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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 사후의 2가지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9. 7. 29.

글: 유계흥(劉繼興)

 

1915년 12월,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군주제 회복을 선포하고, 중화제국을 건립하며, 연호를 홍헌(洪憲)이라 한다. 총통부는 신화궁으로 명칭이 바뀐다. 다만,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것은 시대를 역행한 조치이고, 거국적인 반대에 부닥친다. 손중산, 양계초등이 격렬하게 황제제도의 부활을 반대하였을 뿐아니라, 북양군벌의 장군인 단기서, 풍국장등도 불만이 컸다. 단기서는 심지어 원세개에게 전보를 보내어, "국회를 회복시키고 퇴위하여 스스로를 온전히 보전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제국주의 열강들도 원세개의 황제즉위에 대하여 경고와 항의를 계속했다.

 

12월 25일, 채악, 당계요등이 운남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호국전쟁을 시작하여 원세개를 토벌하자고 한다. 귀주, 광서가 연이어 이에 호응한다. 이어서 각성들도 연이어 독립을 선포한다. 북양군벌 내부에서도 위기가 사방에 잠복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한마디만 하면 북양군벌 내에서 찍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두 떠나버리고 혼자만 남은 형국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 황제제도의 취소를 선포한다(황제에 즉위한지 83일만이다. 역사상 "83일간의 황제몽"이라고 칭한다) 그리하여 중화민국이 부활한다. 단기서를 국무경 겸 육군총장으로 삼아 북양군벌을 단합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계속하여 대총통에 남아있고자 한다. 그러나 의거를 일으킨 각 성에서는 그가 계속 총통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단기서도 그를 핍박하여 군정의 실권을 내놓게 한다.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이 속속 전통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하거나 원세개와의 개인관계를 단절했다. 5월하순, 원세개는 우울증과 분노로 병이 든다. 원세개는 사면초가의 곤경에 빠진다. 계속 대총통의 지위에 있을 수도 없고, 심리적인 타격으로 가족에게 유전되는 당뇨병이 발발한다. 그리하여 1916년 6월 6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향년 57세였다. 그가 죽은 후에 2가지 수수께끼가 남는다.

 

첫째, 원세개는 왜 안양(安陽)에 안장되었는가?

 

원세개가 죽은지 2개월여가 지난 1916년 8월 24일, 정식으로 하남 안양에 안장된다.

 

안양은 역사가 유구하고 문화가 뛰어난 고장이다. "7대고도"의 하나일 뿐아니라, 저명한 세계적 문화유산인 은허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한자의 고장이며, 갑골문의 고향이고, <<주역>>의 탄생지이고, 상고시대 전욱과 제곡의 능이 소재하는 곳이다. 수당의 와강채의거가 일어났고, 악비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근대의 저명한 홍기거(紅旗渠)정신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세개의 고향은 하남성 동남부의 항성(項城)이다(항성에는 지금까지도 248칸의 원세개고택을 보존하고 있으며, 청나라궁정건축의 풍격을 지닌 '원세개행궁'도 남아 있다). 왜 하남성의 최북부에 있는 안양에 묻혔을까?

 

이에 대하여, 원새개는 생전에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근대사학자들도 여러가지 주장이 있어, 의견이 통일되지 못한다.

 

현존하는 문헌으로 보면, 원세개가 은거한 1910년 겨울, 그는 자신의 묘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어디인지는 명확히 얘기하지 않았다. 1911년 6월 그는 단방(端方)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형(원세개)은 쇠약하여 병이 날로 심해지며, 곧 움직이기 힘들 것같다. 영면할 곳을 작년 겨울에 이미 한 곳 얻었다"고 적었다. 원세개의 아들인 원극정(袁克定)의 기술에 따르면, 원세개가 스스로 선택한 묘지는 태행산(太行山)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예전에 선부가 원(洹)에 거주할 때, 일찌기 묘혈을 선택한 바 있다. 태행산 속에 있으며, 높고 넓게 트인 곳이어서 영면할 만한 곳이다" 원씨의 후손들이 어디에 안장할 것인지를 논의할 때 원극문(袁克文)은 부친의 생전 뜻에 따라 처리하자고 했다. 그러나, 장남인 원극정이 결연히 반대하여, 창덕부 원상촌의 곁에 안장하기로 결정한다.

