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동형(周同衡)
강희 61년 십일월 초칠일, 강희제는 병이 나서, 남원(南苑) 사냥터에서 창춘원(暢春園)으로 돌아온다. <<엉헌록>>의 기록에 따르면, 강희는 초팔일에 "풍한이 들어 땀이 났다"고 되어 있다. 당시는 한겨울이므로 강희제가 감기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이런 병은 합병증이 쉽게 따라온다. 특히 고령에 체력이 약해지고, 만성질병에 시달리던 강희제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강희제는 몇번 옹정에게 유지(諭旨)를 내려 그의 병세가 좋아졌다고 말한다. 이를 보면 병세에 그다지 주의하지 않은 것같다. 초구일, 동지(冬至)날이 되어, 옹정에게 천단으로 가서 재계(齋戒)하여 제천의식을 대행하도록 시키면서, 동시에 자신은 재계(齋戒) 5일을 선언하고, 일체의 상소를 보지 않는다.
"종고명(終考命)"은 강희제가 가장 바라던 것이다. 역사상 '종고명'하지 못한 영명한 군주들이 아주 많다. 제환공은 역사적으로 영명한 군주였지만, 제환공의 다섯 아들은 황제위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바람에 부친의 생사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제환공의 시신은 궁중에 67일간이나 방치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신이 썩어가지만 아무도 수습해주지 않았으니, 결말이 가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진무제는 삼국을 통일한 일대영주인데, 그가 죽은 후에 팔왕의 난이 일어나서 서진이 멸망한다. 자신의 생전에는 대권을 장악하고 있다가,사후에는 믿을만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강희제가 만년에 계속 생각해온 문제였다. 강희47년 제1차 태자폐위때부터 윤제(允禔)의 염승사건부터, 윤사(允禩)의 모립(謀立)까지, 강희는 여러 황자간의 후계자다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았다. 그는 윤제를 연금시키고, 윤사를 질책했다. 동시에 여러 황자들에게 인심을 얻으려고 활동하거나, 당파를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만일 이를 어기면 국적으로 엄벌하겠다고 말한다. 강희51년, 제2차 태자폐위때 그는 태자당의 보군통령 탁합제(托合齊), 병부상서 경액(耿額)을 죽여버리고, 형부상서 제세무(齊世武)는 벽에 못으로 박아두어 며칠동안 고토을 호소하다가 죽게 만는다. 강희57년, 한림원 검토 주천보(朱天保)는 윤잉(允礽)을 태자로 복위시켜달라는 주청을 올려, 강희제의 분노를 불러와서, 그가 요행을 바란다고 말하면서 사형에 처한다. 강희60년 대학사 왕섬(王掞), 어사 도이(陶彛)등이 태자를 세울 것을 주청드린다. 그 결과 도이등은 유배를 보내어 서북군에서 일하게 한다. 왕섬은 나이가 칠십이 넘었다는 이유로 장남인 소첨사 왕혁청(王奕淸)이 대신 간다. 강희제의 이런 일련의 조치를 보면,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황제의 특권이며, 어떤 신하도 간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한다: "짐이 죽은 후에 반드시 견고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너희의 주인으로 삼게해주어, 너희들이 마음으로 따르고 기뻐하게 하겠다. 절대 너희 신하들이 힘들게 만들지 않겠다."
십삼일 축각(丑刻)(새벽 1시 내지 3시)에 병이 위급해진다. 윤지(允祉), 윤우(允祐), 윤사, 윤당(允禟), 윤아(允䄉), 윤도(允祹), 윤상(允祥)등 7명의 황자(皇子)들과 융과다(隆科多)를 불러서 선포한다: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이 인품이 귀중하고, 짐을 깊이 이해하여, 반드시 대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짐을 이어 황제위에 오르게 하라" 동시에 재소(齋所)로 윤진을 불러 오라고 하고, 진국공(鎭國公) 오이점(吳爾占)을 보내어 제사를 대신하게 한다. 그날 밤 술각(戌刻)(19시 내지 21시)에 강희가 사망한다.
