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계압서(季壓西), 진위민(陳偉民)
수수께끼의 영국젊은이: 청나라쇄국의 도화선
청나라 건륭제가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된 것은 두건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표된다: 하나는 건륭22년(1757년)에 청나라정부가 선포한 "광저우 1개 항구무역개방정책으로 되돌아간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건륭24년(1759년)에 청나라조정이 비준한 <<방범외이규조(防范外夷規條)>>이다. 이 두가지 사건의 도화선은 모두 Flint(중국명 홍임휘)라고 부르는 영국인이 불을 지폈다.
영국사신 매카트니가 중국에 오기 57년전인 건륭원년(1736년), 영국의 상선인 "노만튼호"에 James Flint라는 영국청년이 승선했다. 그의 출신, 가정배경, 배를 타고 중국에 온 목적, 선원인지 아닌지, 어떤 업무를 했는지 등등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영국청년은 돌연 이 상선의 선장인 Rigby에게 스스로 광저우에 남아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요청한다. 중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당시의 영국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 영국선장은 Flint의 돌연한 요청을 응락하고, 그를 중국에 남겨둔다. 그런데, 이 배는 3년후에 침몰되고, 선장도 행방불명된다. 중국에 남아있던 이 청년도 연락이 두절된다. 5년후, 즉 건륭5년(1741년), 영국동인도회사 이사회는 중국으로 당해년도의 광저우무역에 참가하기 위하여 떠나는 "요크호"와 "마리공주호"에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1736년 '노만튼호'의 선장인 Rigby가 소년 하나를 남겨놓고 왔는데, 이름이 James Flint이다. 중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만일 당신들이 그를 찾아내고, 그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으면, 그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일하도록 받아주어라."
"요크호"의 타이판(Taipan, 大班)은 동인도회사 이사회의 지시를 충실히 집행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이 영국청년과 연락한다. Flint는 건륭6년(1741년) 십월십이일(11월 19일) "요크호"의 타이판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5년동안의 생활과 중국어를 공부한 경력을 설명하고, 간절한 어조로 향후의 계획을 나타냈다:
"5년전에 선장 Rigby는 나를 이곳에 남겨 중국어를 공부하게 했고, 나는 이곳에서 3년간 배우겠다고 신청했다. 나중에 선장 Rigby는 나를 봄베이로 오라고 하였다. 나는 "하린튼호"에 타고 갔다. 내가 그 곳에 도착하기 전에, 선장 Rigby는 이미 항구를 떠났다. 오래지 않아 거류지 총독과 관리회는 나를 '윌리엄왕자호'에 태워서 마드래스로 보내고, 다시 그곳의 총사무소에서 다시 나를 중국으로 되돌려보내어, 계속 중국의 언어를 익히게 하였다. ...나는 귀사의 이사회가 훈령에서 나를 언급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감히 서신을 써서 보내는 것이니, 만일 당신들이 나에게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다면, 나는 전력을 다하여 중국어를 쓰고 읽는 것을 배우겠고, 만다린과 이 곳의 방언을 익히겠다."
당시, Flint가 동인도회사 광저우관리회에 지원을 요청했고, 광저우의 영국상인들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하였다. 조건은 그에게 중국어를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자금지원해주는 것이었다. 기간은 그가 만다린과 광동말을 숙련되게 익힐때까지였다. 관리회의 주임인 Richard Oliver는 이 젊은이의 정신과 집착에 감동받는다. 그는 관리회의 다른 두 구성원의 의견을 들은 후, James Flint를 150냥에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이후에 발생한 일들을 보면, 이 돈은 당시 영국상인이 중국에서 투자한 것중 가장 가치있고, 가장 제대로 쓰고, 가장 적시에 쓴 것일 것이다. Flint는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의 첫번째 중국어통역 학생이 된다.
