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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 사망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9. 10. 29.

글: 유계흥(劉繼興)

 

무측천의 철혈통치가 끝나고 당현종(唐玄宗)의 개원성세(開元盛世)가 도래하기까지의 8,9년간은 상층통치계급이 흔들리고 동요하던 시기였다. 평범한 황제인 당중종 이현은 전형적인 "현부양부(賢夫良父)"였다. 후궁에서는 위후(韋后)의 권력남용을 종용하고,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버릇없이 구는 것도 다 받아주었다. 그는 유명한 "화사황제(和事皇帝, 말썽만 나지 않게 다독거리고 좋은게 좋다는 식의 황제)"였다. 그가 통치할 때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고, 민란을 일으킬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래 멍청한 천자로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룡4년 육월, 그는 돌연 급사한다. 항간에는 그가 위후가 사람을 시켜 보낸 떡을 먹은 후 이상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정말 자신의 조강지처에게 독살당한 것이란 말인가?

 

두 <<당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당중종 이현은 독살당하여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마진객(馬秦客)은 의술로, 광록소경(光祿少卿) 양균(楊均)은 요리를 잘해서, 궁중을 드나들었고, 위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일이 누설되어 주살될 것을 두려워했다; 안락공주는 위후가 임조(臨朝)하고, 자신은 황태녀(皇太女)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로 공모하여, 떡에 독을 넣었다. 육월, 임오, 중종이 신룡전에서 붕어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위황후의 두 애인인 양균과 마진객은 황후와 사통한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했고, 위황후는 황제가 되고 싶었으며, 안락공주는 황태녀가 되고 싶었다. 이 몇 세력은 모두 당중종이 방해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모두 연합하여 독약이 든 떡을 올린 것이다.

 

이 주장의 합리성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자치통감>>에는 경룡4년 오월의 일을 일부러 적고 있다. 즉, 당중종이 죽기 1달전의 일이다: "오월, 정묘, 허주사병참군언사 연흠융(燕欽融)이 다시 글을 올려 말했다: '황후는 음란하고, 국정에 간여하니, 일족이 강성하다; 안락공주, 무연수, 종초객은 종사를 위기에 빠트릴 것을 도모하고 있다'"

 

누군가 황제에게 황후가 음란하고, 황후, 부마와 대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중종은 당연히 상소를 올린 연흠융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연흠융은 대의늠름했다. 사실, 당중종은 처와 딸에 대하여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이런 스캔들을 지방의 자잘한 관리까지도 다 알고 있게 되니, 당중종으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무 말없이 연흠융을 풀어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연흠융은 대전을 나오자마자, 위황후의 심복인 재상 종초객(宗楚客)에게 대전앞에서 살해당한다. 당중종이 그의 책임을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강한 분노를 드러낸다. 위황후와 그녀의 일당들은 그제서야 우려하기 시작했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대책을 생각해낸 것일까? 그것은 바로 당중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진행되었을까? 필자 개인적으로는 당중종이 독살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첫번째 이유는 현존하는 사서에서, 처음 당중종 이현이 위황후에게 살해당했다고 언급한 것은 그후 반달가량 지나서 일어난 위황후에 대한 정변에서였다. 이는 당연히 군사동원시 선전용의 색채가 짙다. 당중종이 서거한 후 18일만에, 태평공주와 이융기(李隆基, 후의 당현종)가 정변을 일으킨다. 당시 정변에 참가했던 한 장군이 사병들에게 말한다: "위황후는 선제를 독살했다. 우리는 오늘 위황후를 죽여서 선제의 원수를 갚자!" 확실히 위황후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은 정변의 핑계거리가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는 부족하다.

 

두번째 이유는 안락공주를 반면교사로 묘사한 <<구당서>>에서도 그녀가 황태녀가 되고 싶었다든지, 정곤지를 만들어 위세를 보여주었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누락했다는 것은 <<구당서>>의 작자가 안락공주를 비호했다고 보기 보다는, 그저 당시 사람들도 안락공주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사후에 모두 예에 따라 개장(改葬)되었다는 것이다. 당중종이 죽은 후 반개월여만이 위후와 안락공주는 정변에서 죽었다. 비록 정변의 구호는 두 여인이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이지만, 정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들 둘은 모두 예의에 맞게 개장된다. 만일 그녀들이 당중종을 정말 독살했다면, 어떻게 그녀들의 신분을 유지시키면서 예의에 맞게 개장해줄 수 있었겠는가?

 

네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당중종을 독살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당시에 준비가 불충분했다. 만일 당중종이 살아있으면, 그녀들에게 큰 뒷배경이 되어준다. 그녀들은 그 보호막 아래에서 세력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위후모녀가 다급해져서 황제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믿기가 어렵다. 이는 그저 당시 승리자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중종은 왜 그렇게 돌연하게 죽었는가? 여기에는 이현의 가족유전병력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당가족은 심뇌혈관의 유전병력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 장손황후, 당고종이 모두 "기질(氣疾)", "풍질(風疾)"을 앓았는데, 이는 고대의 심뇌혈관류의 질병을 의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당왕조의 황제들은 장수하지 못했다. 이현이 오십오세에 사망한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외에, 심뇌혈관질병을 가진 사람은 발병이 급작스럽고, 사망률이 높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현은 사전에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고 돌연히 급사했다. 이것은 심뇌혈관류의 질병의 일반적인 규율에 부합한다. 이렇게 보자면, 위후모녀가 중종을 독살하였다는 것은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다만, 어찌되었건간에, 당중종의 죽음은, 당시 정계에 일대 지진을 몰고 온다. 그리하여 일련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이융기가 승리하여 정권을 획득한다. 그리고 당왕조는 잠시동안의 안정기에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