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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송나라의 위조지폐사건

by 중은우시 2009. 8. 14.

글: 이개주(李開周)

 

호자원(胡子遠)은 남송때 사람으로, 지현(知縣)을 지냈다.  글재주가 있어서 당대의 저명한 시인 범성대(范成大) 및 저명한 사인(詞人) 주필대(周必大)와 교분이 있었다. 집안에 재산도 많아서, 땅이 수천 무(1무는 200평), 집이 수백칸이 되어, 집을 세놓고, 토지도 소작을 주어서, 임료와 소작료 수입이 상당했다. 나날이 재산이 불어났다. 그에게는 나이든 부친이 있었는데, 집안에서 장부를 관장했다. 임차인과 소작인들이 내는 돈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보니, 노안이 와서 눈이 흐렸고, 돈을 받을 때 진짜와 가짜를 잘 구분하지 못했다. 한번은 호자원이 정산을 해보니, 임료중 500관이 모두 위조지폐였던 것이다!

 

남송 초기의 물가로 절강의 쌀 1석이 회자(會子) 1관이다. 회자는 송나라때 지폐의 일종이다. 만일 호씨집안에서 받아들이는 임료를 모두 회자로 계산한다면, 호자원은 부친의 눈이 흐린 것때문에, 쌀 500석을 손해본 셈이다. 송나라때 1석은 58.5리터이며, 쌀 약 50킬로그램에 해당한다. 현재의 쌀값으로 환산하자면 50킬로그램은 아무리 싸게 잡아도 200위안(한화 약38000원)이다. 500석이라면 10만위안(약1800만원)은 되는 셈이다. 호씨집안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라 10만위안이나 손해봤으니 호자원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그는 화도 났다. 그리하여 고향의 관리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리하여 가짜돈을 낸 임차인과 소작인들을 혼내주려고 한다. 그러나 호자원의 부친은 후덕한 사람이어서, 이를 막았다. 이들은 모두 가난한 자들인데, 네가 죄를 추궁하면 그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돈이 있으니, 이 10만위안정도를 가지고 시끄럽게 굴지 말자고 하면서, 이전의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나중에 더욱 주의를 하는 것으로 하자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얘기를 듣고, 호자원의 부친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반값으로 그 500관 가짜돈을 사들이고자 한다. 그 자는 호 노선생에게 아주 간사하게 말했다: "이 가짜돈을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그냥 휴지조각이다. 그러나, 내 손에 들어오면 금방 쓸 수 있게 된다." 호 노선생은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한다. "나는 이미 가짜돈에 속았다. 어찌 이 가짜'돈이 다시 시장에 유통되어 다른 사람까지 속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후에 그는 임칙서가 호문에서 아편을 소훼한 것처럼 이들 가짜돈을 불태워버렸다.

 

위의 이야기는 <<노학암필기>>에 기록되어 있다. 작자는 육유(陸遊)이다. 육유는 이렇게 말한다: "호자원의 부친은 ... '전인(錢引)' 500관을 얻었는데, 모두 가짜였다" 이는 호씨집안에서는 임료를 '회자'로 결산한 것이 아니라, '전인'으로 결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인'은 '회자'와 마찬가지로, 역시 송나라때 화폐의 일종이다. 다만 전인은 회자보다 지폐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이 수십년 늦은 것뿐이다.

 

송나라때 지폐는 종류가 다양했다. 전인과 회자 이외에도 교자(交子), 관자(關子), 소초(小)가 있고, 일부지방에서 유통되던 호회(湖會), 천회(川會), 관외은회(關外銀會)와 형남교자(荊南交子)등이 있다. 교자는 최초에는 지폐가 아니었다. 민간상인들이 발행하는 무기명예금통장격이었다. 회자도 처음에는 지폐가 아니었다. 이는 교자를 교환하기 위하여 발행하는 기표(期票)였다. 전인도 처음에는 지폐가 아니었다. 이는 정부가 염상(鹽商)에게 발급하는 수령증이었다. 다만 나중에 

지폐에는 위조방지표식이 있다. 송나라때의 위조방지표식은 세 가지로 나뉜다. 종이(紙), 도안(圖案), 화압(花押)이 그것이다. 당시에 지폐를 인쇄할 때는 종이를 전용종이로 했다. 이름은 "초지(抄紙, 아마도 紙의 오기일 듯)"이다. 이는 닥나무의 껍질을 주원료로 가공해서 만든 것이다(그리하여 송나라의 문인들은 지폐를 楮幣라고 불렀고, 어떤 문인들은 지폐를 楮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북송말기, 사천의 성도에는 초지원(抄紙院)이 있었다. 이곳은 종이를 만드는 것을 책임졌고, 여기서 만든 종이는 지폐를 인쇄하는데 썼다. 이런 종이는 외부에 유출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종이를 제작하는 노동자들은 국가에서 기르고 감시했다. 그들이 지하공장으로 옮겨가서 가짜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공급할 수 없게 하였따.