"통사" 홍임휘의 출현: 영국상인의 기쁨
건륭7년(1742년), 영국함대지휘관은 전세계를 항해하면서 광저우를 방문해서 양광총독을 만난다. Flint는 통역으로 회담장소에 나타난다. 그의 통역에 함대지휘관은 만족해 하였다. 건륭11년(1746년), 광저우의 무역기간에 런던의 동인도회사 이사회가 당해년도 광저우 무역 타이판위원회 주석인 토마스 콜에게 보낸 지시에서 다시 한번 James Flint를 언급한다. 이사회의 이번 지령은 임명장과도 같았다: "우리는 이미 James Flint를 Tanistock호를 타고 와서 우리 전체 타이판의 통사(通事, 통역)를 맡도록 지시했다. 사정상 필요하면, 우리의 업무를 협조받아 처리하라. 당신들의 거류기간내에 반드시 그를 우리의 상관에 초대하고 배 1척마다 그에게 90냥을 지급하라." Flint는 이미 정식으로 '통사'가 된 것이다.
Flint는 만다린을 다 배우고 나니, 더이상 영국상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생활에 걱정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현재는 누가 첫번째로 중국어를 배운 영국인인지 알 수가 없다. Flint는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범위내에서 첫번째로 중국어통역이 된 영국인이다. "그는 동인도회사의 첫번째이자 장기간 유일한 중국어를 아는 직원이었다" 이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중국무역사상 커다란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이전에 영국상인은 대중무역에서 중국통사 혹은 프랑스인과 포르투갈인 및 일부 선교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건륭15년(1750년)이 되면, Flint는 영국상인 미시노르의 광저우상관에서 통사를 지내며, 고수입계층이 된다: "Flint 통사에게 회사의 보조금으로 우리 3척은 척당 90냥씩 합계 270냥을 지급했다. 그리고 그의 주택임차료로 200냥을 지급했다. 이해에 동인도회사에서 중국에 온 선박은 최소한 10척이 넘는다. 그의 수입은 최소한 900냥에 이르렀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중국어를 익힌 이 영국인은 자기 스스로에게 중국이름을 붙인다. 바로 "홍임휘(洪任輝)"이다. 중국공식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홍임(洪任)" 혹은 "홍인휘(洪仁輝)"로 잘못 기재된 경우는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중국어통역을 지니게 되었고, 금방 그 단맛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영국상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통역을 통하여 월해관감독에게 직접적이고 전혀 에누리없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모든 일을 중국행상이나 중국통사를 통하여 보고해야하던 불편함이 사라졌다. 더 이상 중국통사가 통역할 때, 정확하게 전달하는지, 말을 뒤바꾸지는 않는지 우려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1753년 8월 4일(건륭18년 칠월 초육일), 홍임휘는 월해관감독인 이영표(李英標)가 4척의 영국선박을 검사하는 기회에, 영국회사의 광저우무역타이판위원회가 초안한 보고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행상과 중국통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월해관감독 이영표에게 전달한다. 이 중문보고서는 실제로 1750년(건륭15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대외무역에서 채택한 보상제도(保商制度)에 직접적으로 결투를 선언한 셈이었다. 보고서는 고용된 통사와 매판들이 관리들을 위하여 예물을 바치는 부담을 면제해주기도 요청했다. 왜냐하면 이런 부담은 최종적으로 영국상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 한문보고서는 즉시 중국관련관청으로부터 강력한 관심을 끌게 된다. 1주일후, 해관감독은 사람을 보내어 이 영국선박의 중국보상에게 즉시 영국타이판을 위하여 청원서를 초안한 젊은이를 붙잡아오도록 지시한다. 해관감독은 전혀 숨김없이 이 얄미운 자에 대한 증오를 표현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그(보고서를 초안한 자)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이때까지도 중국관원은 '그 보고서를 초안한 자'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몰랐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홍임휘가 월해관감독 이영표에게 요청한 것은 거절당했지만, 그와 다른 영국인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1754년 7월(건륭19년 오월), 홍임휘는 다시 해관아문으로 찾아가서, 이영표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이영표가 가부간의 답변을 하지도 않았는데, 홍임휘와 타이판들은 7월 29일(육월 초십일) 집단으로 총독아문으로 찾아가서, 총독과의 회담을 요청한다. 영국인은 보고서를 준비한 외에, 홍임휘로 하여금 별도의 중문서신도 준비하게 하였다. 3척의 상선에 있던 영국타이판들은 '자기의 통역'인 홍임휘를 데리고, 총독대인을 만난다. 그리고 만남에서, 홍임휘는 원망이 가득 담긴 중문보고서를 제출한다. 그 자리에서 양광총독에게 영국상인들이 광저우에서 처한 곤란한 입장을 설명하고, 특히 보상제도가 영국인에게 얼마나 곤란을 초래하는지 설명하면서 폐지를 요청한다. 그리고, 영국상인이 청나라관원에게 직접 세금을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번 만남은 행상과 중국통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양광총독은 이에 대하여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다. 