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경제/중국의 산업

평담(平潭)터널방: 적막과 성장

by 중은우시 2010. 1. 18.

글: 이빈(李賓) 서총(徐聰)

 

임소녕(林紹寧)은 북경에서 자기의 고향인 복건성 평담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졌다.

 

해외무역을 하는 외에, 임소녕은 후해(後海)에서 "해바(海)"라는 Bar를 운영하고 있다. 이 Bar는 동시에 북경 평담상회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평담의 북경에 있는 기업가들이 자주 이 곳을 찾아서, 편안하게 얘기를 나누고 서로간의 정을 교류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대부분 외지에서 일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그들은 각지의 공사가 많아서, 아주 바쁘다."

 

그가 말하는 "아주 바쁘다"는 것은 평담의 고향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전국 각지의 철도, 고속도로 혹은 지하철의 터널시공현장에 나가 있다는 말이다. 난유철도, 계광철도 및 납검고속도로, 경복고속도로등 그 숫자를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이다. 국가에서 4조위안을 투입하여 현재 엄청나게 많은 도로공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평담의 기업가들은 2009년에 호시절을 맞이하였다. "나는 현재 연안의 프로젝트공사현장에 나와 있다." 한 평담의 기업가는 전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기자에게 인터뷰할 시간도 없다면서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숫자는 이들 전국각지에 분포된 평담사람들이 전국의 80%의 터널공사를 맡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고향은 동남쪽 귀퉁이에 있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중국에서 5번째로 큰 섬인 "평담도(平潭島)"이다.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평담현이고, 복건성의 관할에 속한다.

 

터널은 평담사람의 1/4을 먹여살린다고 하더라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평담의 총인구는 40만가량인데, 현재 10만명이 터널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급여도 낮지가 않다. 일반노동자가 1달에 4,5천위안을 받고, 특수기술을 가진 발파노동자는 급여가 1만위안에 이른다." 복건성 해단터널공정유한공사의 허표(許標)가 한 말이다.

 

이 숫자의 배후에 마찬가지로 깜짝 놀랄만한 사실은 평담터널방의 적막과 성장과정이다.

 

평담은 대만 신죽(新竹)과 직선거리로 68해리이다. 대륙에서 대만과 가장 가까운 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신중국이 성립된 후, 평담은 오랫동안 해안경비가 삼엄했다. 수십년동안 평담은 아주 특수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 토지가 언제 전선이자 전쟁터로 변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평담인들은 동원되어 방공호를 파고, 지하양식창고와 군사시설을 건설했다. 매일 암석, 토양, 모래와 싸웠고, 그 결과로 평담인들이 풍부한 터널건설경험을 쌓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터널사업을 발전시키게 되는 기초가 된다.

 

중국의 모든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평담의 터널사업이 진정으로 개시된 것은 개혁개방이후이다.그러나 논리의 시작포인트는 다르다. "개혁개방이후의 수십년동안, 평담은 국가정책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임소녕에 따르면, 그 원인은 자연히 대만으로부터 68해리가 떨어져 있다는 독특한 조건때문이다. 1996년 대만해협관계가 긴장되자, 중국인민해방군 3군연합군사훈련이 바로 평담에서 행해진다. 당시 총참모장을 맡고 있던 장만년은 100여명의 장군을 데리고 평담도 오전진 노호산(나중에 장군산으로 개명)에 올라서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지휘를 했다. 이를 보면 평담이 얼마나 군사적으로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평담인에게 있어서, 이런 역할부여는 그들이 자유롭게 다른 산업으로 발전하는 것을 제약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방공동'을 파면서 먹고살 수밖에 없는 것같다.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산업도 없었다. 외지로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뭘 할 수 있겠는가?"

 

마침 다른 지방에서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고, 터널공사는 도로, 철도, 지하철등의 건설에서 난이도가 높은 공사였다. 소수의 용기있는 평담이들은 외비로 나가서 대형국유건설기업과 접촉을 하여, 시공을 따게 된다.

 

