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돌론노르회맹에 대한 두가지 시각

by 중은우시 2007. 4. 24.

글: 후양방(侯楊方)

 

1691년 강희제는 카르카몽고(지금의 몽골공화국)의 수령들과 돌론노르(Dolon Nor, 지금의 내몽고에 위치)에서 회맹(會盟)을 가졌다. 이 돌론노르회맹은 외몽고(몽골공화국)이 청나라제국의 판도에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써 2천년간 지속되던 몽골고원의 중원에 대한 위협이 소멸되었다.

 

카르카몽고는 투세투칸(土謝圖汗), 체첸칸(車臣汗), 차사크투한(札薩克圖汗)의 세 부로 나뉘어졌다. 1688년에 투세투칸은 차사크투한을 포로로 붙잡아 죽여버렸고, 준가르몽고는 보슈크투칸(博碩克圖汗)의 인도하에 카르카몽고로 진격했다. 수십만의 카르카인들은 청나라의 경내인 내몽고로 도망쳐 왔고, 몽고족의 최고종교지도자인 철복존단파(哲卜尊丹巴)가 이끌고 청나라정부에 보호를 요청했다. 1690년 청나라군대는 우란부통(烏蘭布通)에서 내몽고에 들어온 준가르군대를 물리쳤으며, 강희제는 다음 해에 회맹을 개최하여, 카르카몽고의 귀순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돌론노르회맹은 청나라 공식기록인 <<성조인황제실록>>(이하 "실록"이라 함)에 나올 뿐아니라, 동시에 수행했던 프랑스전도사인 장성(張誠,, 르비용 신부)의 일기에도 나온다. 이 두 개의 기록을 대조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1691년 5월 9일, 여명에 강희제는 북경을 떠난다. 18일만에 회맹지점인 돌론노르에 도착한다. <<실록>>의 기재는 수입지출장부와 같다. 즉, 며칠에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는 기록 뿐이다. 예를 들면, 여행첫날은 "정묘. 우란산에 주둔하다"와 같다. 그러나, 장성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밤에 강희제는 장성으로부터 <<실용기하학>>을 배웠고, 그리고 몇 가지 증명문제를 풀었다. 둘째날 밤에 강희황제는 장성에게 별의 운행에 대하여 물었을 뿐아니라, 십여개의 삼각문제도 풀었다. 13일에 고북구(古北口)에 도착했고, 강희제는 800여명의 주둔군을 검열했으며, 프랑스군과 비교할 때 어떤지를 물어보았다. 장성은 이런 보병으로는 프랑스기병 100명도 당해내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강희제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이날 밤, 강희제는 다시 장성에게 북극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것과 나침반각도의 편차문제를 물어보았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고북구에 있었으며, 장성은 반원측량기구를 이용하여 태양자오선의 높이를 측량했으며, 이는 강희제의 큰 관심을 끌었다. <<실록>>에는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한 마디 적었을 뿐이다. "황상이 고북구에 머물다. 병관 채원의 수하관병을 검열하였고, 채원에게 옷 한벌, 은 오백냥, 말 한필을 내렸고, 관병에게는 은량을 내렸다. 고북구를 나서면 바로 새외(塞外)이다. 강희제의 호기는 다시 일었고, 매일 사냥을 했다. 장성의 관찰에 의하면, 강희제는 끈으로 묶지도 않고, 빠른 말을 타고 산간과 임야를 달렸으며, 활을 쏘아 사냥을 하는데, 기술이 아주 뛰어났고, 대량의 고라니, 사슴, 호랑이, 표범을 사살했다. 장성은 강희가 아주 뛰어난 활잡이로 생각했다. 좌우로 활을 쏘았으며, 궁정의 시위들중에서 그에 버금가는 자가 없었다. 그는 쉬지않고 추격하며 사냥했으며, 매일 8마리 내지 14마리의 말들이 힘들어 쓰러지곤 했다. 시간과 장소 이외에 <<실록>>에는 이 뛰어난 사냥기록에 대하여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다.

 