 

다음으로는 도안이다. 북송의 지폐는 한쪽면체 인쇄를 하고, 장방형이며, 사방에 꽃무늬가 있고, 중간에는 붉은 글자 혹은 역사이야기가 있다. 액면가치는 일반적으로 중상위치에 쓴다. 여기에 혹은 오백문, 혹은 1관, 혹은 10관, 혹은 100관등 서로 달랐다. 마지막으로 '화압'이다. 이것은 보기에는 아주 변태적이다. 한자같으면서도 한자가 아닌 서명이다. 개별적인 화압은 현대의 스타들이 하는 사인과 아주 유사하다. 서로 다른 송나라지폐는 화압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 얻너 경우에는 지폐의 네 귀퉁이에 인쇄한다. 어떤 경우에는 지폐의 가운데 인쇄한다. 특수한 종이, 복잡한 도안, 여기에 개성있는 화압, 이렇게 하여 송나라의 지폐는 위조지폐를 쉽게 발견해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위조방지표식에 노력을 들이는 외에, 송나라정부는 위조지폐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어, 지폐인쇄노동자를 국가에서 기르고 감시할 뿐아니라, 위조지폐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사람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과하도록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큰 상을 내렸다. 여기에 정기적으로 교체했다: 한 세트의 지폐는 단지 일정한 기간만 발행했다. 기간이 되면 다시 새로운 지폐를 인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화폐를 교환해주었따. <<저폐보>>라는 책에는 남송시대에 지폐교환의 기간과 매 번의 지폐도안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소흥31년, 제69번째 지폐가 사용중지된다. 제70번째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한다. 신화폐의 도안은 "왕상와빙(王祥臥氷)"이다.

융흥원년, 제70번째 지폐가 사용중지된다. 제71번째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한다. 신화폐의 도안은 "천마서래(天馬西來)"이다.

건도원년, 제71번째 지폐가 사용중지된다. 제72번째 지폐가 유통되기 시작한다. 신화폐의 도안은 "복식상서(卜式上書)"이다.

 

비록 이렇게 했지만, 역시 위조지폐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첫머리에서 얘기한 호자원의 부친이 위조지폐를 대량 받았다는 것도 송나라 위조지폐역사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송사>> 374권의 기록에 따르면, 남송초기의 사천에는 50명의 범죄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위조지폐를 찍어내는 것을 전문으로 했다. 나중에 발견되어 체포되었는데, 가짜지폐 30만장이 압수된다. 매장당 액면가격은 높은 경우 천관에서 낮은 경우 십관까지였다고 한다. 그들의 손에 만들어진 위조지폐는 이미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주희문집>> 제19권의 기록에 따르면, 1182년, 태주지주 당중우(唐仲友)는 위조지폐범 장휘(張輝)를 협박하고 구슬려서, 그로 하여금 신지폐의 도안을 조각하게 한다. 그리고 비서를 시켜 화압과 인장을 위조하게 한 후, 2600장의 위조지폐를 인쇄한다. 장당 액면가격은 1관이었다.

 

<<학림옥로>> 갑집 제4권의 기록에 따르면, 1230년을 전후하여, 반란군 두령인 이전(李全)은 산동에 할거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신화폐의 인판(印版)을 구했고,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거 가짜화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가짜회폐로 인근지역에 가서 양식과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그리하여 강남의 물가가 급등하게 된다.

 

재미있는 일은, 이 세 건의 위조지폐사건 주모자들은 모두 멀쩡했다는 것이다.

 

이전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어, 조정에서 그를 죽이지 못했다. 당중우는 당시 재상인 왕준의 사위였으므로, 정부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사천의그 50인 범죄집단은 원래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선무사 장준이 돌연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가짜화폐를 만들 수 있다면, 진짜화폐도 잘 만들 것이다. 아예 그들을 지폐인쇄공장의 기술자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이는 마치 최근의 컴퓨터 해커와 같다. 비록 사건은 저질렀지만, 기술이 뛰어나서, FBI같은 곳에 특채되는 경우와 같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