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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청)

강청(江靑)은 삼류배우였나?

by 중은우시 2008. 11. 14.

 

 

 

글: 진전요(秦全耀)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강청이라는 여인을 얘기할 때면, 1930년대에 상해에서 영화를 찍을 때 "바로 삼류배우"였다고 말하곤 한다. 심지어 정령(丁玲)과 같이 강청을 잘 아는 사람도 이렇게 말했다. 만일, 감정적인 요소를 버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아마도 또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강청은 삼류배우가 아니었다. 강청이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녀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해쳤고, 원한을 많이 졌기 때문인 것을.

 

상해 금룡대희원(金龍大戱院)의 입구에 화극(話劇) <<노라(那拉)>> 의 큰 현수막이 걸렸다. 거기에는 "조단(趙丹), 남평(藍苹) 주연"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조단은 상해의 명배우였다. "남평"이라는 낯선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났고, 조단과 나란히 쓰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1935년 6월 27일, 어둠이 상해를 감쌀 때, 금성대희원은 아주 붐볐다. <<노라>>가 이날 첫공연을 하는 것이다. "빛나는 배우, 백열화된 연기, 대규모의 연출" 당시 상해에서 화극은 이미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노라>>의 공연은 뉴스의 촛점이 되었다. 금성대희원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공연은 1주일간 계속되었고, 계속 자리는 꽉 찼다. 노신도 가서 <<노라>>를 관람했었다.

 

상해의 각 신문은 속속 <<노라>>공연을 보도했다. "남평"의 이름은 각 신문에 인쇄되어 나왔고, 수천수만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영향력있던 <<시사신보>>는 <<신상해 노라>>특집을 간행했다. 첫머리에는 남평의 사진을 실었다. 상해 <<신보>>는 1935년 7월 2일, 소령(蘇靈)의 <<노라연출을 보고>>라는 글을 실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조단과 남평의 연기를 평론했다: 입센 당시의 유럽에서 현재의 중국까지 헬머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노라>>라는 극에서, 헬머는 연기하기 어려운 배역이다. 다만 조단은 아주 가볍게 그 일을 해냈다. 다음으로 나는 내가 새로 발견한 것을 말해야 겠다. 노라를 연기한 남평이다. 나는 놀랐다. 그녀의 공연과 말은 천재적이다. 그녀처럼 유려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뛰어났다"

 

첫공연의 다음 날, <<민보>>는 해사의 <<노라를 본 이후>>라는 글을 실었고, 역시 남평을 언급했다. 그녀의 인물배역은 적당했고, 연기도 적절했다. 당연히 남평, 금산, 위학령, 오미, 조단의 다섯명을 기억해야 하고, 모든 사람의 성격은 그들이 차조했다. 대화도 아주 완벽했다. 특히 제2막에서 남평은 힘을 냈다. 그 동작과 표정은 하나의 악곡의 '선율'과도 같았다. 아주 감동적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스페인춤을출 때, 이 선율은 정점에 달한다. 전인류의 이기심과 무지가 모두 그녀의 몸을 누르는 것같다. 가련하기 그지없다. 21세의 남평은 처음으로 뜬 것이다. 그녀는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작가 섭영렬이 <<강청전>>이라는 책에서 강청의 연기에 대하여 묘사한 것이다. 일찌기 강청과 30년대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상해희극학원의 호교수도 강청의 연기수준은 인정했다. 길다란 독백을 처리하는데 아주 뛰어났고, 아무리 해도 삼류배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그녀가 아주 예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특색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강청은 다시 <<낭산첩혈기(狼山喋血記)>>에 출연했다. 이것이 상영된 후 감독 비목은 <<낭산첩혈기에서의 남평>>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서 남평의 연기를 아주 칭찬했다. "남평 여사의 놀라운 연기와 열정은 관중으로서 듣기는 힘들 것이다. 낭산첩혈기에서 매 수백척마다 그녀는 한 장면씩 들어간다. 이 장면은 많으면 한 컷이다. 연속 세컷이상인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그녀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아주 적절하게 진실과 역량을 표현했다"

 

1936년에 당시를 뒤흔들었던 3쌍의 스타들이 항주육화탑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순서대로, 섭노천(葉露茜)과 조단, 남평과 당납(唐納), 두소견(杜小鵑)과 고이이(顧而已)였다. 주례는 심균유였는데, 심균유는 중국의 저명한 정치가였다. 그가 주례를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6명이 영화계, 화극계에서 이미 상당한 지명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대가였다. 그런데, 강청만 "삼류"란 말인가?

 

1935년 강청이 전통(電通)영화공사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남평"으로 바꾸었었다. 먼저 왕영이 주연한 <<자유신>>에서 조연을 맡았다. 이어서 원목이 주연한 <<도시풍광>>에서 지식청년의 여자친구역을 연기했다. 그리고 이 지식청년역을 연기한 사람이 바로 당납이었다. 1936년에 그녀는 연화(聯華)영화공사로 옮긴다. 연화에서 그녀는 모두 3개의 영화에 출연한다: 비목의 <<낭산첩혈기>>, 사도혜민의 <<양모전>>, 채초생이 감독한 <<왕노오>>. 그녀는 전통, 연화에서 영화를 찍는 동시에 아마추어극인협회에서 화극에 참가하기도 했다.

 

강청이라는 여인은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것때문에 그녀의 연기까지 평가절하해서 그녀를 삼류배우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필자의 생각으로 강청의 화극에서의 연기나 무대수준은 아마도 영화보다 뛰어났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화극에서의 연기에 있어서 1류 혹은 1류와 2류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영화에서도 적어도 2류배우는 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