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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때 발생한 진도8이상의 대지진

by 중은우시 2008. 5. 30.

글: 월초(越楚)

 

청나라때에는 대지진이 여러번 발생하였다. 강희제때부터 청나라는 비록 재난구호에 힘을 쏟았지만, 힘에 부쳤다. 매번 대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산사태, 홍수, 전염병 등의 후속 악재이 백성들에게 가져온 재난은 왕왕 지진 그 자체보다 컸다. 그리하여, 지진은 청나라때 말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는 천재지변으로 인식되었다.

 

<<중국전사. 재황사>>의 기록에 따르면, 순치11년(1654년)부터 광서32년(1906년)까지 250년간, 전국에서 진도8이상의 대지진은 9차례 발생하였다. 진도가 가장 센 경우는 8.5에 달하였다. 현지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재난이었다.

 

순치11년(1654년) 7월 21일(음력6월 초8일), 감숙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 진앙지는 천수(天水)였고, 진도는 8도였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지진지역인 예현 "목문일대는 산이 무너지고 물이 고여서, 상전벽해가 되었으며 마을 십리가까이가 묻혀버렸다", "목문의 길은 흙이 수백척 함몰되고, 물이 수십장 모였다". 천수는 "지진이 백여일간 지속되어, 산이 전부 거꾸로 무너지고, 물 위에 고원이 생겼다" 이번 지진은 청나라역사상 첫번째 대지진이었다. 여진은 백여일간 지속되고, 성곽과 관아가 하나도 남아남지 않았다. 천수와 주변지역에서만 사망자가 3만여명에 달하였다.

 

14년이 흘러, 다시 한번 더 큰 대지진이 발생한다. 강희7년(1668년) 산동에서 진도 8.5의 대지진이 발생한다. 진앙지는 여현, 염성의 사이였다. 이번 지진은 중국역사상 기록된 최대의 지진이다. 파급면적은 80만여평방킬로미터에 달하였고, 중대하게 파괴된지역은 북으로는 산동 액현, 남으로는 안휘 사현, 동으로는 바다, 서로는 하남성 개봉에 달하였다. 강희때의 <<여주지>>에 따르면, "남녀노소 죽은 자가 2만여명이었다" 당시 땅은 넓지만 사람은 적게 살았던 청나라초기에 2만여명이 사망하였다는 것은 큰 숫자이다.

 

강희18년(1679년), 하북에서 진도8의 대지진이 발생하고, 영향이 북경에까지 미친다. 건륭때의 <<삼하현지>>의 기록에 의하면 "7월 28일 사시에 지진이 일어났다. 서북에서 동남으로 작은 배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성벽과 가옥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사방에 땅이 갈라지고, 검은 물이 솟아났으며, 한달여가 지나서 비로소 멈추었다. 소속 경내에 압사한 민중이 아주 많았다. "경기지역의 평곡에는 도시와 농촌의 가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바라보면 망망무제였다" 이번 대지진은 마침 삼번의 난을 평정하는데 골몰하던 강희황제를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황급히 조서를 내려 황실의 돈 10만냥을 풀어 구휼에 앞장섰다.

 

청나라전기에 이상의 3번에 걸친 대지진 이외에도, 진도8이상의 대지진이 3차례 더 발생했다. 각각 강희34년(1695년)의 산서대지진, 건륭3년(1739년)의 영하대지진, 도광13년(1833년)의 운남대지진이 그것이다.

 

청나라후기에 들어, 다재다난했던 청나라에는 다시 진도8이상의 대지진이 3차례 발생한다. 광서5년(1879년)의 감숙대지진, 광서28년(1902년) 및 광서32년(1906년)의 두 차례에 걸친 신강대지진이 그것이다. 특히, 감숙대지진은 재난중의 재난이었고, 그 참상은 더 이상 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1879년은 광서제가 등극한 때로부터 연속 4년간 가뭄이 들었는데, 그 마지막 해에 해당한다. 대지진이 돌연 발생하자, 설상가상이었다. 이번 대지진은 7월 1일에 발생하였고, 진앙지는 감숙남부와 사천의 접경지역인 계주(階州, 지금의 武都)와 문현(文縣)일대였다.  진도는 8도였고, 파급지역은 대부분 가뭄지역내였다. 역사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지진발생시에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수백리에 미쳤다" 계주와 문현의 두 지방은 순식간에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땅에서는 물이 솟고, 성벽이 무너지고, 가옥도 쓰러졌다. 지진으로 압사한 백성이 모두 3만여명이었다. 지진은 수재를 불러왔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홍수에 익사했다. 문현일대에서만 1만여명이 익사했다. 계주하류의 "양탕하"라는 큰 마을이 있었는데, "만호가 사는 동네가 졸지에 못으로 바뀌고, 닭소리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진때 압사하거나 수재로 익사한 백성이 진앙지역에 숫자로 나타난 것만 4만여명이다.

 

이번 지진의 파급 범위는 동으로는 서안동쪽, 남으로는 성도이남에 미쳐 종횡2천리에 달하였다. 감숙, 산서, 섬서, 하남, 사천, 호북등의 성의 100여개현이 영향을 받았다. 큰 가뭄에 큰 지진까지 겹쳐서, 역사상 드물게 보는 대재난이 되었다. 1879년은 중국근대에 손실이 가장 심했던 재난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