옹정제는 더욱 상세하게 당시 승계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강희61년 11월 동지 전에 짐(옹정)은 부황(강희)의 명을 받아 남교로 제사를 대신하기 위해 갔다. 당시 부황의 몸은 좋지 않았고, 창춘원에서 요양중이었다. 짐은 곁에서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부황은 남교의 대전을 올리는 것에는 반드시 재소에서 경건하게 재계하여야 한다 하셨다. 짐은 그 뜻을 받들어 재소에서 재계하고 있었다. 십삼일이 되어, 부황이 부황이 짐을 재소로 불렀다. 짐이 창춘원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부황은 성친왕 윤지, 순친왕 윤우, 아치나(윤사를 가리킴), 사스헤이(윤당을 가리킴), 윤아, 윤도, 이친왕 윤상, 원 이번원상서 융과다을 어탑(御榻) 앞으로 불렀다. 유지를 내려서 말하기를: "황사자는 인품이 귀중하고, 짐을 깊이 이해하여, 바드시 대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짐을 이어 황제위에 오르게 하라"고 했다. 이때, 오직 항친왕 윤기(允祺)만이 동지에 명을 받아 효동릉에 제사를 지내러 가서 경사에 있지 아니하였다. 장친왕 윤록(允祿), 과친왕 윤례(允禮), 패륵 윤우, 패자 윤위는 모두 침궁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짐이 급히 도착하여 문안을 드리니, 부황은 증세가 날로 심하다고 하므로, 짐은 눈물을 흘리면서 위안의 말씀을 드렸다. 그날 밤 술시에 황상이 돌아가셨다. 짐은 애통하여 울부짖었으며, 실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융과다가 부황의 유조(遺詔)를 읽었는데, 짐은 그를 듣고 놀라서 바닥에 쓰러져 혼절했다. 성친왕등이 짐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애통함을 절제하라고 권했다. 짐은 비로소 힘을 내서 대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은 옹정7년에 쓴 <<대의각미록>>에 나온다. 어떤 사람은 이를 옹정이 윤사, 윤당, 융과다등 정적들이 죽은 후에, 아무도 대질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이미 죽은 세 사람 이외에 당시에 다섯 명이나 건재해 있었다. 그리고 침궁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사람도 건재해 있었다. 만일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헛점이 너무나 큰 것이 아닌가? 풍이강 선생은 <대의각미록>의 이 기록은 믿을만하다고 말한다. 이 기록은 <옹정기거주>중의 옹정원년(1723년) 팔월 십칠일의 비밀입저문제에 대한 토론자료와 대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십칠일 옹정은 건청궁에서 총리사무왕대신, 만한문무대신, 구경등을 접견한다. 거기서 왜 비밀리에 후계자를 선정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성조황제는 종사와 백성을 위하여 생각하여 짐에게 대통을 잇게 한 것이다. 작년 11월 13일에 황급한 가운데 말 한 마디로 대계를 정해서(一言而定大計). 국내외에 알리니 마음으로 따르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고, 함께 안전의 복을 누렸다. 성조의 정신역량은 사전에 조용히 운용하면서, 사후를 주목하는 것이다. 신성한 예지가 천고의 그 어느 제왕보다 뛰어나며, 스스로 주재할 수 있으니, 만일 짐이라면 절대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옹정은 군신들의 앞에서 그의 승계는 강희제가 '말 한마디로 대계를 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먼저 옹정이 유지를 수정해서 황제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 다른 주장은 융과다가 성지를 허위로 만들어서 옹정이 황제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이것도 성립될 수 없다. 강희제가 병이 든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7일동안, 병이 위중해진 때로부터 사망할 때까지 16,7시간동안, 강희제는 그의 유명을 내릴 시간이 충분했다. 그의 유명에 관하여, 강희47년부터 강희61년까지 14년이라는 기간을 준비했다. 그는 두 명의 아들을 연금시키고, 무수한 대신을 죽였다. 그는 절대로 마지막에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고, 국가의 운명이 걸린 유명을 신하 한 사람에게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7명의 황자와 융과다를 접견하여 유명을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강희제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이전에 그가 얼마나 많은 후계자를 생각해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관건적인 순간에 그는 옹정을 선택했다.
보기에, 옹정이 강희에 대하여 "성조의 정신역량은 사전에 조용히 운용하면서, 사후를 주목하는 것이다. 신성한 예지가 천고의 그 어느 제왕보다 뛰어나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것이라 할 것이다.
