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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상해 이야기

상해에서 청방(靑幇)은 어떻게 성공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8.

글: 진보기(秦寶琦)

 

청나라말기에 상해의 방회(幇會)는 이미 상당히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19세기중엽, 상해의 소도회(小刀會)의 난이 실패한 후, 천지회(天地會) 계통의 방회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이후 상해의 방회는 주로 청방(靑幇)과 홍방(紅幇, 哥老會)의 세력이었다. 처음에 상해로 온 청방은 주로 두 갈래이다: 한 갈래는 절강성 호주, 가흥과 항주에서 온 호주방(湖州幇)이고, 다른 한갈래는 진강, 양주와 소북의 운하의 연변에서 온 소북방(蘇北幇)이다. 소북방은 청나라말기에 세력이 아주 컸다. 청방이 변신을 한 것은 그 우두머리들의 변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중 핵심인물은 서보산(徐寶山)과 장인규(張仁奎)이다. 그들은 모두 소금밀매업자와 청방우두러리에서 시작하여 상류사회에 진입했다.

 

서보산(1866-1913)은 자가 회례(懷禮)이고, 단도 남문 사람이다. 1866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대나무를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그 본인도 대나무장인으로 지낸 바 있다. 15살때, 부친이 병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유리걸식했고 널리 친구를 사귀었따.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시원시원하며, 남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잘 도와주었다. 친구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비록 법망에 걸리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는 신체가 건장하고, 팔힘이 남달랐으며, 총을 잘 쏘았다. 두 손으로 함께 총을 쏠 수 있었으며, 백발백중이었따. 깜깜한 데서도 향불을 맞출 있어서, '신창수(神槍手)'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자,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처럼 무서워하여 그를 "서노호(徐老虎)"라고 불렀다.

 

청나라 광서19년(1893년), 그는 강도 선녀묘 강도사건에 가담한다. 이 사건이 터진 후에는 진강으로 숨어들어갔고, 보개산의 아래에 숨어살았다. 그러다가 단도현에서 붙잡혔다. 나중에 강도현에 이송하여 사건을 조사받은 후 감숙으로 유배보내어진다. 도중에 산동을 지났는데, 그는 역참의 말을 훔쳐타고 달아나 버렸다. 그는 관청의 추적을 피하여 강호로 들어갔고, 무장 소금밀매업에 종사한다. 이렇게 하여 청방에 가입한다. 그는 효괴(梟魁) 손칠(孫七)의 수하로 들어가서 중용된다. 당시에 백씨(柏氏)를 우두머리로 하는 염효(鹽梟)가 하나 있었는데, 손칠과는 원수지간이었다. 손칠은 힘이 부쳐서, 매번 양보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보산이 백씨의 두 아들이 여자 하나를 길에서 납치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화를 차지 못하고, 길에서 싸움을 벌이게 된다. 백씨일당은 소식을 듣고 달려오니 300명가량이 되었다. 그들이 서보산을 포위했다. 서보산은 중과부적이었는데, 마침 손칠이 무리를 이끌고 달려오게 된다. 서보산은 백씨의 두 아들을 칼로 베어버린다. 이 일로 인하여 서보산은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고, 그를 찾아와서 수하로 들어오는 자들이 끊임이 없었다. 서보산은 점차 십이우와 칠호구 일대를 옮긴다. 그곳에는 원래 주복승(朱福勝)을 우두머리로 하는 염호가 차지하고 있던 곳이었다. 주복승은 서보산이 온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공격을 하나 서보산에게 패배하여 도망가게 된다. 서보산은 자신의 근거지를 차지하였을 뿐아니라 수하의 청방분자들은 하나같이 흉맹하고 싸움을 잘 하는 자들이었다. 관병들도 그들을 무서워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관병들도 그들을 만나면 저지하거나 체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실제로 밀매업자와 단속관원은 왕왕 서로 결탁해서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먼저 방회에서 사람을 보내여 단독관원의 두목과 서로 협의를 마친 후에 대규모 소금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면, 단속반원들은 밖으로 순찰을 나간다. 그리하여 소금배는 드러내놓고 소금을 내려놓는다. 다 끝나고 나면 순찰나갔던 관병들이 돌아와서 소금배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고, 소금배에서는 일부러 저항하는 척하면서 약간의 소금포대를 떨어뜨리고는 떠나버린다. 그러면 단독관원의 두목은 이것을 상부에 보고하여 상을 받는다. 서보산은 사람도 많고 세력도 큰데다가 이런 단속반원들과의 결탁에도 능했다. 그리하여 소금밀매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삼강구, 양마, 대교, 칠호, 심이우등지를 오가면서 위로는 대통, 무호, 한구, 강서, 아래로는 강음등지에까지 장강천여리에 세력을 뻗쳤다. 당시에 그의 소금밀매선이 약700척이 있었다. 서보산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잘 알았다. 그리하여 매번 소금을 밀매할 때면 배 1척당 2포대 또는 4포대를 따로 남겨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데 썼다. 매년 겨울이 되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홍수나 가뭄을 만나면, 쌀과 밀가루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서보산은 현지에서 영향력이 아주 컸고, 그에게 의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의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고, 염성일대에서는 무수재, 감생인 양서문, 마옥인등도 서보산의 문하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회하양안에서 장강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그의 세력범위가 되었따. 이외에 이들 소금밀매꾼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왔으므로, 농번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는 다시 모여서 소금밀매를 하곤 했다. 평소에는 관병들의 숫자가 적으면 대항하다가 관병의 숫자가 많아지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이합집산이 잦은 무리로는 오랫동안 유지하기 힘들었다.