곁에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자리에서 영국인들이 제출한 업무적인 성격의 문제는 나중에 결정해주겠다고 대답한다. 영국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막 승진하여 임명된지 얼마되지 않은 양광총독이 그들에게 준 인상은 그가 방문한 영국상인들에게 아주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또한 그가 영국인의 보고서를 읽은 후에, 그가 보고서의 주요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같았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영국상인들의 회의를 자아냈다. 그들은 즉시 홍임휘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총독이 고의로 못알아보는 것처럼 하는 것인지, 홍임휘의 번역문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홍임휘가 번역할 때, 소식이 새어나갈까봐 우려하여 중국인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총독이 아마도 보고서에 쓴 내용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모르고, 이 영국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러 온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같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총독이 마지막에도 여전히 영국인들에게 그들이 왜 왔는지,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다시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볼 때, 이때까지도 홍임휘는 중국인의 도움이 없이는, 중문으로의 번역을 그다지 정확하게 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건간에, 영국인들은 자신의 통역 홍임휘에 아주 감격했다. 영국상인은 바로 그를 통하고, 중국정부가 파견한 행상, 통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총독과 사상유례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은 20년이래로 첫번째이다" 그리고, 이번 만남의 효과는 영국상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8월 3일(육월 15일), 총독이 영국타이판에게 사람을 보내어 통지했다. 중국상인들은 합리적인 조건으로 너희들과 거래할 것이다. 만일 영국인들이 청원할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총독을 만나러 와도 된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영국인 1명의 가치가 이처럼 금방 드러난 것이다. 그리하여 날로 영국상인들로부터 중시된다. 홍임휘는 이 틈을 타서 자신의 언어상의 장점을 가지고, 동인도회사의 재중국상인의 통역을 하는 외에, 개별상인의 신분으로 직접 중국인들과 장사를 하기도 했다. 1747년(건륭12년), 그는 강남 무원현의 생원, 차상인 왕성의(汪聖儀) 부자와 무역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320냥의 차교역자본을 제공한다.
홍임휘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큰 역할을 한 것은 또 다른 일에서였다.
닝보(寧波)의 행수가 성공하다. 다만 건륭의 금지령을 이끌어내다
1755년 5월 22일(건륭20년 사월 이십이일), 홍임휘는 영국상인 '하드니스공작호'와 '그린펀호' 상선을 타고 정해(定海)에 도착한다. 홍임휘는 온 이유를 묻는 정해의 관원들에게, "조상이 이곳에서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듣기로 닝보는 교역을 공평하게 한다고 하더라"고 답변하고, 닝보에서 비단, 차를 구입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절강관원으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그리하여 닝보선왕(船王), 상인인 이원조(李元祚)의 집에 머물게 된다. 홍임휘가 말한 "조상이 일찌기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한 적이 있다"는 말은 1685년부터 1736년까지(강희24년 에서 건륭원년), 영국선박이 8차례에 걸쳐 모두 15척이 닝보에 와서 무역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홍임휘등이 닝보에 온 일에 대하여 절강제독 무진승은 간단하게 보고한다. 건륭제는 상소글을 읽으면서, 외국상선이 닝보를 방문하여 무역을 진행하였다는 점을 보고도 아무런 이의도 표시하지 않았다.
홍임휘는 이로 인하여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 지위가 크게 올라간다. 바로 그때문에, 건륭원년후에 여러해동안 중단되었던, 영국상선의 닝보에서의 무역이 회복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국인들에게 홍임휘라는 영국인통역으로 인하여 언어상의 장애가 제거된 큰 가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동인도회사 광저우위원회 주석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우리가 닝보에서 성과를 얻은 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중국어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만일 Flint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상인 해리슨도 흥분해서 이렇게 썼다:
1741년(건륭6년) Flint선생의 출현은, 동인도회사에 한가닥의 희망을 주었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나중에 동인도회사를 많이 도와주었다.
