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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의 환관취처(宦官娶妻)

by 중은우시 2009. 12. 31.

글: 유병광(劉秉光)

 

환관은 소위 "형여지인(刑餘之人,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신체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원래 혼인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다만, 환관취처(환관이 처를 취하는 것)현상은 역사상 유래가 오래되었고, 계속하여 존재했다. 현존하는 사료로 보면, 환관이 대량으로 처를 취한 현상은 동한때 나타났다. <<후한서. 유유전>>에는 "상시황문(常侍黃門)도 널리 처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한의 환관들이 처를 취하는 현상은 비교적 광범위했고, 당시 사회여론의 비판과 견책을 받았다. 예를 들어, <<후한서 주거전>>에는 "환관인 자들이 거짓으로 형태를 꾸미기 위하여, 양가집 여자를 핍박하여 취한 후, 가두어 두고, 백발이 될 때까지 짝을 찾지 못하게 하니, 이는 하늘의 뜻에 어긋난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환관들이 여인을 취하는 것을 혼인관계로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여성을 박해하고 짓밟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나라때가 되어서는 환관취처 현상이 이미 성행하게 된다. <<신당서>>, <<구당서>>, <<전당문보유>>, <<문원영화>> 및 당나라때 비각 등 관련기록을 보면, 당나라때 관직이 있는 환관은 일반적으로 모두 처를 취했다. 어떤 경우는 처가 하나만도 아니었다. 당나라때 환관취처의 보편성은 동한, 명나라를 포함한 역대왕조중에서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필자가 통계를 내본 바에 의하면, 당나라때 환관으로 처를 취한 자는 5품이상의 고급환관중에서는 49.3%이고, 6품이하 하층환관중에서는 50.7%이다. 중하층환관들에서 이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당나라때 환관들이 보편적으로 혼인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당나라때 관련 사료와 사적을 보면, 환관취처문제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질책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최소한 환관들이 건립한 혼인관계를 묵인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때 환관들이 처를 취할 때는 따지는 것이 많았다. 첫째, 여자측의 문벌을 중시했다. 비지(碑誌)자료에 따르면, 환관은 처족의 문벌이 얼마나 고귀하고 대단한지를 자랑하는 내용의 기록이 많다. 이것은 바로 이러한 배우자선택관념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 둘째, 여자의 품행을 중시했다. 배우자가 '덕행온후(德行溫厚)', '유순숙덕(柔順淑德)", "영숙소착(令淑昭着), "온공윤색(溫恭允塞)"할 것을 요구했다. 즉, '삼종사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셋째, 여자의 용모를 중시했다. 예를 들어 고력사의 처인 여씨는 용모가 "국수(國姝, 나라에서 손꼽히게 예쁘다)"였다고 한다. 환관 위모의 처인 송씨는 "자용완숙(姿容婉淑)"했다고 되어 있고, 양현략의 처인 두씨는 "응자회수(凝姿秀)"했다고 하며, 낙명순의 부인 초씨는 "온가유지자(溫嘉柔之姿)"를 가졌다고 한다. 이외에 환관취처에서 여자의 연령도 중시했다. 묘지명의 기술을 보면 여자가 환관에게 시집올 때, 많은 경우가 "초계(初)" "계년(年)", "급계(及)"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즉 15살 가량을 말한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명나라때 환관들은 처를 취할 때, 아무렇게나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높은 기준의 요구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때는 왜 환관이 처를 취하는 풍속이 성행했을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래의 다섯가지 이유가 있는 것같다: 첫째 ,당나라는 개방적인 시대였다. 사회환경도 비교적 느슨했고, 황제도 환관취처에 반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보국이 원씨를 처로 맞이할 때, 당숙종이 중매를 서준 것이었다. 둘째, 환관취처후 비록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는 못하지만, 처가 있고 집이 있다는 만족감은 누릴 수 있었다. 셋째, 환관은 생육능력을 상실했지만, 그러나,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전통종법관념의 압력하에, 처를 취하고 양자녀를 들이는 것을 통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전종접대(傳宗接代)'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다. 넷째, 당나라때 환관은 처를 취하고 자식을 시집장가보내는 것을 통하여, 다른 가족과의 인척관계를 맺고, 정치적으로 장수하고자 했다. 다섯째, 당나라때 환관은 대부분 강인했다. 그들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토지를 겸병하고, 저택을 지었다. 심지어 직접 황제를 올리고 폐위하기까지 하였다. 조정관리들이 가진 특권은 그들이 모조리 가지고자 했다. 예를 들면 처를 취하고 집안을 이루는 것도 포함된다.

 

환관취처는 많은 부녀의 고통 위에서 건립되었다. 많은 부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을 기초로 건립된 혼인관계이다. 청춘기의 소녀가 내시의 짝이 되어 인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들 불행한 여자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예를 들어, 내시 이모가 창주 요안현위 대모의 딸을 처로 삼았는데, '그해에 바로 죽었다' 이는 비정상적 사망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예를 들어 대환관 초희망의 처 이씨가 그러했다. 내시 뇌모의 부인 송씨는 호가 공덕산거장인데, 남편이 죽은 후, '돈오공색, 요귀선정(頓悟空色, 了歸禪定, 공과 색을 깨닫고 선정에 들었다)'즉 불문에 귀의했다. 어떤 환관은 배우자에게 남편인 환관이 죽은 후에도 수절할 것을 요구했고, 개가하지 못하게 했다. 예를 들어 환관 낙보정이 죽었을 때 부인은 26살이었는데, '평생을 과부로 지냈다" 이같은 고통의 눈물들은 당나라때 환관취처의 배후에 있는 잔혹과 기형을 드러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