, 유현덕은 오히려 속세에서 잘나가고 있다. 3월하순 성도에서 개최된 제1회 무협문화제에 '무당장문'의 신분으로 출석한 것은 바로 유현덕이다. 그러나, 무당에서 유현덕이라는 이름은 거의 방문좌도의 대명사이다.

 

바이두에서 '유현덕'을 치면, 2008년 비무에서 유현덕이 5명의 사내들과 맞서서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으로 가볍게 5명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있다. 그는 일찌기 흑룡강위성TV에서 '첨의십팔질(沾衣十八跌)'과 '일양지(一陽指)'를 선보인 바 있다. 관련 동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유현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범을 보인 것은 일양지가 아니다. 무당산의 대대로 전해지는 금침지(金針指)이다. 방송국에서 선전을 위하여 일양지로 바꿔 말한 것이다."

 

"그는 출가인이 아니다. 귀의제자도 없다." 무당산의 익명을 요구한 한 도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도인에 따르면, 유현덕의 고모부가 현지의 간부였다. 1988년 유현덕이 병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고모부가 그를 무당산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처음에 무당에 왔을 때, 유현덕은 화원을 관리했다. 나중에 사무실의 잡일을 한다. 그 후에 무당산 금정(金頂) 관리위원회의 부주임이 된다.

 

"그가 부임하자, 당시의 주임은 허수아비로 만든다." 어떤 도인의 말이다. 그리고 그뿐아니라, 그는 제자를 시켜 사람을 때리기도 하여, 명성이 아주 나빠진다. 일시에 무당산의 출가인들은 모두 도교협회 회장을 질책한다. 어찌 이런 사람을 산에 오르게 만들었는지.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게 된 유현덕은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유현덕이 쫓겨난 것에 대하여 종운룡은 다른 버전을 얘기해준다. "매전 사람들이 유현덕을 찾아가면, 그의 제자는 항상 기다리가고 말했다. 먼저 통보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통보한 후에는 왕왕 타좌중이라고 한다. 한번은 한 정부관리가 그를 보러 갔다. 문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유현덕은 방안에서 이리저리 오가면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관리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돌아간다. 그후 정부사람들은 그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쫓아낸 것이다."

 

무당산에서 축출당한 유현덕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술을 배우고, 강의한다.

 

"그는 나중에 많은 동영상 자료를 사서, 따라 배운다. 자신이 권법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도인은 탄식한다. 이렇게 보면, 유현덕은 어느 정도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지금 무술권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무술가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무술은 너무 허황되다는 것이다.

2009년, 종운룡은 산허리에 집을 하나 빌려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삼풍회관" 첫째는 양생방법을 가르치고, 둘째는 무술인재를 배양하기 위함이다.

 

지금 그의 업무장소는 회관의 꼭대기층의 옥상에 있다. 정부기관의 사무실과 다를 바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짙은 갈색의 사무용탁자가 있고, 탁자위에는 작은 오성홍기가 꽂혀 있다. 곁에 있는 차탁에는 다구(茶具)와 올레오등 간식거리가 있다.

 

"이제는 내가 피곤하게 접대해야 한다." 종운룡의 후임자이자 현임 자소궁 주지인 무준려(武俊麗)는 아침부터 손님맞이에 바쁘다.

 

자소궁 관리위원회는 도관내의 사합원 안에 있다. 주임의 사무실도 아주 간소하다. 3개의 탁자, 2대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제외하면 거의 아무 것도 없다.

 

"종도장이 옛날에 떠난 것은 자신의 시간이 벗기 때문이다." 무준려는 탄식하며 말한다. "우리가 현재 낮에는 손님을 맞이하고, 저녁에는 때때로 야근을 한다. 조용히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되돌아생각해보면, 이것도 대중에 봉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도우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위한다."

 

무준려의 말은 먼길을 와서 투숙할 곳을 찾는 향객에 의하여 잘린다. "최근에는 잠잘 바닥도 없습니다." 무준려는 난처한 얼굴로 말한다.

 

관리위원회의 문을 나서면, 자소전, 부모전등 도관 안에 향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문앞의 빈터에는 2,3십명의 금발벽안의 외국인들이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이곳은 일찌기 <의천도룡기>에서 장삼풍이 장무기에게 태극검을 가르친 곳이다. 지금 붉은 색의 벽에는 여전히 "경축모주석만수무강"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