1755년(건륭20년) 홍임휘가 성공적으로 닝보무역을 성사시킨 후, 홍임휘는 다음 해(1766년, 건륭23년) 상선을 이끌고, 다시 닝보로 간다. 현지관리는 홍임휘의 닝보에서의 무역행위를 인정했고, 동시에 조정에 보고했다. 영국인이 연속으로 닝보를 방문하자, 조정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같은해 칠월구일 민절총독 카르지샨에게 보낸 조서에서 이렇께 썼다. "이전부터 서양선박이 들어오는 것은 모두 광동의 마카오등지였다. 절강의 닝보로 오는 경우는 아주 적었다...금년에 많은 사람이 무역을 위하여 오게 되었다. 장래에 이 길이 익숙해지면, 들어오는 선박이 날로 늘어날 것이며, 또 다시 새로운 무역도시가 형성될 것이다....국가의 대외통상에서 닝보는 원래 마카오와 차이가 없다. 다만, 이렇게 하면 무역도시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오래 거주하려는 자가 늘어날것이 우려된다. 해변의 요지가 점차 잠식되게 될 것이다...현지의 상인과 통역인들이 오랑캐상인이 들어옴에 따라 그 중에 이익을 취하려 하게 되고, 왕왕 사사로이 결탁하는 자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자들은 이익을 위하여 다른 것은 돌보지 않게 된다; 순라병이나 일하는 자등은 오랑캐선박이 들어옴에 따라 이익을 얻게 되니, 이곳에서는 소인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상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지하지 않으면 다른 사단이 일어날까 우려되니, 더욱더 주의해서 살펴보라." 이후 양광총독이 올린 보고서에서 이해에 광저우로 와서 무역을 한 외국상인이 지난 해보다 확실히 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은 건륭황제로 하여금 닝보에 대한 우려를 증가시켰다. 그는 윤구월십일 양광총독 양응거에게 보낸 조서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소인들이 이익만 생각하고 있다. 광동성해관에는 감독전문인원이 있으니, 닝보는 세액이 적고 조사가 엄밀하지 못하다. 장래 점차 서양선박이 많아지고, 닝보도 서양인이 많은 무역도시가 될 것이니, 시간이 오래되면 다른 폐해가 생길까 우려된다. 카르지샨은 양응거와 함게 협의하여 광동해관의 현행규칙을 기준으로 하여, 닝보의 관세율을 다시 적당히 가중하라. 절강으로 오면 이익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마카오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소인들이 결탁하여 일을 벌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감독하기에도 편리할 것이다. 광동의 서양선박으로 절강성에 와서 서양상인과 결탁하는 자는 두 성의 해관이 엄히 단속하여 처리하라." 건륭22년정월8일(1757년 2월 25일), 건륭제는 민절총독 카르지샨에게 보낸 조서에서 다시 이렇게 썼다: "절강성 닝보는 해관이 있지만, 광동성과는 다르다. 그리고 절강의 풍속은 쉽게 사고를 일으키는 편이니, 서양상인이 나타나게 되면, 반드시 사고가 날 것이다. 만일 법으로 이를 막지 않으면, 장래 절강으로 오는 자가 늘어날 것이고, 닝보는 또 하나의 서양선박이 밀집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내지의 해상방어가 긴요하다." 이월, 건륭제는 다시 양광총독 양응거에게 조서를 내린다: "근년들어 간사한 상인들이 결탁하여 이익을 꾀하고 있다. 서양선박이 닝보로 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장래 오랑캐의 선박이 운집하고 오래 머물게 되면 또 다시 광동성의 마카오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안의 요지이고, 백성의 풍속에도 모두 관계있다."
