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1898년에서 1905년까지, 무술변법을 전후하여, 각지방에서는 "자치운동"의 사조가 일어났다. 상해, 천진, 호남은 모두 여론준비를 하고, 풍계분, 유석홍, 탕진, 하계, 호예항, 엄복, 황준헌등이 '지방자치'를 제창하고, 대거 구미의 지방자치를 소개한다. 갑오년이전에는 순수하게 지식계몽이었지만, 무술년에는 '국민참정' '공민장권(公民掌權)'을 일정에 올린다; 신축이후에는 이를 실시한다.
제1단계: "공정국" 단계(1905.10 - 1909. 6)
현지 엘리트인 이종각(李鍾珏), 섭가당(葉佳棠)등은 조계(租界)가 잘 관리되는 것을 보고는 당시 소송태도(蘇松太道, 속칭 上海道)인 원수훈의 허가를 받아서 공정국을 설립한다. 공정국의 의사회(議事會), 참사회(參事會) 구성원 76명은 선당(善堂), 서원, 경무(警務) 및 상인의 투표로 구성되었다. 이는 상해의 상계, 학계의 자발조직으로 '지방엘리트권력의 제도화'이다. 허가받은 문서에 따르면, "모든 도로, 전등 및 성향내외경찰일체사무는 모두 선거로 뽑힌 지방인사들에 귀속된다" 구성된지 2년도 되지 않아서, 강을 메우고, 도로를 닦고, 수도시설을 하고, 일부 지역에 경찰을 두는 등 업적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소송태도에 새로 임명된 서징의 칭찬을 듣는다. 그는 총동(總董)인 이종각등에게 감탄하고, 참사회를 확대한다. 각 선당, 조학소, 남시상회, 북시상회, 지방자치연구회, 지방공익연구회, 동남성연합회, 서북성연합회가 각각 인원을 추천하며 참가한다. 광서32년 정월(1906. 2. 19) 성벽을 철거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의를 하게 되고, 의견충돌이 생긴다. 상해성은 명나라 가정연간에 쌓은 것으로 주위가 9리에 달하였다. 그리고 성안에 살고 있는 주민이 20만에 이르렀다. 공정국의 이종각, 욱회지등은 성벽을 철거하여 상업과 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호족인 조양등은 성벽을 철거하는데 반대했다(그들은 조계가 이 틈을 타서 지역을 확대하는 것을 방지하고, 도둑등을 막고자 했다). 철거반대파는 치안에 불리하다고 보았다. "성안은 땅이 넓고, 경찰병력이 준비되지 않았다. 조계처럼 병사와 함정이 엄밀하게 보위하지 않는다. 만일 성벽의 보호가 없다면, 간사한 적이 흑심을 품을 수 있으니, 후환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을 늘이고, 도로를 청결히 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쌍방은 소송태도, 강소순무, 양강총독에게 글을 올린다. 최종적으로 쌍방은 타협을 이룬다: 성문을 더 많이 만든다. 도로를 건설한다. 성벽은 보류한다.
제2단계: "자치공소(自治公所)"단계(1909.6 - 1911. 11)
<<성진향자치장정>>이 공포된 후, 선통원년(1909. 6. 16) 공정국은 스스로 '선거국'의 임무를 수행하여, 상해시민들의 선거를 통하여 '자치공소'로 변신한다. 주요한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전과 같은데, 이는 바로 청나라말기의 입헌신정의 궤도에 편입된 것이고, 자치를 추진하는 기구가 된 것이다.
제3단계: "상해시정청(上海市政廳)" 단계(1911. 11 - 1914. 3)
신해혁명이후, 호군도독부의 동의를 거쳐 상해시정청이 설립된다. 주요지도자들은 '자치공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1차의 '임시선거'와 2차의 '보통선거'를 거쳐 이종각이 시민정국 총장이 된다. 주요한 조치는 바로 상해의 이미 350년된 옛 성벽을 철거하는 것이다. 성벽자리에 도로를 만들고, 벽돌은 성안의 하도(河道)를 수리하는데 쓰고, 성안의 하수도를 쌓는데 쓴다.
이 3단계를 거치면서 모두 7회의 동사회, 의사회가 구성되었다. 대표성은 갈수록 공민화된다. 동사회구성원은 9명 내지 19명이었고, 의사회구성원은 33명 내지 58명이었다. 각 계층에서 나왔는데, 상인들이 위주였따. 1911년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당시 상해의 유명한 사업가들로는 축대춘, 주지요, 우흡경, 엄신후, 손다삼, 왕일정, 주보삼, 서윤, 증주, 심만운, 주개갑, 소본염, 우성 등의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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