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백충(顧伯沖)
중국 수천년의 봉건사회중 수십개의 크고 작고 길고 짧은 왕조들을 살펴보면, 송나라때는 경제, 사회 및 문화가 가장 발달해 있었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태조때부터 화폐주조가 500만에 달했는데, 이 2년동안의 화폐주조량은 400년이후 명나라 276년간 주조한 총합계보다도 더 많다. 그리고 당나라의 전성기인 당현종때의 화폐주조량도 32만관에 불과했다; 중국의 4대발명중 3가지가 송나라때 이루어지고, 당송8대가중 6명이 송나라때 사람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가장 형편없는 왕조이기도 하다. 한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가장 분개할 일은 '정강지난'이다. 정강2년 봄, 즉, 1127년 정월, 금나라병사들은 변량을 함락시키고, 4월에는 휘종, 흠종의 두 황제 및 3천여명의 황실인원을 전쟁포로로 끌고 간다. 1년후에 금나라의 상경에 도착한다. 다음 날, 금태종 오걸매(吳乞買)는 휘종, 흠종의 두 황제로 하여금 금태조 아구타(阿骨打)의 능친에 절을 하게 한다. 먼저 그들 부자황제에게 옷을 벗어 웃몸통을 드러내게 한 다음, 두 마리의 면양을 잡고, 피가 뚝뚝 흐르는 양가죽을 두 부자황제의 몸에 걸쳤다. 이런 지극히 굴욕적인 모습으로 휘종, 흠종 두 황제는 한걸음에 한번 머리를 땅에 박는 절을 하면서, 아구타의 묘를 3바퀴나 돌았다. 예를 마치고, 두 황제는 건원전으로 가서 금태종 오걸매를 배알한다. 흠종은 혼덕공(昏德公)에 봉해지고, 흠종은 "중혼후(重昏侯)"에 봉해진다.
당초에 강대했던 왕조는 왜 마지막에 자신의 군주마저 계하지수(階下之囚)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원인이 여러가지이다. 치명적인 것이라면, 적을 두려고 하지 않는(不敢有敵人) 왕조심리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왕왕 '두려워하는 곳에 귀신이 있고, 간지러운 곳에 이가 있는 법이다' 송나라는 적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계대동의 좋은 운세를 맞이한 것이 아니었다. 적이 존재했을 뿐아니라, 항상 호시탐탐했다. 천년전에 중국의 광활한 판도위에는 변경에 도읍을 정한 송나라를 제외하고도, 3개의 국호가 나타난다: 하나는 내몽고 근교에 자리잡은 요(遼)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서북지구에 자리잡은 서하(西夏)이며, 또 다른 하나는 회녕(會寧)을 도읍으로 정한 금(金)나라이다. 상술한 세 정권의 군주는 체내에 기마민족의 혈액이 흐르고 있었다. 광활하고 끝이없는 초원은 유목민족들에게 겸용, 다변, 검박, 동태적인 품성을 심어주었다. 모험심, 용맹, 호전, 확장등의 특징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더 잘 살기 위하여, 혹은 유목민족의 몸에 흐르는 원시적인 야성때문에, 그들의 감정적인 나침반은 항상 송나라가 자리잡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송나라를 적으로 삼았고, 송나라가 적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여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그들이 한 모든 것은 그저 말과 칼의 날카로움만 보여준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북송은 북방의 요나라 및 서북의 서하정권과 장기간 대치했다. 경덕원년(1004년)의 전연지맹은 거란의 유운십육주점령을 합법화시켰을 뿐아니라, 매년 은20만냥, 견10만필을 보내서 세폐(歲幣)의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매번 의화(議和)때마다 이렇게 거액의 재물을 공물로 바치다니, 송나라의 재정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혹은 매년 적자를 보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필자는 책임있게 답변을 드릴 수 있다: 아니다. 우리는 송나라왕조를 위하여 우려해줄 필요가 없다.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송나라가 당시 수퍼부국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공물은 그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남태평양, 중공, 아프리카, 유럽등 50여개국가와 통상무역을 하고 있었다. 청명상하도에 그려진 번화한 광경은 천년후의 우리마저도 감탄하게 한다. 그러나 부유하다고 하여 강대했던 것은 아니다. 낙후하면 얻어터진다. 그리고 상무정신이 없고, 강대한 국방이 뒷받침되지 않는 민족은 비록 경제가 아무리 강대하고 번성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얻어터지고, 나라의 권리를 잃고 모욕을 당한다.
유운십육주는 후진(後晋)이후 송나라를 포함한 한족들에게는 가슴아픈 상처이다. 936년, 후당(後唐)의 하동절도사 석경당이 후당을 배반하고 스스로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거란에 지원을 요청한다. 거란이 출병하여 석경당을 도와 후진이 건립된다. 요태종과 석경당은 부자관계를 맺는다. 그 조건으로 2년후인 938년, 석경당은 유운십육주를 거란에 바친다. 그리하여 요나라의 강역이 장성일대까지 확장된다. 송나라의 통치자들은 여러번 유운십육주를 수복하고자 했지만, 여러번 준비하고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하고나서는 포기해버린다. 조길의 <<성성만>>은 호화사치가 드러나고, 지분(脂粉)이 묻어나고, 우아함이 묻어난다. 이런 우아하고 편안한 생활은 너무나 아쉽다. 송나라의 대소관료들중 누가 이를 포기하려 하겠는가? 영토수복의 일은 그저 한켠에 밀어둘 뿐이었다. 나중에 송나라는 아예 외족이 유운십육주를 점령하는 것에 합법성을 인정해준다. 그리고 송나라의 백성들은 요나라병사를 "호랑지사(虎狼之師)"라고 부르면서 상하가 모두 두려워한다.