1980년대에 국내의 도로,지하철건설은 주로 국유기업이 수행했다. 중철공사(中鐵公司)도 막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병개공(兵改工, 군대의 철도공정병에서 중철의 노동자로 된 사람들)"들이 들어온 후, 중철 산하의 공정국은 계속 확대되었다. 그래도 각지에서 공사를 하는데는 부족했다. 하물며 터널의 시공은 말할 것도 없다. 평담사람들은 확실히 기술과 경험이 한수 위였따. 그들의 시공대는 콘크리트방수공법등 터널시공기술이 뛰어났고, 생존의 곤란은 그들로 하여금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게 해주었다. 위험하고 힘들며, 적막한 것을 잘 견뎠다. 점차 그들은 중철공사 각 공정국의 신임을 얻는다.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우리의 초기발전단계이다." 허표의 말이다. "우리 회사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중철의 일을 하는 단계이다. 중철이 철도공사를 하면, 우리를 불러서 일을 시킨다. 왜냐하면 우리는 힘든 일도 잘 견디고 일을 죽어라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최초의 평담인들은 대부분 현지의 집체조직 성격의 건축공사 명의로 일을 했다. 현재의 고건(高建)이 이끄는 복건성해성건설유한공사(이하 '해성건설)"의 당시 명칭은 평담제4건축공사였다. 최초로 1958년의 "평원건축대"(평원은 평담현의 산하에 있는 진이다)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회사는 2004년에 민영기업으로 개조된 현지 최대의 터널건설회사이다. 매년 그의 명의로 수주하는 터널공사는 전국총량의 40%에 달한다. 2009년에는 터널사업의 매출액이 20억위안을 넘었다.

 

해성건설의 굴기는 임능생(林能生)이라는 사람 덕분이다. 그는 해성건설(당시에는 해천건설공사. 2009년 8월에 개명함)의 전임 동사장 겸 총경리였다. "그가 당시 해천건설을 바닥에서 건져올렸다." 고건의 말이다.

 

임능생은 중철산하의 공정국과 접촉하여, 많은 터널공사프로젝트를 수주했다. 이이하여 당시 경영곤란에 처해있던 해천건설을 점차 업계에 알린다. "1995년, 1996년부터 점차 희망이 보였다."

 

무슨 요인이 평담인들로 하여금 집단으로 움직이게 하는 품성을 길러주었는지는 모른다. 전체 연해경제는 모두 개혁개방의 유리한 조건과 신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단 터널사업이 커지게 되자, 그들은 속속 몰려들었다. 가족, 촌장, 마을 전체 섬의 주민들이 하나하나 몰려들었다. 서로 친척과 친구를 소개하고 연이어서 터널업에 종사하게 된다. 평원진은 전체 평담에서 터널사업에 가장 많이 종사하는 곳이다. 그리고 "임"씨성이 평담의 대성이므로, 기업가의 대부분은 임씨성이다.

 

평담인들은 시공대의 신분으로 중철에서 일하던 단계에서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부는 정규 민영건설회사를 만들었다. 마침 개조되던 집체기업과 함께, 중철의 수중에서 터널프로젝트를 수주받았다. 당시의 해천건설외에 허표가 일하는 복건해단터널공정공사, 복건성터널공정공사, 복건성노통공사등이 있었다. "비록 많은 회사들이 '복건성'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실 모두 평담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경구선, 남곤선등 중대한 공사의 터널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주받아 건설한 후, 평담인들의 터널업계에서의 명성은 날로 높아지고, 자신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전에 북경지하철의 터널도 모두 평담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능생은 일찌기 이렇게 평담의 터널사를 말한 바 있다: "막 외지로 나가서 터널을 할 때의 평담사람들은 쇠망치를 등에 지고, 쇠삽을 휘두르며, 수레를 밀면서 터널을 파는데 어떤 때는 1미터를 파는데 한 달이 걸렸다. 현재는 굴착기로 하루에 수미터를 팔 수 있다."

 

허표가 보기에, 1995년에서 2002년은 평담인들이 터널업계에서 성숙한 시기였다. "1995년이후에는 발전이 빨랐다. 최전성기에는 전국시장의 80-90%를 차지했다."

 

공사건설업계는 항상 수주가 문제이다. 해천건설등 규모가 큰 회사들은 중철로부터 터널프로젝트공사를 따낸다. 이들과 달리 시장이 확대되면서 일부 각 회사에서 일하던 평담인들이 관련기술을 습득한 후에, 속속 시공대를 조직하여, 독립하여 공사를 수주하기 시작한다.

 

평담인들의 집단의식 상부상조의식은 여기서도 두드러진다. 해천건설, 해단터널등 중철의 협력업체들과 비슷하게, 이들 소규묘의 평담터널시공대도 해천걸설의 명의하에서 수주자격을 따낸다. 그리고 공사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해천건설은 이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다. 이렇게 하여 평담인들은 국내의 터널업계에서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우리 평담의 터널업계 기업주들은 매년 모여서, 함께 터널시공의 기술문제를 논의한다. 어떻게 시공하는 것이 좋은지를 연구하고, 심지어 교육훈련반도 만든다." 고건의 말이다.