 

서보산은 단순히 소금밀매업에만 의존하여서는 큰 일을 이루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주(泰州)성내에 홍문(洪門) 두령 임춘산(任春山)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리하여 심복을 데리고, 태주로 가서 임춘산과 교분을 맺는다. 임춘산은 호북 황피사람이며, 홍문이 두령이었다. 현지에서는 산명측자(算命測字)를 생업으로 삼았다. 서보산은 그와 성이 다른 결의형제가 되고, 임춘산은 서보산을 홍문에 가입하도록 소개해준다. 그리고 서보산은 임춘산을 청방에 가입하도록 소개시켜준다. 두 사람은 서로 합쳐서 홍문산당을 열기로 한다. 그리하여 1899년 칠호구에서 산당을 여는데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춘보산(春寶山)"이라고 한다. 결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황문상, 왕해풍, 이상, 주의초, 조춘정, 신표, 이패, 장노팔등이 있다. 서보산과 임춘산이 공동으로 산주가 된다. 이렇게 하여 서보산은 청방의 흥무사방(興武泗幇)의 대자배(大字輩, 일설에는 禮字輩)의 두령이면서, 가노회의 산주가 된다. 이렇게 하여 청방과 홍방을 합치려는 목적을 달성한다. 새로 설립된 산당은 '홍방(紅幇)'이라고도 불렀다. 나주에 청홍양방이 합하여진 방회이므로 '청홍방(靑紅幇)'이라고도 불렀다.

 

서보산의 일당은 무장을 뒷배경으로 하여 소금밀매에 종사했고, 고액의 이윤을 챙겼다. 세력도 빨리 커졌으며, 천여리의 장강에 소금밀매선을 700척이나 보유하게 된다. 동남지역의 관청에서는 서보산의 활동에 두려움을 느꼈다. 양강총독 유곤일은 부귀공명을 가지고 서보산을 유혹한다. 그리하여 서보산은 관청에 투항한 뒤 청나라당국을 도와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청나라정부가 방파세력을 탄압하는 도구가 된다. 서보산은 비록 청방의 대자배이지만, 청나라조정에 투신한 후, 다시 본문의 형제들을 제거했다. 그리하여, 청방에서는 엄격한 율법을 하나 제정하게 되는데 바로 "'춘'자를 꺼내면 눈을 파내고, '보'자를 꺼내면 혓바닥을 자른다"는 것이었다. 서보산과 그 일파는 모조리 방에서 축출당한다. 누구든지 춘보산을 들먹이며 행세를 하려고 하면 눈을 파내거나 혀를 잘라버렸따.

 

신해혁명전날, 서보산은 지방치안을 유지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지방당국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양강총독 장인준은 혁명을 방지하기 위하여, 병마를 모집하여 군대를 편성한다. 오래지 않아. 서보산은 순방영통령이 되어 강북의 방어업무를 책임지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지방무장세력이 되어 한 지방을 차지한다. 신해혁명기간동안, 서보산의 혁명형세가 급전직하하는 것을 보고, 혁명당사람들의 영향하에, 혁명당의 편으로 기울어진다. 진강이 광복된 후,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양주도 즉시 들썩이기 시작한다. 그날 밤 손천생은 정자영의 일부사병의 의거를 주도하고 광복을 선언한다. 서보산은 곧이어 결사대를 조직하여 밤에 강을 건넌다. 그리고는 손천생의 의거를 피로 씻는다. 이리하여 그는 양구군정분부도독이라는 자리에 오른다.

 

원세개가 정권을 훔쳐간 후, 서보산은 다시 원세개에 투신한다. 원세개로부터 25만위안의 돈을 받는다. 그는 원세개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북경에 인질로 보낸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원세개를 추종한다. 서보산은 골동품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도자기를 좋아했다. 1913년 봄, 호군도독 진기미는 골동품 자기화병으로 유혹하여, 폭탄을 나무상자속에 넣어서 골동품처럼 위장하고 그를 폭사시킨다.