강희61년 11월 13일, 이 날을 평범한 날이 아니었다. 강희제말기 17년간의 후계자투쟁이 이 하루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 날 끝장을 본다. 이날의 주인공은 강희이다. 일찌기 제1차 태자폐위때, 조선의 대신은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강희의 사후, 병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강희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는 미리 태자를 세우지 않아서, 반드시 다섯 공자가 후계자를 다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강희가 죽은 이후 화란이 일어날 것이 십중팔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윤사, 윤당은 고수이다. 옹정도 고수이다. 고수들의 승부는 소리없이 결정된다. 강희는 이 날 조용히 권력이양을 실현했고, '종고명'의 희망을 완성했다. 성친왕이 여러 사람을 이끌고 옹정에 고개숙인 후, 옹정은 금방 정권을 접수한다. 마제(馬齊), 융과다, 윤사 및 윤상을 총리사무대신으로 임명한다. 이날, 우리는 윤사, 윤당등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강희가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거나 소란을 피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들은 이 날의 최대 실패자이다. 완전히 강희에게 속았다. 옹정은 강희가 죽는 당일, 윤사가 집에서 깊이 생각에 잠겨서, 처리해야 할 일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윤당은 돌연 그의 앞에 나타나서, 오만무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그들의 분노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옹정의 승계가 합법적이라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이 날에 관하여, 이탈리아 전도사 마국현(馬國賢)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마침 안길락(安吉洛) 신부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보통때와 다른 낮게 깔리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다른 소리와 함께 궁중에서 점점 마는 것같았다. 이 나라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근거하여, 바로 문을 걸어잠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황제가 죽었거나, 북경에서 반란이 일어났나보다. 이 소란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하여, 나는 우리가 거주하는 담장의 위로 멀리 바라보았다. 담장의 모서리에는 큰 길이 돌아간다. 나는 놀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병을 목격했다. 서로간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미친 듯이 사방팔방으로 갔다. 여러번 그들의 행동을 본 후에, 나는 마침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강희황제가 죽었다. 나는 그 후에 들었다. 어의들이 강희제를 치료할 수 없다고 한 후에 폐하는 넷째 옹정을 후게자로 지정했다고 한다. 옹정은 즉시 즉위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신황제가 관심을 가진 첫번째 일은 바로 부친의 유체를 염하고 장사지내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말을 타고, 그리고 그의 형제, 자식과 황실사람들이 따라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든 무수히 많은 사병들이 그들과 함께 갔다. 영구를 호송하여 북경의 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새벽, 나와 안길락 신부 및 희보(希普)는 함께 짐을 쌌다. 목적은 북경으로 돌아가서, 강희서거에 대한 애도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십육일, 옹정은 강희의 유지를 공포한다. 이십일 황제위에 등극한다. 이십팔일 강희성조의 묘포를 확정한다. 이렇게 하여 정권교체는 완성된다.
속담에 "옛날 일을 보면 오늘 일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실 "오늘 일을 보면 옛날 일도 알 수 있다" 1976년의 중국과 1722년(강희61년)의 중국은 비슷한 점이 많다. 강희는 두번이나 태자를 폐위했고, 모주석도 두번이나 후계자를 취소했다. 그들은 모두 각 파벌간의 격렬한 투쟁에 휘말렸다. 그리고 후계자문제는 그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강희는 죽음이 비교적 돌발적이었고, 죽기 전에 유명을 선포하는 방식을 채택했따. 모주석은 수개월전(1976년 2월)에 화국봉을 당의 제1부주석, 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국무원대리총리로 임명했다. 이렇게 하여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시켰다. 모주석이 죽은 후, 화국봉은 즉시 주석의 유체를 보존하고, 모주석기념당을 만들고, 모주석선집제5권을 출판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옹정은 강희묘호를 확정할 때, 여러가지 후보중에서 성조(聖祖)를 선택한다. 청나라에는 태조 누르하치가 있고, 세조 순치가 있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하나의 왕조에 조(祖)를 둘에게 붙인 경우는 오대의 남오(南吳)와 명나라밖에 없다. 옹정이 강희를 '성조'로 한 것에는 '비록 수성하였지였지만, 실제로는 개창한 것이나 같다'라는 이유를 붙였다. 그리하여 '조(祖)'라고 붙였을 뿐아니라, '성조(聖祖)'라 한 것이다. 묘호의 격이 이렇게 높은 것은 사상유례가 없는 일이다. 둘 간에는 방법도 유사하고 목적도 유사하다. 이는 논쟁의 촛점이 이미 누가 승계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합법적으로 승계를 확립한 후 전임자를 높이 받드는 방식으로 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된 후,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예를 들어, 모주석이 화국봉에게 "네가 일을 처리하면 내가 안심할 수 있다"는 쪽지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는 모주석의 화국봉에 대한 신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소문에는 뒤에 두 마디 말이 더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일이 있으면 강청을 찾아라." 사실 문혁을 겪어본 사람이면 모두 강청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그녀의 한 마디 '문공무위(文功武衛)'로 전국은 수년간의 대규모 무장투쟁에 들어간다. 실로 사태를 교란시키는 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주석의 말이 아니다. 모주석의 말을 사칭한 것이다. 최근 들어, 다시 모주석이 일찌기 강청을 당주석으로 확정했었다는 말이 돌고 있다. 모원신, 심지어 장옥봉을 정치국에 넣으려고 했다는 말까지 떠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판본은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상세해진다. 민간문학의 색채가 갈수록 농후해진다. 비교하자면, 옹정이 승계한 후, 신정책을 추진하여, 여러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가 황제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많아진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필자의 이 글은 대부분의 자료를 풍이강 선생의 <옹정계위신탐>과 <옹정전>에서 가져왔다. 나도 풍이강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옹정이 합법적으로 승계했다는데 동의한다. 나는 단지 강조하고 싶다. 옹정의 찬탈에 관한 소문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결점을 안고 있다. 즉 강희가 수십년간의 정채투쟁의 경험과 황권을 보위하여야 한다는 결심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며, 윤사, 윤당등을 너무 저능아로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소문은 검증을 버텨내지 못할 저급한 착오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가급적 십삼일의 하루일을 채우려는 것은 바로 소문이 흘러다닐 공간을 남기지 않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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