5월 27일, 강희는 돌론노르초원에 도착한다. 장성은 반원기구를 이용하여 숙영지의 위치를 확정한다. 강희의 노란천막의 바깥에 팔기병의 영장이 있다. 28일 저녁, 강희제는 군대를 검열하고, 29일 정식으로 회맹을 맺는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거대한 황색 장봉(帳蓬)을 마련한다. 강희제는 먼저 카르카몽고의 가장 중요한 수령인 대라마 철복존단파와 그의 동생인 투세투칸을 접견한다. 강희는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도록 배려했고, 친히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 후에 투세투칸에게 인장과 증서를 내렸다. <<실록>>에는 그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고 적으면서, 그들이 강희제가 그들이 차사크투칸을 살해한 죄행을 용서하고 그들을 구해내준 크나큰 은덕에 감사한다고 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을 회견한 후, 강희제는 다른 카르카몽고의 수령들로부터 삼궤구고(三九叩)의 예를 받았다. 이로써 카르카몽고는 정식으로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투세투칸과 라마들은 그저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실록>>은 이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예의가 끝난 후, 연회를 베풀었다. 사람수가 너무 많고 자리는 부족하여, 적지 않은 카르카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땅바닥에 앉아야 했다. 강희제는 하나하나 카르카의 중요한 수령을 접견하고, 그들의 이름, 나이를 물어보았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연회에서는 잡기를 공연하였는데, 카르카인들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단지 철목존단파 한 사람만이 장중한 풍도를 유지했다. <<실록>>은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음 날, 강희제는 다시 모든 수령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잡기를 구경했으며, 그들을 각각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등의 작위에 봉했으며, 예복과 재물을 내렸다. 연회는 세시간 반정도 지속되었고, 강희와 그들은 친밀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옆에 앉은 철복존단파와 가장 많이 얘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강희제가 몽고어에 능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1일, 강희제는 갑옷을 입고 군대를 검열했고, 그 후에 카르카의 수령들과 높은 곳에 앉아서 군사연습을 구경했다. 군대는 질서정연하게 호각을 불고, 조총을 함께 쏘고, 고함을 치며 전쟁했는데, 목소리가 산곡을 진동했다. 카르카의 투세투칸과 귀족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도망치고싶어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실록>>과 장성의 기록이 아주 일치한다. 강희는 이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무서울 것이 뭐가 있느냐" 투세투칸은 "황제의 군대는 위엄이 있어서 무서워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일문일답으로 강희제의 군사연습목적은 완전히 달성했다. 그 후에 강희제는 튼튼한 활을 하나 골랐는데, 카르카의 수령들은 아무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그 후에 강희제는 이 활로 연속하여 10개 내지 12개의 화살을 쏘았고, 그 중에 3,4차례 과녁에 명중하였다. 이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궁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에는 사격, 잡기, 말경주, 씨름, 가무공연이 이어졌다. 강희제는 친히 카르카의 숙영지로 시찰가서, 재물과 소말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계속 그의 곁을 따르던 장성으로 하여금 이번에는 따르지 못하게 하였다. 장성은 이것이 강희제가 카르카인들이 도망다니는 와중의 낭패한 형세를 보여주지 않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 6월 3일, 강희제는 북경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돌론노르를 떠났다. 내몽고의 49기(旗)의 수령들은 길의 왼쪽에 무릎을 꿇고, 카르카몽고의 수령들은 길의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그를 환송했다. <<실록>>의 기재에 의하면 카르카의 수령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날 밤, 강희제는 주위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진나라가 흙과 돌로써 장성을 축조하였는데, 우리황조는 카르카에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북방을 방비하게 하니, 장성보다 훨씬 견고하다" 이는 바로 강희제가 왜 카르카몽고를 포용하였는지의 근본이유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신하들의 장성을 수리하자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귀경길도 마찬가지로 사냥의 길이었다. 전과는 갈때보다 더욱 휘황했따. 6월 11일 석갑성(石匣城)에 도착했다. 강희는 수로로 바꾸어 갔다. 13일에는 통주에 도착하고, 강희제는 강가에서 식사를 했다. 몇몇의 아이들이 멀리서 보고 있었다. 강희제는 그들을 오라고 하여 같이 밥을 먹었다. 이 아이들은 돌아가더니 다시 돌아왔고,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강희제는 부하들에게 음식을 바구니에 가득 채워서 보내다라고 지시했다. 여름의 열기를 피하기 위하여, 강희는 14일 새벽 1점에 출발하였고, 5점반에 북경에 도착했다. 황태자는 성밖까지 영접을 나왔다. 이런 내용은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저 시간과 장소만 적었을 뿐이다. 강희제가 황궁에 돌아와서는 바로 황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로써 긴 여행은 끝이 났다. 장성과 <<실록>>의 이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일치한다.

 

관방의 <<실록>>에는 거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저, 시간, 장소, 사건의 겉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장성의 일기에는 아주 온화하고 친절하며, 지식욕이 강하고, 무공이 뛰어나며, 무게있게 행동하는 천고일제(千古一帝)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거대한 전략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혜와 민첩함을 이용하고,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사용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외몽고를 중국의 판도에 넣어버렸다.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대막을 종횡하며, 준가르를 궤멸시키고, 외몽고를 수복했다. 이로써 중국이 수천년간 괴로움을 당하던 북방의 우환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장성은 그저 소극적인 방어정책을 나타낸다.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철기군의 남하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명한 정치수단으로 북방유목민족을 귀순시킴으로써 철저하게 변방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강희제가 몽고를 끌어안고, 장성을 수리하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