나날이 편안할수록, 통치자들은 더더구나 적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적을 두려고 하지 않는데, 강대한 군대가 필요할 리가 없다. 이는 송나라 최고통치자들의 치국논리였다. 그리고 그들이 "중문교, 억무사(重文敎 抑武事)"의 기본국책을 정한 심리적인 기초이다. 최고통치자가 관심을 갖는 촛점은 통상적으로 사회역량의 집결포인트이다. 송나라때, 문화는 사상유례없이 고도로 발전했다. 구양수, 범중엄, 소동파, 왕안석, 사마광, 유영, 신기질, 이청조등 대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찬란하다. 진인각 선생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화하민족의 문화는 수천년을 거쳐서 변모해왔는데, 최고조에 달한 것은 조씨의 송나라때이다" 대소관료들은 평소에 글을 쓰고, 시를 짓고, 꽃과 달을 읊고, 노래를 불렀다. 풍류와 우아함을 쫓는 데는 능했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서로 미루고, 속수무책이었으며, 심지어 비굴하게 굽신거렸다. 문기(文氣)가 지나쳐서, 많은 문인과 관리들은 그저 술을 마시며 근심을 잊었고, 유록화홍처(柳綠花紅處)를 찾아다녔고, 같이 천애를 유랑하는 기녀들로부터 이해와 안위를 구했다; 혹은 노장사상에 의탁하여, 스스로 물러나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살았다. 천한취수박(天寒翠袖薄) 일모의수죽(日暮倚修竹). 중국역사상 정신이 마비되어 쪼그라든 왕조가 된다.
역대왕조에서 무공(武功)이 없이 문치(文治)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가? 무비(武備)가 없이는 아무리 번영한 경제, 아무리 찬란한 문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모래성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은가? 한나라 당나라의 문치는 무공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나라의 군인은 사회적인 지위가 아주 낮았고, 많은 사병들은 얼굴에 먹물을 먹인 후 군대에 보내어진 죄인들이었다. "호남부당병, 호철불타정(好男不當兵, 好鐵不打釘, 좋은 남자는 군인이 되지 않고, 좋은 철은 못이 되지 않는다)"는 속담이 송나라에 유행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하에서, 글을 읽는 기풍은 성행하였지만, 상무적인 기풍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송나라는 백만의 상비군을 지니고 있었다. 송신종이 등극하기 전에 금군, 상군이 140만에 달하였다. 사람수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최초로 열병기를 사용하는 신기원도 이룬다. 지남철을 군대포진과 작전에 활용했다. 장비는 선진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본국책의 설계는 사회엘리트의 지향을 결정한다. 군인의 사회지위가 높지 않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군에 가려고 하지 않고, 군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문인은 아주 많았지만, 걸출한 군인은 아주 적었다. 명장은 더더구나 봉모인각(鳳毛麟角)이었다. 군사전략인재가 부족하게 되어, 국가의 대사인 군사사상, 전략, 전술이 제고되기 힘들었다. 결단성이 부족하다보니, 섶을 안고 불을 끄러 들어갔다. 그리하여 외적들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동쪽의 땅 하나를 집어삼키고, 서쪽의 성하나를 떼어먹었다. 나중에는 천진하게도 금나라와 함께 요나라를 멸망시킨다. 약간의 땅과 성을 나눠가지려고 했지만, 오히려 강산의 절반을 잃어버리고, 황제마저도 포로로 잡힌다. 남송만 남게 되었으니, 천고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잔혹한 경쟁의 세계에 무력과 문치는 하나의 몸이다. 국가가 무공의 건설에 대한 생각과 수단을 바꾸면, 문치에는 상응하게 반영된다. 무공과 문치방략조정이 어느 것이 앞이고 뒤인지는 따질 것도 없이, 문치가 무공에 의존한다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일정한 의미에서, 한 나라와 민족의 발전과 진보는 자신의 적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적이 있으므로, 노력의 방향을 볼 수 있다; 적이 있으므로, 전진하는 동력이 생긴다; 적이 있으므로 쫓아갈 대상이 생긴다.
적을 두는 정신은 적극적으로 적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경쟁이 있으면, 우승열태(優勝劣汰)는 만고불변의 철칙이다. 한 민족이 생존발전해나가려면, 반드시 적을 두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전투를 하는 용기와 품성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와 문화가 의지할 곳이 없다. 한 민족이 나라와 집을 지키는 군사재능은 한 민족의 입신의 기본이고 생존의 바탕이다.
천년이 흘렀다. 송나라의 세월은 지나갔다. 바탕이 없는 번영은 일찌감치 소멸했다. 적을 두지 않으려는 왕조심리는 역사의 교과서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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