이들 조서는 청나라정부가 외국인들이 자주 닝보라는 해안요지로 찾아오는 것을 걱정하고 오래되면 폐해가 생기고, 다른 사고가 일어날까봐 우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더더구나 통사나 순라병사들이 외국인과 결탁하게 되고, 오래 시간이 지나면 닝보가 제2의 마카오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동시에 그들은 외국인들이 닝보에 많이 와서 살게 되면 그 곳의 풍속에도 영향을 주고 오염을 시켜, 해안방어에도 위협적이라고 보았다. 더더구나 중국인과 서양인이 섞여살면, 쉽게 사고가 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건륭22년 십일월 십일(1757년 12월 20일) 양광총독 이시요에게 보내는 조서에서 이렇게 썼다:
서양상선들에게 알리라: 앞으로 광동만 정박해서 교역할 수 있다. 다시 닝보로 와서는 안된다. 만일 다시 오면 원래의 선박을 광동으로 되돌려 보내겠다; 절강의 해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처리하면 장래 절강으로 오는 외국선박은 두절시킬 수 있다. 절강성의 해안방어도 잘 이루어질 수 있고, 광동의 백성들의 생계등에도 모두 도움이 된다.
같은 날, 민절총독 양응거에게 내린 조서는 다음과 같다:
양응거에게 말한다. 나의 뜻을 서양상선들에게 알리라: ...이번에 민절로 전근시키니, 광동이나 절강이나 모두 원래 구분이 없다. 다만 이곳은 원래 서양선박이 모이는 곳이 아니었다. 장래 광동에만 정박해서 교역하게 하라. 다시 닝보로 가지 못하게 하라. 만일 다시 오면, 반드시 원래의 선박을 광동으로 되돌려보내라. 절강해안의 항구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미리 월관을 통하여 당해 상인들에게 주지시키도록 하라.
이 금지령에 따라, 배를 몰고 와서 무역을 하던 외국인은 다시는 광저우 이외의 다른 항구도시에서 무역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외국상인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범위가 다시 규정된 것이다. 이 무역금지령을 반포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영국상인 홍임휘가 닝보에서 무역을 한 것때문이었다. 동시에 관청은 이 일을 시작한 영국인 홍임휘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더이상 그를 단순한 외국통역으로 보지 않게 된 것이다.
홍임휘 및 그와 함께 중국어를 배우던 견습생 베빈을 태운 온슬로호가 1758년 1월 17일(건륭22년 이월팔일) 주산(舟山)의 관원을 만난다. 주산의 관원들은 내년에는 다시 올 수 없다고 말해준다. 왜냐하면 총독이 이미 더 이상 외국선박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온슬로호"는 마카오에 도착한 후 홍임휘와 베빈은 남도록 결정한다. 전산채의 군민부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고, 홍임휘가 마카오에 머무는 것을 누가 담보하는지 확인한다. 광동총독도 금방 영국인들에게 서면으로 명령을 내린다:
본관은 지현, 서리 및 관련인들에게 알린다: 마카오항구로 가서 상술한 두 명(브란트와 홍임위)을 조사하라. 그리고 이 글을 그들과 모든 외국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다음 사항을 알게 하라: 이후 모든 선박은 반드시 광저우 항구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상을 선택하여 정상적인 무역을 하라...현재 본관은 홍임휘에게 서신을 하나 주니, 유럽으로 되돌아간 후, 전체 외국상인들에게 통지하라. 이후 오는 선박은 절강성 해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건륭23년 정월초구일(1758년 2월 16일), 양광총독 이시요는 중국의 외국상인을 모아서, 정식으로 이후 광저우 항구 한 곳에서만 무역을 진행할 것을 알린다. 이로써 강희23년(1684년)이전에 외국상인이 아무 항구나 선택하여 무역하던 합법적인 시절을 끝나게 된다. 홍임휘등이 열었던 무역의 길이 다시 봉쇄된 것이다.
