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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의 공주들은 왜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10.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여도사는 당나라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황실공주인 여도사라면 더욱 그렇다. 당나라때는 공주들이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나라때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된 얘기를 하자면 옥진공주(玉眞公主)를 빠트릴 수 없다. 이 옥진공주는 여황제 무측천의 손녀로, 당현종 이융기의 친여동생이다. 그녀는 젊었을 때, 스스로 원해서 여도사가 되었다. 당시 옥진공주가 스무살 남짓되었을 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부친인 당예종 이단에게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고 싶다고 밝힌다.

 

당예종은 당연히 쉽게 응락해주지 않았다. 자기의 딸에게 손해된다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옥진공주는 결심이 굳었다. 그녀는 모친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아마도 당예종은 가련하게 죽어간 그녀의 모친을 떠올렸을 것이다. 확실히 고혼이 되어 좋은 곳으로 보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예종은 마침내 딸의 요구를 승락한다.

 

이해 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도 부드러우며, 풀들은 자라고 새는 날아다니는 계절에, 장안성의 밖에는 "옥진관(玉眞觀)"이라고 이름붙인 방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매일 만명이상의 백성들이 농삿일을 바려두고 도관을 건축하는데 동원되었다. 1년여의 공사끝에 옥진공주는 마침내 이 화려한 도관에 입주한다. 그녀와 동시에 입주한 사람들은 황실 음악가중에서 은퇴한 가무녀들과 일부 은퇴한 궁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관은 여자들의 궁전과 같았다. 그리고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을 본떠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당시중에 "지유지영옥엽관, 전운재월조인한(知有持盈玉葉冠, 剪雲裁月照人寒)"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지영'은 바로 옥진공주의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옥엽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가지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얼마인지 계산하지 못했다(時人莫計其價)"고 한다. 청풍명월의 밤이 되면, 도관에는 맑은 악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가무녀들은 인공산수 속에서 신선세계를 공연했다. 옥진공주의 생활은 시집간 다른 공주들보다 훨씬 나았다. 거의 단신여왕같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당나라때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사람은 옥진공주 한 사람만이 아니다. 당고조때부터 당소종때까지 근 300년동안 이당황실에는 210명의 공주가 있는데, 그중에서 궁을 나와 여도사가 된 공주가 12명이나 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인 왕건은 <<당창관옥예화>>라는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관야멱향래처, 유견계전쇄옥명(女冠夜覓香來處, 唯見階前碎玉明)" 여관은 여황관(女黃冠)이라도 하고, 여관자(女冠子)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도사를 가리킨다. 당나라때 여관(女冠)은 수진여관(修眞女冠)과 궁관여관(宮觀女冠)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는 바로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당시 공주가 출궁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당나라때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나라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배경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사실, 당시 이들 도관에 들어간 공주들이 진정으로 머리를 깍고 출가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기르며 출가생활을 보냈다. 당나라때 공주가 도교에 입교하는 것은 당나라때 여러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고, 도교내부에 점진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련있다.

 

당고조, 당태종의 두 황제때에 공주로서 여도사가 된 기록은 없다. 당고종에 이르러 공주가 여도사가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도사가 된다는 것은 공주가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나라때 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원인을 따져보면, 도교가 보유한 종교적인 분위기도 있다. 사람들이 해탈을 얻고, 득도를 하려는 이상과 바램이 있는 것이다.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과 비구니가 되는 것은 당나라때 차이가 크다. 왜냐하면 도교에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도교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된다. 공주는 천자의 딸로서 고귀하고, 신분이 존귀하다. 공주가 도교를 택한다는 것은 민간에도 도교에 귀의하는 기풍을 불러왔다. 그러나 공주는 여도사가 되어서도 편안하게 생활하므로, 민간도사들이 힘들게 수련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당나라공주들의 도교귀의동기는 간단히 말해서, 도를 그리워한다든지, 복을 추구한다든지,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든지 남편이 죽은 후에 속세를 떠나고 싶어졌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나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에 귀의하려는 생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는 공주들이 적극적으로 여도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간에서도 많은 여자들이 앞다투어 여도사가 되고자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재녀 어현기(魚玄機)였다. 당나라때는 여권의식이 강했고, 일부 여자들은 시집을 가지 않고, 홀로 살면서, 자유롭게 애정생활을 즐기고자 했다. '여도사'는 아주 그럴듯한 신분이었다. '여도사'는 자유롭게 남자를 만날 수 있다. 마치 살롱의 여주인과 같이.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여도사'의 신분으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했다가 반년, 일년이 지난 후에 다시 시집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당연히 황실의 공주는 민간의 보통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특수한 신분의 여인이다. 무측천의 딸인 태평공주(太平公主)는 8살때 '외조모 양씨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궁중에 살았다. 16세가 되어서 토번의 혼인요구를 회피하기 위하여 비로소 정식으로 태평관(太平觀)으로 가서 관주가 된다. 혼사얘기가 끝난 후인 20살때 태평공주는 원하는 바대로 부마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다시 당예종의 옥진공주를 보자. 출궁이후 호화로운 옥진관에 살면서 자주 명인아사들을 불러모아 술마시고 놀았다.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아래 쓰러졌다. 공주가 비록 평생 결혼은 하지 않은 것같지만, 스캔들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당현종이 집권하자, 여동생인 옥진공주를 더욱 총애했다. 옥진공주는 자주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왕옥산등에 여러개의 도관을 가지고 있었고, 장안, 낙양등 대도시에도 별관, 산장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의 주위에는 방사와 문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이렇게 젊은 여도사가 행동도 자유로운데, 애정생활이 없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백, 왕유의 두 당나라 대시인도 옥진공주의 애정생활에 끼어든 적이 있었다.