 

장인규(1859-1944)는 호가 경호(鏡湖)이고, 산동 등현 사람이다. 청방 흥무육방의 대자배이다. 그도 소금밀매업자 출신이고, 일찌기 염효 서보산을 따라 강호를 떠돌았다. 나중에 청나라군대에 가입하고, 서보산의 부대에 예속된다. 그리하여 그는 서보산의 수하의 중요장군이 된다. 서보산이 죽은 후, 그의 부하는 장인규가 넘겨받는다. 그의 부하는 대부분 청방에 가입한다. 그는 남통에 온 후에 향당을 개설하여 제자들을 널리 모집한다. 남통의 경찰쪽에도 이미 청방이 삼투해들어가 있었다. 이때, 경찰쪽의 청방분자들도 대거 발전을 거듭하여, 현공서의 설금인은 청방의 대자배이고, 현경찰대대 부관 유지직, 중대장 고봉성, 현공안국 독찰원 진곤산 등이 청방의 통자배였다. 이들은 각각 향당을 개설하여 제자를 끌어모았다.

 

"2차혁명"후, 북양군벌 풍국장은 장인규의 강북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의 부대를 편입시킨다. 직계군벌 이순, 제섭원이 그를 발탁하여, 그로 하여금 강소의 제76혼성여단 여단장 겸 통해진수사, 주방강소남통의 직위를 맡긴다. 그리고 육군상장의 계급를 부여한다. 장인규는 남통에서 저명한 기업가인 장건을 스승으로 모시고, 매일 장건의 '호남별업'으로 가서 문안인사를 하고, 제자의 예를 다했다. 장건은 그를 상빈으로 대접했다. 그는 남통에서 적지 않은 명사들을 사귀고, 많은 재물을 모았다. 부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비밀리에 돈을 산동의 고향으로 보내어 많은 부동산을 매입했다.

 

제1차강절전쟁때(직계의 제섭원과 환계의 노영상이 상해의 서쪽에서 전투를 벌임), 장인규는 제섭원의 명을 받아, 남통에서 전선으로 증원을 갔다. 가정, 남상 일대에 주둔하였다. 그의 부하인 궁방택은 노영상의 부하인 하풍림의 공격을 받아서,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긴급상황하에서 장인규는 부대를 이끌고 당도하여, 마침내 자리를 안정되게 잡게 된다. 1927년 북벌군이 절강에 도착하고, 장인규는 북벌군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수하인 조만순의 부대는 이 기회를 틈타서 남통에서 병변을 일으켜, 상점을 약탈한다. 장인규는 친히 나서서 탄압하고, 병변에 참가했던 친조카까지 죽인다. 북벌군이 절강, 상해에 주둔한 후, 장인규는 비록 국민당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거리끼는 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서보산의 옛부하인데, 서보산은 신해혁명후에 적지 않은 혁명당사람들을 죽였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후 장인규는 군계에서 물러나 상해에 거주한다.

 

그는 상해에서 향당을 열고, 널리 제자를 모집한다. 일부 상류사회의 명사들도 이 기회에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예를 들어, 대화윤선공사의 매판 주소죽, 상해은행 매판이며 대업공사 총경리인 이동촌, 상해은행분행경리인 서이강, 상해전화공사 총공정사인 화모, 중국여행사 총경리인 진향도등이 그들이다. 많은 관료들도 장인규를 스승으로 모시며 청방에 가입했다. 당시 교제철로관리위원회 위원자인 갈광정은 장인규를 스승으로 모셨을 뿐아니라, 산동성 주석인 한복거도 장인규에게 추천하여, 장인규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엿따. 이외에 장정문, 주소량, 중앙조페공장의 공장장인 위경주, 강소인화연주세국국장인 성승이, 그리고 소북해문경찰국국장 진초균등이 모두 장인규의 제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모두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고, 깡패나부랭이는 없었다.

 

장인규는 상해에서 청방 대자배의 우두머리로서 명망이 있었다. 여러 제자들은 그의 방파를 빛나게 했다. 최석린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중국청방에서 가장 명망있는 두령이었다. 전국각성,시에 모두 그의 제자들이 있었고, 일부 성장, 군단장, 사단장도 있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이들 군단장, 사단장은 청방에 가입한 후 그를 처음 만날 때, "일궤삼고수(一三叩首)"의 절을 하였다. 장인규가 한번은 상해의 집안에 향당을 개설하고 제자를 받았는데, 많은 다른 성의 군계, 정계의 요인들이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장정문, 한복거, 진명추, 황기상, 손동선등도 모두 대표를 파견하여 참가하였다. 이때 향당을 개설한 저녁만찬에서, 어떤 사람이 장인규의 제자들을 사단의 형식으로 조직하자고 제안하고, "인사구락부(仁社俱樂部)"라고 하기로 한다. 나중에 준비위원회가 설립되어, 상해시장 오철성이 장인규의 제자였기 때문에, 금방 상해시사회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낸다. 장인규는 전국에 3만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중요한 사람만 3,4천명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사회저명인사도 많았다. 그리하여 1920-30년대에 장인규는 이미 소금밀매업자에서 상류사회로의 변신에 성공한 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