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위목색자(韋木色子)
기원전 230년에서 기원전 221년까지, 진나라는 6국을 멸하였다. 진시황은 중국최초의 통일된 제국을 건설한다. 그는 역사무대에서 '천고일제(千古一帝)'로 칭해진다.
진시황은 파천황의 대업을 이루었고, 다민족의 통일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생명은 장대한 역사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시황은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가?
견해1: 한가지 견해는 진시황이 "놀라고 피로가 쌓였으며' '외상으로 유발된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근거는 진시황의 죽음에 대하여 <<사기>>에 많이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각각 <<진시황본기>>, <<이사열전>>, <<몽염열전>>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인이 명확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어려서부터 질병을 많이 앓았고, 체질이 허약했다. 그는 사람됨이 강퍅하고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친히 결정했다. 매일 문서만 120근을 보았으니, 업무로 인한 피로가 극도에 달했다. 거기에 순유를 떠난 7월의 고온으로, 이상의 여러 요소들이 복합되어 도중에 병이 도져서 사망한 것이다. 그가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간질이라고 한다. 간질은 일반적으로 4시기로 나누어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어지럽고, 위가 좋지 않다가, 이어서 돌연 의식을 잃고,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색이 푸르고 자색을 띄며, 동공이 풀리고 호흡이 잠시 멈춘다. 그 후에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고, 입에서 흰 거품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수십분후에 정신이 돌아온다. 곽말약은 <<사기.진시황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진시황은 사람됨이 봉준(蜂準. 메부리코로 해석)에, 장목(長目), 집오응(執烏膺, 새가슴으로 해석), 시성(豺聲, 승냥이소리)을 가지고 있으며, 은혜에 박하고 호랑이와 늑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진시황이 어려서 연골증을 앓았고, 기관지염을 앓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가 어른이 된 후에 가슴이 새와 같고, 목소리도 승냥이와 같았다. 나중에 정무로 바빠서 뇌막염과 간질등의 병세가 추가된다. 나중에 진시황이 황하를 건너는데, 간질병이 발작했고, 뒷머리가 청동빙감에 부닥친다. 이리하여 뇌막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된다. 그리하여 혼미상태에 빠진다. 마차가 사구에 도착한 다음 날, 조고, 이사는 진시황이 이미 죽은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기원전218년, 진시황은 신선에게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양무(오늘날의 하남성 양현)의 박랑사 부근으로 간다. 돌연 괴이한 소리가 들리더니, 큰 철추가 그의 뒤에 있는 마차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마차는 박살이 난다. 이것은 누군가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였다. 진시황의 놀라는 증세는 이때부터 생겨난다. 그후 자주 꿈속에서 바다의 괴물과 싸우고,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 기원전211년, 동도(낙양)에는 "시황제가 이 땅에서 죽는다"라는 글이 쓰여진 운석이 발견된다. 가을에는 다시 사신이 신선에게 붙잡혀서,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진시황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점술가의 도움을 받아, 그는 기원전 210년 제5차순유에 나선다. 하나는 재난을 막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불사약을 찾기 위함이다. 이번에 먼 길을 다니느라 그는 피로가 쌓였다. 함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간질이 발작한다. 머리를 자리 곁에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만들어둔 청동빙감(靑銅氷鑒)에 부닥친다. 그리하여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리하여 일찌기 머리의 결핵균이 활동을 왕성하게 하게 되어, 두통, 어지름증, 발열등이 나타난다. 거기에 몸이 바싹 마르고 변비, 구토에도 시달린다. 당시의 의료수준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런 외상으로 유발된 내부의 질환은 불치병이 되었다. 거기에 장거리 여행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병세를 악화시킨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사구에서 사망하는데, 이런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견해2: 궁중쿠데타로 죽었다는 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은 주로 진시황의 사망상황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호해(胡亥)와 조고(趙高)중 누가 주모자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엇갈린다.