앞은 막히고 뒤에는 쫓아오고: 영국 '사품관'의 고어장(告御狀)
1개항구 통상정책이 회복되자, 영국상인들은 천진하게 이것은 중국지방관원들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북경조정은 모르는 일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사람을 북상시켜, 직접 중국조정과 접촉하여, 실상을 알리고 국면전환을 하고자 시도한다.1758년(건륭23년), 홍임휘등은 금지령에 따라 닝보로 가지 않았다. 다만, 1759년(건륭24년), 동인도회사 이사회의 지령에 따라, 6월 13일(오월 십구일), 홍임휘와 다른 13명의 상인 및 선원은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항해하여 6월 24일(오월 삼십일) 정해 바깥의 사초도라는 곳에 도착한다. 거기서 파총 사은을 만난다. 사은에게 저지를 당한 홍임휘는 중국측에 그들이 닝보로 가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사은은 급히 영국인들이 왔다는 것을 상부에 보고한다. 이 사건은 전체 절강의 관리들을 놀라게 만든다. 순무는 명을 내려, 제독, 총병, 도태로 하여금 정해로 가서 영국선박 "승리호"에 실린 모든 총포를 검사하고, 무역을 금지시키며, 즉시 축출시키도록 한다.
홍임휘의 일기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6월 25일...오후에 두 명의 군관과 1명의 문관이 주산에서 왔다. 총병과 지현의 명령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직접 성에서 보낸 것이다. 황제가 이미 여하한 선박도 절강으로 와서는 안된다고 명령했고, 광저우가 그들(유럽인)이 머무는 항구이므로, 이 항구는 유럽인과의 무역이 금지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 작은 배를 타고 왔는데, 절강총독과 관원들에게 청원서를 바치기 위함이다. 그들이 황상에게 우리가 광저우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점을 전해주기 바란다...다만 그들은 접수를 거절했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즉시 떠나야 한다...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역풍을 맞으면서 광저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는 공급품이 이 여정을 소화할만큼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말했다. 그들도 도와줄 수 없다고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구매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다른 곳으로 가서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작은 배를 상륙시켜 물을 긷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각 섬에서 우리를 감시하도록 보낸 배들이 물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었다. 여러번 버티다가, 그들은 우리의 청원서를 받았고, 총독에게 전했다. 나는 그들의 태도와 총병이 이들에게 내린 명령이 이처럼 단호한 것을 보고, 사정이 회복불가능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용히 그곳을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변호이유로 그들의 말을 반박하기 어려웠고, 그리고 분쟁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가 천진으로 가는데 불리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닝보에서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천진으로 가려고 했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황혼무렵에 출발해서 조류를 따라 항해했다."
절강측에서는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영국인이 한 말에 안심하지 않았다. 총병 나영홀은 수비 진조룡에게 병선을 이끌고 "승리호"를 뒤쫓아 남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3일후, 진조룡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영국선은 이미 남하했다고. 누가 알았으랴. 홍임휘는 그들을 감시하던 중국병선이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바로 항로를 변경하여, 내해를 따라 천진으로 몰았다. 7월 18일(육월 이십사일), 홍임휘의 배는 홀연 천진 대고구(大沽口)밖의 백하구(白河口)에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하여 천진에 도착한 첫번째 영국인이 된다. 홍임휘는 자신의 뛰어난 한어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사하러온 중국관원과 끈기있게 대화했다. 그리고 수천냥의 은자를 뇌물로 주고, 마침내 7월 21일(육월 이십칠일) 중국관원을 설득하여 중문으로 쓴 청원서를 천진도태 나친아, 지부 영육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
이 두 중국관원은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고, 직접 하간부로 가서 직예총독 방관승에게 보고한다. 방관승은 홍임휘의 청원서를 받은 후 역시 임의로 처리하지 못하고, 빠른 속도로 북경에 보낸다. 그리고 그가 파악한 상황을 같이 써서 보낸다.
그 안에 관화를 아는 자가 있는데 한명은 홍임(홍임휘)이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과 배는 모두 잉글랜드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서 글을 올리러 왔고, 나를 문관처에 데려가주면 바로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그후 서양인 홍임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일행은 열두명이다....나는 영국 4품관리이고, 광동 마카오에서 사업을 한다. 상인 여광화가 나에게 은 5만냥을 빚지고도 갚지 않는다. 일찌기 아문에 소장을 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총독아문에 다시 소장을 냈지만,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절해 닝보의 해안에서 글을 올렸지만, 역시 받아주지 않았다. 이제 본국의 부서에서는 나를 천진으로 보내어 북경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 다시 힐문하니, 그저, "나는 그저 현재 이 몇 마디 관화만 할 줄안다. 나머지는 글로 썼다."고 하였다.