 

사실, 원세개 사후에 고향인 항성으로 돌아가서 묻히지 못한 원인은 그의 신세내력과 관련이 있다.

 

1859년(청나라 함풍9년), 원세개는 하남성 항성현 원채(袁寨)에서 태어난다. 그들의 집은 "보(保), 세(世), 극(克), 가(家)"로 배분이 내려갔다. 부친인 원보중(袁保中)은 8명의 자녀를 두는데, 장남 원세창(袁世昌), 차남 원세돈(袁世敦)과 두 딸은 원부인의 소생이다. 나머지 4명의 아들은 모두 서출이다. 원세개는 넷째이고, 7살때 숙부인 원보경(袁保慶)의 양자로 간다.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있을 때, 그의 모친인 유씨가 천진에서 병사한다. 영구를 항성으로 모시고 간 후에, 원세개의 동부이모 형인 원세돈은 적자의 자격으로 집안 일을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유씨가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문으로 관이 나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그리고 영구를 조상묘의 정혈(正穴)에 원보중과 합장할 수 없다고 우겼다. 원세개가 권세가 있었지만, 윤리강상때문에 형과 싸우지도 못하였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애원까지 했지만, 형인 원세돈은 동의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원세개는 별도로 묘지를 사서, 모친을 안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형인 원세돈과는 원수지간이 된다. 화가난 그는 형과 절교하고, 이때 이후로는 항성의 고향집을 찾지 않는다.

 

안양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당시에는 창덕(彰德)이라고 불리웠다. 원세개가 관료생활을 할 때, 이곳은 풍수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이곳에서 세계를 향하여 자신의 군사실력을 과시한 바 있었다. 당시는 군사력으로 발언권을 가지는 시대였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청나라조정의 제일인자였다.

 

소년시대에 놀기를 좋아했던 원세개는 일찌감치 과거에서 여러차례 낙방한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간 후에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의 정치생활의 전환점은 청일전쟁후에 천진의 소참에서 군대를 훈련시키 것이었다. 이후로 그는 수직상승하여, 무술변법의 다음해에 산동순무가 된다. 나중에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어, 청나라조정의 권력중추에 진입한다.

 

1905, 1906년 북양육군은 연속하여 2년동안 대규모의 군사모의훈련을 한다. 그중 1906년 9월의 군사모의훈련이 창덕(즉, 안양)에서 행해졌다. 원세개는 열병대신이었다. 이번 모의훈련에서 직예 양호등 성의 육군들이 실전연습을 하였고, 엄선하여 연습에 참가한 북양관병이 4만명이었다. 그리고 각국의 주중국대사관의 관리들과 기자 500여명도 참가했다. 이는 청일전쟁이후 북양군대가 가장 대규모로 그 위력을 보인 사건이었다. 이는 원세개가 자신의 실력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후로 조야 및 외국세력들은 그를 대청의 지주로 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안양에 대하여 깊은 감정이 있었고, 이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항성에 대하여보다 훨신 깊었다.

 

하늘의 풍운은 예측하기 힘들다.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연이어 세상을 떠난다. 원세개와 갈등이 있던 순친왕 재풍이 섭정을 한다. 원세개에게는 액운이 도래한 것이다. 섭정왕 재풍은 유지를 내려, 원세개의 모든 직위를 면직시키고, 원세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한다. 원세개는 형과 싸운 이후에는 당시 창덕으로 부르던 안양을 고향으로 삼았다.

