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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대청제국, 오스만제국, 무굴제국의 비교 (II)

by 중은우시 2008. 4. 10.

 

무굴제국의 운명

 

 

 

무굴제국의 창시자는 바부르(Babur, 1483-1530)이며, 중앙아시아의 봉건군주였다. 1526년 티무르(Timur Lenk)의 후예인 바부르는 인도에 침입한다. 제1차 파니바트전투에서 로디(Lodi)술탄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힌두스탄의 황제에 오른다. 이는 무굴왕조가 인도를 통치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무굴통치자는 투르크혈통의 몽골인이다. 스스로 몽골-투르크족의 후예라고 칭했다. 제국의 정치상층부는 무슬림이고, 사회기초는 힌두교였다. 바부르는 무력으로 북인도를 통일한다. 1530년, 후마윤(Humayun)이 제위를 계승한다(1530-1556년재위). 1540년, 후마윤은 곡녀성(Kanauj)전투에서 비하르아프간 군주에게 패배를 당하여 페르시아와 아프간으로 도망간다. 1555년, 후마윤은 다시 인도평원을 공격해서, 델리와 아그라를 점령하고 무굴제국의 인도통치를 회복시킨다. 1556년, 악바르(Akbar, 1542-1605)가 제위를 승계하고, 진보적인 내정개혁을 실행하며,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취한다. 이리하여 무굴왕조의 인도통치의 사회 ,정치적기반을 넓혀간다. 샤자한(Shajehan 1628-1658년재위)시대에 무굴제국은 국세가 흥성한다. 문화예술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이 시기의 예술특징은 민족전통과 중앙아시아 및 페르시아의 예술을 결합시킨 것으로, 유명한 타지마할릉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무굴왕조는 악바르의 내정개혁을 통하여 군주전제의 중앙집권적 군사관료정치체제를 확립한다.

 

행정제도는 군사화된다. 악바르부터, 모든 문무관리는 38급으로 나뉘는데, 군사방식으로 편제되고, 급여는 등급의 고저에 따라 부여받는 자기르(Jagirs, 군사봉건영지)를 부여받는다.

 

무굴사회는 여전히 농업이 위주였고, 농업에서 상품생산이 확대되어, 상품양식과 면화, 생사, 담배, 염료(인디고)등 경제작물의 전문화생산지역이 나타난다. 제품은 멀리 유라시아시장으로 퍼져갔다. 무굴제국초기에 수공업생산기술수준은 당시 유럽의 선진국가를 넘어섰다. 수공업생산의 주요형식은 봉건제경제의 공방과 가내수공업이었다. 대형관영공방의 우수한 품질의 제품은 주로 궁중이나 귀족의 사치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는데 썼고, 그 다음으로 수출했다. 일부 항구도시에는 상인들이 선급금을 주고, 원료를 제공하고 그 제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수공업자의 소형공방에서의 생산을 콘트롤했으나, 아직 선진적인 공장은 출현하지 않았다.

 

아우랑제브(Auranzeb, 1658-1707)통치시기에 남인도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확장한다. 왕조의 판도는 건체 남아시아대륙을 포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강제적으로 정교일치의 정치체제를 강제하고, 힌두교민에 대한 박해정책을 회복시킨다. 그리하여 라지푸트(Rajput)봉건군주, 시크교도 및 마라트인들의 격렬한 반항에 부닥친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각성의 총독은 속속 독립하여 할거하니, 무굴제국은 분열된다. 1740-1761년의 기간동안, 델리의 무굴황제는 인도에 침입한 페르시아인, 아프간인 및 마라트봉건군주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1764년, 무굴황제인 샤알람 2세(Sha Alam II)는 북사르(Buxar)전투에서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패배하여, 무굴왕조는 영국식민지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명의상으로는 1858년까지 존속한다.

 

제3대황제인 악바르(1542-1605)부터 제6대황제인 아우랑제브(1658-1707)까지의 통치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기이다. 강역도 가장 넓었고, 경제도 번영했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무굴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3대제국의 유사성

 

대청제국의 사료를 가지고, 무굴제국, 오스만제국과 비교분석하다보니 놀라운 점이 발견되었다: 3자간에는 놀라울 정도의 유사성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3대제국은 이민족이 고래의 전통문명지구를 침입하여 건립된 것이다. 대청제국은 화하문명을 접수하였고, 무굴제국은 인도문명을 접수하였고, 오스만제국은 비잔틴(그리스)문명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3대제국은 모두 영토, 인구, 정치, 경제가 동일한 유형에 속한다. 그리고 군사정복, 정권수립, 경제발전, 문화통합의 역사과정에서 공통된 규율이 발견되고, 각자의 특색도 나타난다.

 

또한, 대청제국에만 태평성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3대륙에 걸친 오스만제국과 남아시아의 무굴제국ㅇ도 태평성대가 있었다.

 

16-17세기, 오스만제국에는 살림1세(1512-1520년재위), 술레이만1세(1520-1566년재위), 살림2세(1566-1574년 재위); 무굴왕조에는 악바르(Akbar, 1542-1605), 자한지르(Jahangir, 1605-1627년 재위), 샤자한(Shajehan, 1628-1658년재위), 아우랑제브(Auranzeb, 1658-1707)

 

이들의 시대는 중국의 강희(1662-1722), 옹정(1723-1736), 건륭(1736-1796)의 시대와 비교하면 아주 가까운 시기일 뿐아니라, 거의 동일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