홍임휘는 중국인의 심리를 잘 알았다. 자기가 "잉글랜드 4품관"이라고 한 것은 중국인들은 고관이라면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는 일부러 자신의 중국어실력이 좋지 않은 것처럼 하였고, 대화를 하기 힘들다고 하였으며, 그저 번역을 한 보고서에 자신의 뜻이 모두 실려있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관원으로 하여금 글을 자세히 읽어볼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건륭제는 보고서와 홍임휘의 소장을 자세히 읽어본다. 그리고 이를 아주 중시한다. 이 일은: "외국오랑캐에 관련된 일이고, 국체에 관련된 일이다. 반드시 철저히 추궁하여, 천조의 법을 드러내도록 하라." 동시에, 건륭제는 일개 외국인이 몇마디 중국말을 배워서, 감히 천자에게 직접 고소장을 내는데 대하여도 아주 화를 냈다. 그는 여기에 분명히 "절강성의 간사한 상인들이 결탁해서, 서양상인을 대신하여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올리도록 종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법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외국인이라면 언어의 장애로 이런 글을 써서 올릴 수 없을 것이라고 본 점은 건륭제나 다른 대신들이나 의견이 일치했다. 예를 들어, 절민총독 양정장도 "홍임이 올린 글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글자나 어구가 절대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내지에 간사한 무리가 있어 상인과 결탁하여 글을 써주었을 것입니다" 건륭은 그날로 명을 내려 그의 심복이자 어전시위 겸 복주장군인 신주와 황실종족중의 근신이자 만주족관원급사중인 조전을 흠차대신으로 보내어 각각 복주와 천진으로 떠나게 한다. 광주에서 발생한 영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을 조사하게 시킨다. 이어서 황상은 다시 명을 내려, "이시요와 함께 엄히 조사하라"고 말한다. 건륭24년 칠월초이틀(8월 12일), 영국 타이판들을 무시하고, 거리를 유지하던 양광총독 이시요는 돌연 친히 영국인들을 불러들인다. "그는 통역을 통하여 전했다, 그는 홍임휘가 다시 광저우에 오는 것을 금지한다고. 만일 홍임휘가 다시 임의로 온다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도 똑같은 대우를 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주 놀랐다. 홍임휘가 감히 황상이 닝보무역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후에, 감히 갔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말했다. 홍임휘는 회사의 명령을 받아 간 것이다. 그 스스로 주장해서 간 것이 아니다...그는 홍임휘는 마카오에게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첫번째 배를 타고 유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각종 말로 그의 독단적인 명령을 거두어들이도록 설득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홍임휘는 흠차대신 조전을 따라 광저우에 도착한 후에, 동인도회사 광저우위원회는 "대신을 환영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고, 이 기회에 홍임휘에게 쪽지 하나를 전달한다. 내용은 그가 떠난 후에 이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적었다. 그는 성안에 머물게 하고 아무와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관리회의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우리는 총독, 장군과 대신에게 홍임휘를 상관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렇게 해야 우리의 억울한 점을 소상히 밝힐 수 있다고 말했다."
고소장은 실패하고, 오히려 감옥에 갇히게 된다.
영국인들은 너무나 천진했던 것같다. 흠차대신이 이번에 온 것은 영국상인들이 광저우에서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를 알아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빨리 홍임휘가 천진으로 와서 고발함으로 발생한 정치적인 풍파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흠차대신들은 조사를 한 후에, 중국측에 몇명의 희생자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처리해버린다. 이어서 그들은 홍임휘에게는 "겉으로는 글을 올리는 것이지만 실제는 정부입장을 탐색하려 한 것이다." "내부의 간상과 결탁하여 다른 통상항구를 열고자 기도했다"는 등의 죄명을 씌운다. 처음에 이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세명의 대신인 신주, 조전, 이시요는 건륭24년 구월초사일(1759년 10월 24일) 황상에게 상대적으로 온화한 처리방안을 올린다. 단속을 강화하고, 이전의 행위에 대한 처벌조치는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이었다.