 

원세개가 어렸을 때, 안양에 원상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상나라때 명상 이윤(伊尹)이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아서, 원상촌에 3년간 은거했다가, 나중에 상왕이 친히 원상촌으로 가서 그를 맞이하여 복직시켰다. 안양은 원세개의 먼 조상인 한나라 대장군 원소(袁紹)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원세개는 원상촌이 자신에게는 상서로운 길지라고 생각했다. 소참에서 병력을 훈련시킬 때, 그는 이곳의 200여무의 땅을 사들인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안양 원상촌은 하남과 직예의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경성에서도 멀지 않다. 이곳에 은거하여 낚시질을 하는 것은 천하의 동태를 살피는데도 편리했다.

 

그래서, 원세개의 사후에,그가 열병을 받기도 하고 은거하기도 했던 안양에 안장한 것이다.

 

원세개의 묘는 왜 "능(陵)"이라 부르지 않고 "림(林)"이라 부르는가?

 

원세개의 묘원은 안양시 북부교외인 원수(洹水) 북안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안양박물관의 터이다. 원세개의 묘를 만들 때는 2년의 시간을 들여서 완성했다. "점유면적이 138무 9푼 8리 8호 6사 9홀이며, 지출금액이 은원 73만2천7백5십4원1각9푼1리이다" 이들 숫자는 모두 "원공림묘공보고"의 목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묘는 1916년 6월 원세개의 사후에 짓기 시작하여, 1918년 6월에 준공된다. 당시의 하남성장인 전문렬(田文烈)이 건설을 책임지고 감독했다. 묘비에는 "대총통원공세개지묘(大總統袁公世凱之墓)"라고 새겼다. 이 글은 원세개의 친구이면서 당시 민국총통을 맡고 있던 서세창(徐世昌)이 쓴 것이다.

 

사용된 70만은원중에서, 북양정부가 50만은원을 내놓고, 나머지는 원세개의 북양군벌의 개인들이 기부한 것이다. 많이 낸 사람은 1만위안을 내고, 적게 낸 사람도 2천, 3천위안 이하는 없었다.

 

원세개의 묘원은 원림(袁林)으로 불리운다. 원림의 설계자는 독일의 엔지니어이다. 그의 건축은 "명나라황제릉을 본뜨되 약간 적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체건축은 남에서 북으로 차례대로, 조벽(照壁), 조석교, 청백석교, 패루문, 망주, 석상생, 비정, 동서치방, 당원대문, 대단계, 동서배전, 경인당, 묘대이다. 원림 건축의 전체적인 설계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중국의 능묘건축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 특색은 "중서합벽(中西合璧)"이라는 점이다. 반식민지반봉건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준다. 당원이전의 부분은 명청의 능침풍격이고, 뒤의 묘부분은 서양능침의 건축풍격이다.

 

그렇다면, 원세개의 묘는 왜 "릉"이라 부르지 않고, "림"이라 부르는가?

 

원세개는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황제"에 올랐다. 이는 명부정(名不正) 언불순(言不順)한 일이었다. 결국 사면초가에 몰려 60세도 되지 않아서 죽고 만다. 원세개의 장남인 원극정은 처음에는 역대제왕을 본떠서 자신의 부친의 묘를 "원릉"이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세창은 명확한 반대입장을 표한다. 그는 "항성(원세개)은 생전에 황제를 칭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대권을 장악한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홍헌 연호를 취소했다. 만일 원릉이라는 명칭을 취한다면 타당하지 않다. "림(林)"이 "릉(陵)"과 발음이 비슷하다. <<설문해자>>에서도 릉과 림의 두 글자는 서로 바꿔서 쓸 수가 있다. 그러니, 릉이라는 이름을 피하지만, 릉의 실질을 가질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서세창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그리하여 "원릉"이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원림"이라고 하게 된다.

 

서세창은 역시 원세개의 생전 막역지교이며, 부끄럼없는 학자형 정객이다. 그의 건의는 원세개로 하여금 구천에서도 웃음을 띄게 만들 것이다. 자고로 제왕의 묘는 능(陵)이고, 성현의 묘는 림(林)이다. 원세개의 묘는 "공림(孔林, 공자의 묘)"와 "관림(關林, 관우의 묘)"을 본떠서 "원림"으로 지었으니, 이것은 그를 아주 높여준 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