 

업계인사에 따르면, 터널공사는 지하에서 작업하므로, 공사난이도가 높고, 작업조건이 열악하다. 그리고 가지, 각처의 터널은 지질상황이 복잡하고 차이가 크므로, 리스크를 크게 안고 있다. "항상 생명의 위험을 안고 있다"

 

1995년, 허양명의 해단공사는 광주1호선의 터널공사를 맡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광주의 지하는 진흙이었다. 노동자들은 온 몸이 젖었고, 어떤 때는 오물을 뒤집어 썼다. 피부가 썩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공사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작업복을 사주고, 매일 약을 달이면서, 공사를 앞당겨 완공했다.

 

"돈은 벌기 좋다. 그러나, 목숨으로 바꿔오는 것이다." 한 평담인은 이렇게 말을 남겼다. 이외에 항상 외지의 시공현장을 돌아다니므로 일반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경우가 있다.

 

그래도, 요즘 들어, 평담의 터널방은 갈수록 편안하게 느껴진다. 비록 거의 모든 중대한 터널공사를 그들이 완성했지만, 브랜드와 명예는 그들이 이름을 걸고 있던 중철 공정국의 몫이었다.  "우리는 계속 남을 위해서 일해온 것이다." 고건의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국내 최대의 터널단면공사인 북경지하철 복팔선의 왕푸징 - 동단구간; 두번째로 긴 터널인 경복고속도로의 미호림 터널공사는 모두 평담인들의 걸작이다. 그러나 노반상을 받은 것은 중철집단이었다.

 

도급자격의 제한으로, 현재 전체 복건성에는 중철 공정국과 같이 1급도급자격을 갖춘 건설회사가 없다. 규모가 비교적 큰 복건성터널유한공사와 해단터널유한공사도 겨우 터널전문1급 자격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러해동안 평담인들이 중철의 명의를 걸고 일해야 했던 원인이기도 하다.

 

"국가의 자격에 대한 요건이 너무 엄격하다. 자본금규모외에, 인원구조, 고정자산등 여러가지 요건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현재로서 이를 맞출 수가 없다." 고건의 말이다.

 

국가의 공사도급에 대한 관리가 갈수록 엄격해지고 규범화되고, 중철, 중건등 중앙기업의 역량은 계속 강화된다. 그러면서 그들의 평담인들에 대한 의존도도 점점 약화된다. "현재 중철의 산하에도 여러개의 터널회사가 있다. 관련 프로젝트는 분명히 그들에게 먼저 준다" 한 기업주의 말이다. "현재 북경의 터널공사는 이미 평담인들이 하는 경우가 드물어 졌다. 그래서 평담인들은 속속 지방으로 가고 있다."

 

태원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기업주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중철등 기업의 관리는 예전보다 엄격해졌다. 그들은 이미 예전처럼 시공대를 만들어서 일할 수는 없게 되었다. "현재는 모두 노무회사의 형식이다. 이렇게 하니 인건비와 비용이 모두 증가한다. 거기에 원재료가격도 올랐다. 그래도, 도급자가 주는 금액은 오르지가 않는다. 이윤이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이외에, 원래 고향사람들끼리 모여서 도급프로젝트를 따던 모델도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에 우리는 서로 이름을 거는데 느슨했었다. 어떤 경우에는 고향사람체면을 봐서, 확실히 엄격하게 심사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보니 후환이 생긴 경우도 있다. 시공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긴다." "현재 우리는 이름을 빌려주는데 아주 엄격하다. 고향사람이지만 자격과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다."

 

사실상 현재의 평담인들은 터널프로젝트에서 관리와 기술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터널노동자는 대부분 사천에서 온다. 이것은 이미 평담인들이 터널속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같다.

 

그들은 현재 복건성에 신청을 했다고 한다. 해성건설, 융성시정공정공사, 복건성노통공사, 복건노교공사, 복건터널유한공사등을 모두 통합하여, 평담터널기업집단공사를 만들고, 총도급상자격을 획득하여 중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비록 터널업이 광명의 업종이기는 하지만, 장기간 외지를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이 업계에 종사하는데 싫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들에게는 물여주지 않을 것이다. 너무 힘들다. 우리는 다른 지방의 기업주와 다르다. 전국각지에 시공현장이 있다. 반드시 직접 가서 살펴야 한다. 많은 기업주들은 자신의 아들이 나중에 다른 곳에 가서 많이 배우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돈은 부족하지 않다."

 

부유해진 평담사람들은 현재 모두 도시로 갔다. 복주, 하문, 북경, 상해등지에 거주한다.

 

비록 대부분은 아직 터널사업을 하고 있지만, "대형 터널기업의 기업주들은 이미 부동산업계로 뛰어들었다." 임소녕의 말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평담터널상인들은 다원화를 꾀하고 있다.

 

2009년 12월 29일 정오, 한 평담의 터널기업주의 딸은 몇몇 친구를 데리고 임소녕의 바로 와서 모임을 가졌다. 부친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지금 홍콩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부친의 가업을 잇는데 대하여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