호해주모자설
이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은 곽말약이다. 그는 진시황이 어린아들 호해에게 살해당하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시황이 비록 병으로 쓰러졌지만, 머리를 청동빙감에 부닥친 후, '대뇌와 뇌막과 전두골에 충경이 발생하고, 결핵군의 위세가 이 외상으로 돌연 강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개략 2,3주일이 지나야 죽었을 것이다' 이 기간동안, 사구에서 함양으로 돌아올 시간이 충분했으므로, 며칠만에 바로 목숨을 잃지는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둘째, 당시 진시황은 발열이 있었지만, 의식은 분명했다. 그는 당초 공자 부소와 공신 몽염을 멀리했던 것을 생각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진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는 이사나 호해를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친필로 목간유조(木簡遺詔)를 부소에게 남긴다. "짐은 천하를 순유하며, 명산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지냈다. 그렇게 하여 목숨을 연장시켰다. 불행히도 돌아가는 도중에 병이 재발해서, 목숨이 오늘내일 하니, 병력은 몽염에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주재하라" 이 조서는 조고로 하여금 상군의 부소에게 보내도록 시킨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와 결탁하여 호해를 새 황제로 세우기로 정하고, 몰래 조서의 내용을 바꾸어 버린다. "부소와 몽염을 사사한다" "병력은 비장 왕리에게 넘겨라"
부소와 몽염이 권력을 장악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진시황이 다시 깨어나서 조서를 보내지 않았는지를 물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는데, 진시황이 사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죽고만 것이다. 그들이 다음 날 아침에 온량거(溫凉車)를 여니, "진시황이 오른쪽 귀에 검은 피를 흘리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돌맹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곽말약은 "이것은 호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사, 조고마저도 몰랐던 일이다" "만일 현재라면, 해부칼로 해부해보면 오른쪽 귀의 안에 3촌길이의 쇠못이 박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호해는 황위를 빼앗기 위하여 진시황을 암살한 것이다.
조고주모자설
어떤 학자는 실제로 조고가 모해를 실행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조서, 옥새는 모두 조고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황위계승을 결정짓는 권한도 그와 이사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해는 설사 부친을 시해하더라도 조고, 이사의 도움이 없이는, 황위를 얻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조고는 항상 황제의 곁에 있었고, 기회를 보아 손을 쓰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어, 호해보다 훨씬 편리했다.
조고의 최종목적은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진시황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진시황이 제5차순유때 병이 심해지자, 이는 그에게 있어서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였다. 진시황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유조를 고칠 수 있고, 그의 계모를 하나하나 실행할 수 있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에 조고는 호해를 설득하고 이사를 위협하는 수단을 쓴다. 세 사람은 밀모를 거쳐, 진시황의 조서를 가짜로 만들어 반포한다. 호해가 황위를 계승하게 만든다. 동시에 진시황의 명의로 부소가 아들로서 불효하고, 몽염이 신하로서 불충하다고 질책하며 자살을 명한다. 부소가 자살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들은 후에, 호해, 조고, 이사는 비로소 마차를 몰아서 함양으로 신속히 되돌아간다. 신하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하여, 가마는 지름길로 함양에 가지 않고, 여전히 순유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참을 돌아서 함양으로 간다. 여름에 기온이 높아서, 진시홍의 시신이 이미 부패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호해일행은 사람들에게 물고리를 많이 사서 가마에 싣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따. 함양에 도착한 후, 호해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진이세(秦二世)이다. 조고는 낭중령(郎中令)이 되고, 이사는 여전히 승상(丞相)을 맡는다. 다만, 조정의 대권은 조고의 손아귀에 움켜쥐어진다. 조고는 음모가 성공한 후에, 곁에 있는 사람들부터 독수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함정을 파고 이사를 죽음의 길로 몰아버린다. 이사는 조고의 음모를 발견한 후, 조고를 고발하는 글을 올렸지만, 진이세 호해는 조고를 편들어 이사의 죄를 묻는다. 결국 이사는 함양에서 허리를 잘려 죽는다. 조고가 승상에 오른다. 그는 궁궐의 금지를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중승상(中丞相)"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진시황의 죽음은, 감독이 조고이고, 부소, 몽염, 이사, 호해등은 모두 그에게 지배당한 희생자들임을 알 수 있다.
진시황의 사망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설이 있다. 2천여년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마천이 고의로 그랬는지 아니면 실수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진시황의 죽음은 천고의 의문으로 남았고, 지금으로서는 고증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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