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시황)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했을까?

중은우시 2009. 1. 14. 21:27

소전

 

예서

 

 

 

역사서에서는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 관하여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첫째,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할 필요가 있었을까? 전국시대에 각 나라가 사용하는 개별적인 글자의 형태는 아마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모두 하나의 시스템에 속하는 문자을 것이다. 갑골문에서 일맥전승된 바로 그 상형문자이다. 중국은 외국처럼 서로 다른 언어의 기초하에 서로 다른 알파벳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둘째, 진나라가 전체중국을 통치한 기간은 아주 짧다. 겨우 10년가량이다. 그렇지만, 일종의 문자가 민중에게 널리 보급되어 받아들여기기까지는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고대에는 기술, 교육이 발달하지 않고, 인쇄술도 보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문자를 전국에 걸쳐 보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 수가 없다. 진나라의 정책중 단기간내에 효과를 본 것이 어떤 것이 있는가? 별로 없지 않은가.

 

셋째, 왜 다른 제국들 예를 들어, 로마, 페르시아와 같은 나라들도 분명히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행정문서를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을텐데, 중국처럼 문자가 통일되지 못하였을까? 어떤 제국은 수백년을 들여 통일문자를 보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주(周)나라는 통일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상나라는 갑골문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량표준과 도로너비등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주나라는 이미 표준화된 국가이고, 각급 관리의 복장, 예의도 모두 구체적이고 통일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의 문자통일, 도량형통일을 얘기할 때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거동궤, 서동문(車同軌, 書同文, 수레의  바퀴는 같은 것을 쓰고, 글자도 같은 문자를 쓴다)"이다. 그런데, 이 글의 출처는 바로 <<중용>> 제27장에 나오는 "금천하, 서동문, 거동궤, 행동륜(今天下, 書同文, 車同軌, 行同倫)"에서 나온 것이다. 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쓴 것이며, 사경중 하나이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551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손자인 자사가 아무리 장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조부보다 60년이 지난 후까지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60년정도 더 살았다고 본다면, 아마도 기원전 420년경이 될 것이다. 그때는 아직 전국시대 초기이다.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하기까지는 아직 200여년이 남았다. 도대체 왜 중용을 쓴 주나라때의 이야기를 진시황에게 가져다 붙였는지 모르겠다.

 

이로써 볼 때 자사가 살던 시대에 각국은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 있었지만, 문화, 문자, 수레의 폭, 도덕기준등은 공인된 표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기본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서주(西周)의 문화와 제도를 전승한 결과일 것이다. 세계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새로운 문자를 발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알파벳에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문자체계를 만들어낸 곳은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만한 수준이다. 그런데, 이후 200년동안에 각국이 각자 자신의 문자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도 황당한 일이다.

 

게다가, 진시황의 강권통치는 겨우 10년가량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가 강제적으로 문자를 통일하고자 하더라도 아마 그다지 큰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문자라는 것은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문화습관이다. 바꾸자고 마음먹는다고 바로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문자를 배웠던 사람도 그 정도 기간이면 다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나라가 망한 후에 자신의 옛문자를 부활시켰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진나라의 정책에 각국이 불만을 가졌다면, 문자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히 각국인민들의 바램이 되지 않았겠는가?

 

춘추전국시기에 각국이 회맹을 하거나, 손무가 오왕에게 글을 올리거나, 한비자의 글을 진시황이 읽었다거나, 제자백가가 각국을 주유하거나, 여불위가 각국인사를 끌어모아서 여씨춘추를 편집하게 하거나, 상인들이 사방에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서로 통역을 썼다든지 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통역이라는 직업에 대하여도 기록이 없다. 당시의 문자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최소한 당시사람들이 서로 읽고 이해하는데, 큰 곤란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각지방의 사람들의 사투리는 차이가 컸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원사람들은 초나라사람들의 말을 새소리(鳥語)라고 하여 알아듣지 못했다. 만일 문자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면, 서로 교류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이런 곤란이 있었다면 역사서에 분명이 그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서(隸書)는 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시황의 옥리(獄吏)인 정막(程邈)이 만든 것일까? 1983년 사천성 청산현의 경내에서 전국시대의 묘를 발굴했는데, 두 개의 목독(木牘)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기원전 309년에 진무왕이 승상 감무(甘茂)등에게 국률을 제정하라는 조문이 이었다. 이것은 예서로 쓰여 있다. 이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때로부터 100년이나 앞서는 시점이다. 그러므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비로소 옥리 정일이 예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시황의 "서동문"의 조치는 통일적으로 진나라 소전(小篆)을 사용하게 한 것이다. 다만, 실용이 각도에서 보자면, 소전과 함께 진나라통일이전에 탄생한 예서가 소전보다 훨씬 우월하다. 예서는 소전의 원형을 직선으로 바꾸고, 소전의 필획을 둥근 것을 꺽어지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것을 간결하게 만들고, 서로 연결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켰다. 여러 점을 일획으로 바꾸기도 하고, 여러 획을 여러 점으로 바꾸기도 했다. 필획도 굵고 가는 것이 있으며, 부수도 서로 혼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글쓰기에 훨씬 편리했다. 예서의 출현은 역사적으로는 커다란 진보였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진시황이 소전을 통일적으로 사용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소전보다 간결하고 쓰기쉬운 예서는 민간에서 통용되는 문자로서 성행하였따. 심지어 죽은 사람들까지 예서를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예를 들어, 1975년 발굴된 호북의 한 민간묘를 발굴했는데, 묘주인은 진시황 30년(기원전217년)에 사망한다. 그때는 "서동문"정책이 실시된지 4년이나 지난 대였다. 그렇지만 묘에 남겨진 문자는 여전히 예서이다. 이렇게 보자면 진시황의 문자통일은 역사적으로 진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의 후퇴이다. 그리고 당시에도 그다지 통일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행정의 필요상 공식문자를 통일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이것은 절대로 진시황의 이러한 정책이 나온 배경이 다른 나라처럼 여러가지 문자가 존재했기 때문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나라는 그저 정부문서에 사용되는 표준자체(標準字體)를 통일한 것이다. 나중에 한나라도 진나라처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부공식문서의 표준자체는 있었다. 그리고 한나라가 사용한 것은 진나라의 소전체가 아니었다. 이로써 볼 때, 진나라의 이러한 정책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든 아니든 별 차이가 없다. 만일 현재 중국정부가 공식문서에서는 반드시 예서를 쓰라고 하고, 해서, 초서, 행서는 못쓰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자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해서, 초서, 행서, 예서를 서로 다른 문자간의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로써 볼 때, 진시황이 문자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중국의 문자는 원래 통일되어 있었다. 구별이 있다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글자형태를,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다른 글자체를 사용했다는 것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