 

당나라의 옥진공주가 선례를 보이자, 나중에 당현종, 당대종, 당덕종, 당순종, 당헌종, 당목종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공주가 여도사로 된다. 심지어 한 때는 4명의 공주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기도 한다. 이들 존귀한 미모의 황실여도사는 사실 수시로 환속하여 시집갈 수 있었다. 그녀들이 다른 사람의 처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속담에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따라한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때의 여도사는 거의 귀족의 기풍이 된다. 고관대작들의 딸 중에서도 적지 않이 여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때 대시인들은 이들 여도사들을 추켜세웠다. 이백은 일찌기 여도사 이등공(李騰空)을 위하여 시부사를 쓴 적이 있다. 이 이등공은 바로 재상 이임보(李林甫)의 딸이다. 그리고 초당사걸중 하나인 낙빈왕은 여도사 왕령비(王靈妃)를 도와 그녀의 애인에게 시를 써준 적이 있다. 민간에서는 여도사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어현기가 쓴, "이구무가보, 난득유정랑(易求無價寶, 難得有情郞)"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이 싯구는 정말 좋다. 그러나, 풍진의 여도사가 썼다니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 사대미녀중 하나인 양옥환(양귀비)도 개가하여 시아버지인 당현종에게 가기 전에 잠시 여도사를 지낸 적이 있다. 이를 보면 황실 여도사들은 여도사가 된 이후에도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그녀들의 혼인생활도 왕왕 황실의 체면이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시집간 이후에 공주들의 행위는 왕왕 남편집안에 의하여 제한된다. 고양공주, 양양공주, 태평공주, 곡국공주, 영가공주등등은 모두 애인들을 두었다. 이들의 애인과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사례가 있다. 예를 들어, 고양공주는 변기(辯機)와 절에서 오랫동안 정을 나누었고, 양양공주와 같은 경우는 애인의 모친에게 며느리로서의 예를 행하기도 했다.

 

당나라공주들이 여도사가 된 후의 궁관생활은 도관의 경제문제에 부닥친다. 옥진공주는 출가하겠다는 뜻이 아주 강했다. 그는 집도 필요없고, 조세도 원치 않으며, 공주칭호도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나, 출가한 공주들은 실제생활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특히 궁관여관들은 장식등도 많이 따지게 된다. 당나라공주들의 일상적인 수요도 있다. 특히 도관에서 재초(齋醮)를 지내야 한다. 방대한 행사에는 호화로운 도량이 필요하고, 옷을 차려입은 여악사가 필요하고, 이것들은 모두 상당한 고정경비를 요하는 것이다. 장수를 원하는 궁관여관이라면, 특히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양생성선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 궁관의 건조, 설비, 일상용품등 아무런 생산활동도 하지 않는 공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때에 조정에서 돈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궁관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공주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은 역대 왕조에서 자주 있었던 일이다. 당현종은 도교정책을 확립했는데,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신당서. 제공주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개원신제>>가 실려 있다: "장공주는 2천호에 봉하고...공주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역시 천호에 봉한다." 시집가지 않은 공주는 원래 아주 특수한 경우이다. 병이 심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이다. 그러나, 당나라황실에는 또 하나의 상황 즉 여도사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하에서 공주는 여전히 황실의 돈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궁관의 자금문제를 해결했다. 궁관여관은 체면을 잃지 않는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속세를 떠나서 산림에 은거하는 수진여관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당나라의 공주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상 자주권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이당왕조는 비록 관농일대에서 나타났지만, 선비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남녀관계에서, 중원의 명문대가처럼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원의 봉건왕조가 되다보니, 윤리도덕도 따져야 했다. 그러므로, 당나라의 황실공주로서 개방된 성생활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려면,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