신등은 홍임휘의를 조사했는데, 그는 무역한지 오래되고, 중국어를 잘 알고, 내지의 상인들, 통역, 매판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도 언변이 있어 많은 외국상인들이 그의 말을 잘 듣는다. 다만 현재 이 사건에서 고소한 내용은 원인이 있는 것이니 죄를 묻기가 어렵다...시시때때로 조사를 강화하고, 엄중히 방비하여야 한다. 만일 그가 조용히 법을 지킨다면, 규정대로 무역을 하도록 하고, 만일 내지의 간민과 결탁하거나, 금지령을 어기는 짓을 하면 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할 것이다.
다만, 황제는 이 보고서에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주비(朱批)를 달았다:
즉시 홍임휘를 축출하여 귀국시켜라. 그리고 이로써 여러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다른 곳의 통상항구를 개항하게 하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라.
이 주비에 따라, 홍임휘는 9월 21일(팔월 초하루), 석방되어 영국상관으로 돌아온다. 그후, 총독은 즉시 중국을 떠나도록 명령한다.
11월 15일(구월 이십육일), 두명의 흠차대신이 귀국하여 전체사건의 처리상황을 보고한다. 홍임휘 문제의 처리는 이로 인하여 다시 급변하게 된다. "1759년 12월 6일, 광저우의 총독이 홍임휘를 만나려고 하였다. 그는 홍임휘를 불러오기 전에, 이것은 황상의 명령이라고 밝혔다. 그를 마카오로 3년간 축출한다고 했다. 기간이 만료되면 영국으로 돌아가고 영원히 중국으로 되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이는 그가 닝보로 간데 대한 징벌이었다. 황상이 일찌감치 닝보에서 무역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령한 것을 어겼기 때문이다." 홍임휘는 마카오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 감금되었다. 중국인들은 그와 타이판들이 서신왕래하는 것을 금지한다. 영국상관은 1760년(건륭25년)에 그로부터 유일한 서신을 받아본다: "나는 새장같은 4칸자리 작은 집에 갇혀 있다. 모든 문과 창은 잠겨있다. 매일 저녁 7기가 되면 꽹과리와 죽통을 4,5번 분 후에 즉시 잠궈버린다. 아침 6시가 되어야 열어준다. 두 사람이 실내에 자면서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당신들이 의사에게 말해달라. 나의 각부종이 심하다. 나는 큰 신발도 신을 수가 없다. 발에 3.4인치짜리로 색깔이 있게 부어올랐다. 발을 뻗으려면 아주 아프다." 1762년 11월(건륭27년 구월)이 되어서야 석방된다. 거의 3년간 갇혀 있었던 것이다. 홍임휘가 갇힌 후에, 광저우의 영국상인들은 다시 언어장애의 고통을 겪는다. "타이판들은 중국문건을 번역하고 항의서를 한문으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들은 그저 광동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여 번역하게 할 수 있었다. 요 몇년동안은 홍임휘는 번역일을 아주 잘해냈었다." 바로 이 해의 3월 29일, 광저우위원회의 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늘 우리는 청원서를 총독에게 올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통사를 찾아서 한문으로 번역했는데, 그것을 번역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7월 10일, 양광총독은 영국인들이 호소할 내용을 써서 올리라고 윤허했다. 영국인들은 행상(行商)으로 하여금 청원서를 한문으로 번역하게 했다. "다만 우리는 행상 혹은 통사로 하여금 우리의 청원서를 번역하도록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총독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대신을 만나게 되더라도, 우리를 위하여 억울한 점을 번역해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번에 홍임휘가 천진까지 올라가서 황제에게 고소장을 올린 것으로 인하여 일어난 풍파는 청나라지방관리의 부패와 행상보상제도의 폐단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해관감독 이영표가 파면되고, 두 명의 상인이 효수, 유배되는 것으로 끝난다. 홍임휘는 3년간 감금되었다가 출국명령을 받는다. 홍임휘사건은 통상항구를 늘이고, 통상제한을 취소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후 근 80년간 중국은 쇄국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매카트니가 사신으로 중국으로 올 때는 이 사건이 일어난지 31년이 지난 후였다. 홍임휘도 이미 사망했다. 이때 부사 스탠튼은 사신일행을 위하여 통역원을 찾았는데, 그때 홍임휘가 유일하게 중국어를 배워서 아는 영국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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