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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주검위리(鑄劍爲犁):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by 중은우시 2009. 10. 9.

글: 오악산인(五岳散人)

 

중국은 고대문명국가이다. 한 나라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가졌는지 여부를 형량할 때, 야금기술은 중요한 참고요건이 된다. 청동기는 중국에서 일찌감치 발달했다. 비록 서아시아에서 청동기기술이 전래되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청동기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확실히 다른 나라들이 따라오기 힘들 정도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이후, 귀금속의 야연(冶煉)과 가공공법은 일류라고 할만했다. 도금(金), 조각, 상감등의 공법은 점점 정교해졌다.

 

그러나, 실용도구에 있어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병기의 제조공법은 문명을 형량하는 기준중의 하나였다. 세계에는 삼대명검이 있다. 즉, 다마스커스검, 말레이 크리스(Kris), 일본도가 그것이다. 중국도검은 끼어들지 못한다. 그중 다마스커스검은 서아시아에서 나왔고, 말레이 크리스는 남아시아에서 나왔다. 일본도는 실제로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로부터 배워간 것이다. 현재도 일본에서 국보로 모시는 수대도(隋大刀), 당대도(唐大刀)는 바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한 것들이다. 그러나, 당나라말기에 이르러 벌써, 시인은 일본도가 날카롭다고 찬송하기 시작한다.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일본도가 이미 중요한 교역물품으로 등장한다. 왜구는 단조를 통해 날카로운 일본도를 들고 횡행하기 시작한다. 원래의 전투력도 뛰어나지만, 병기의 우세도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왜구와 싸우던 장수들은 모두 이런 느낌을 받았다. 명나라병사들이 보유한 병기가 일본도와 부닥치면 왕왕 부러지곤 했다.

 

중국이 자고이래로 예의지국이어서, 훌륭한 병기를 개발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사실은 아니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외부유목민족의 침입이든 내부의 반란이든, 시종 통치자를 고민케한 난제였다. 실제로 한나라때에는 중국에서 철기단조기술이 세계최일류수준이었다. 당시에 한나라 병사 1명은 흉노 병사 5명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병기가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환수직도(環手直刀)중에서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것이 있다. 다시 갈아보면, 단조기법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다. 후세의 중국도검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이다. 2천년이나 흘렀지만, 아직도 탄성이 있고, 날카롭기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송나라에 이르러, 병기의 종류는 역대병기들중 가장 다양했지만, 그 품질은 주변의 소수민족정권들보다 떨어지게 된다. 서하왕조는 서역에서 다마스커스강도를 수입했다. 그 날카로움은 송나라병사들이 사용하는 박도(朴刀)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중국전설로 전해지는 것중에 빈철(鐵)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전문가는 사실 그것이 바로 다마스커스강철이라고 고증했다. 당시에 수입한 것이 아니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강철야연기술의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뀐 궤적은 깊이 연구해볼만 할 것이다.

 

진나라의 짧았던 천하통일로부터, 통치자들은 병기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진시황은 천하통일후, 바로 착수한 일이 천하의 병기를 끌어모아서 이를 녹여 동인(銅人)으로 만든 것이었다. 취사도구에 대하여도 통제가 엄격해서 거의 변태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에 5가구에 식칼 1개를 인정했다. 후세의 원나라는 더욱 심했다. 10가구에 식칼 1개를 두었는데, 몽골인 한 명이 보관했다. 그리고, 그 10가구의 사람들이 그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청나라에 이르러, 민간에서 특수인사들은 칼을 차고 다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표사, 사냥꾼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상대대로 "궁마득천하(弓馬得天下)"의 교훈이 있었다. 당시로서 살상력이 가장 뛰어난 궁노(弓弩)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통제했다. 일반사람들은 어느 정도 힘이상의 활에 대하여는 소지를 금지했다. 사냥꾼들이 사냥용활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일정 한도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병기의 단조공법은 당연히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될 수밖에 없다. 결국 수천년의 문명국이면서 아주 일찌감치 철기를 사용한 나라가 세계명검을 배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과거에 반란을 일으키려면 무기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민간에는 '식칼 두 개만 있으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속담도 있다. 역대통치자들의 무기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이러했다: 민간에서는 보유해서는 안된다. 관청에서는 무기가 될 수 있는 여하한 도구도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내의 우세를 점하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 말의 뜻은 결국 관군의 장비의 수준은 일반백성들의 반란을 진압할 정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전투에 전문가라고 하는 것도 반드시 맞는 말은 아니지만, 외국과의 전투에서는 아마추어였다는 것은 확실히 거짓이 아니다. 한나라때의 병기는 1:5로 상대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왜구와는 1:1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역대통치자들이 민간의 무기를 제한한 일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민간에서 무기보유를 제한하게 됨에 따라, 극단적인 경우에는 민간의 생활, 생산도구마저도 모자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많은 통치자들이 입에 잘 올리는 말이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든다. 이것은 왕왕 태평성세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바램이 과연 무엇에 대한 바램인지, 누구의 바램인지는 말하기 힘들다. 백성들이야 당연히 태평성세를 원한다. 다만 이러한 태평성세에 대한 바램은 통치자들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통치자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는 자주 백성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농업도구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에게 경작하게 하는 동시에 반항하는 도구를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같은 속담이, 양쪽에서는 서로 다르게 들린다. 그러나, 보습을 다시 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