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2009년 6월 13일, 24년만에, 진시황의 병마용 1호갱은 다시 제3차발굴을 개시했다. 그날 오후 1시경, 고고발굴단은 발굴의식을 거행했고, CCTV, 섬서TV도 현장생중계를 진행했다. 이리하여 진시황릉은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진시황릉은 정말 도굴된 적이 없는 것일까?
<<여씨춘추. 안사>>에서 말한 것처럼, "자고이래로...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파헤쳐지지 않은 묘가 없다." 중국의 도굴사상, 진시황릉을 노리는 도굴범은 역대이래로 끊이지 않았었다. 진시황릉은 무수한 부장품이 들어있는데, 어느 도굴범이 욕심내지 않겠는가? 서초패왕 항우가 진시황릉을 파려고 첫 삽을 든 후에, 진릉은 항상 도굴범들에게 파헤쳐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민국시대에 들어서서, 국민당의 장군들도 진시황릉을 도굴할 마음을 먹었었다. 상부에는 군사기지를 수리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진시황릉을 노렸던 인물들 중에서, 황제가 한 명 있다. 그는 바로 16조때 후조(後趙)의 황제인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 석계룡(石季龍)이다. 이 역사적 사실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석계룡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후조의 창시자인 석륵(石勒)부터 얘기하기로 하자.
석륵(274-333)은 자가 세룡(世龍)이고, 상당(上黨, 현재의 산서성 동남부) 부무(部武)사람이며, 갈(羯)족이다. 석륵의 묘호는 "고조명황제(高祖明皇帝)"이다. 그는 전설적인 황제이다. 일찌기 인신매매범에게 끌려가 산동에 팔려갔다. 다행히 주인이 풀어주었는데, 석륵의 장점이라면 말을 잘 고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말을 기르는 급상(汲桑)을 알게 되고, 이때부터 천하를 얻기 위한 생애를 시작한다.
석륵은 먼저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만든 전한(前漢, 前趙의 전신)에 투신하여 대장군이 된다. 319년, 석륵은 전한을 벗어나, 스스로 '대선우(大單于)"가 되어, 양중(襄中)에 도읍을 정한다. 유요(劉曜)의 전조(前趙)와 구분하기 위하여 역사에서는 후조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330년, 석륵은 '대조천왕(大趙天王)"이라 고쳐 부르고, 그 해에 "황제"를 칭한다.
주목할 점이라면, 석륵은 일생동안 좋은 일을 적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교육을 중시한다든지, 한화정책을 쓴다든지, 오늘날의 초등학교 과거시험제도를 모두 석륵이 만들었다. 석륵이 큰 인물이 되어 후에 황제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21살어린 조카 석계룡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계룡(295-349)은 원래 이름이 석호(石虎)이고 자가 계룡이다. 피휘를 위하여 자로 불렀다. 석계룡이 6,7세가 되던 해,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용모가 기이하고 기골이 장대하니, 더할 수 없이 귀하게 될 것이다." 석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을 따라 살았다. 석륵의 부친이 그를 길러주었게 때문에, 적지 않은 사가들은 그를 석륵의 동생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석계룡이 17살이 되던 해 비로소 석륵을 따라 천하를 정복하는 길에 나선다. 석호는 전투에 용맹하였고, 활과 말을 잘 다루었다. 석륵은 이 조카를 아주 좋아했다. 시중(侍中)의 직위를 주고, 개부(開府)할 수 있게 해준다. 나중에 중산공(中山公)에 봉한다. 석륵이 황제를 칭하자, 석계룡을 태위(太尉)로 삼고, 상서령을 내리며, 중산왕에 봉하며 식읍 만호를 내린다.
석계룡은 공로를 많이 세우다보니 자연히 야심이 커졌다. 석륵은 생전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석계룡의 당형인 석홍(石弘)을 "대선우"라고 불렀다. "대선우"는 태자 즉 권력승계인에 해당한다. 석계룡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 컸다. 333년,15년동안 황제 자리에 있던 석륵이 죽자, 원래 황제가 되고 싶었던 석계룡은 즉시 황제에 오르면 나쁜 영향이 발생할까 우려하여, 먼저 석홍을 황제에 앉힌다.
석홍은 실제로 허수아비였다. 석계룡이 모든 군정대권을 조종했다. 스스로 승상(丞相), 위왕(魏王)이 되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황제에 오르는데 장애를 모조리 제거한다. 석계룡은 석륵의 중신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석계룡은 스스로 황제가 된다. 석륵을 본받아 "대조천왕"이라고 칭한다. 349년에 한족의 제도를 본받아, 황제로 개칭하고 '업성(鄴城, 지금의 하남성 경내)으로 천도한다.
후조는 중국역사상 33년간 존속하는데,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 및 강소, 안휘, 감숙, 요녕등의 넓은 땅을 통치한다. 비록 중원을 통치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석계룡은 도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족의 묘에는 대량의 재물을 부장품으로 넣어둔다는 것을 알고, 골동품수장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던 석계룡은 도굴을 시작한다. 국내의 조금이라도 유명한 묘는 모조리 도굴하여 보물찾기에 나선다.
석계룡과 석륵의 숙질은 모두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석륵은 이미 10개주의 지역을 차지하고서도, 전쟁과정에서 대량의 금은보화를 강탈하였고, 집안에 수많은 외국의 보물들을 수장하고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도굴을 통하여 재물을 더 많이 얻고자 한다.
석계룡은 원래 춘추시대의 명인인 조간자(趙簡子)의 묘를 도굴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조간자의 묘에는 물이 너무 많이 차있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도굴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담이 커졌다. 진시황의 능묘를 도굴하려고 꾀한 것이다.
진시황릉은 일찌기 진나라가 망할 때 서초패왕 항우에게 도굴된 바 있다(이에 대하여는 다시 상술하겠다). 그 후에 다시 "목동소지궁(牧童燒地宮)"의 설이 있다.
"목동소지궁"설은 <<한서.유향전>>(권36)에 나온다. 당시 양을 치던 어린아이가 양을 진릉 부근에서 치고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나중에 그 양이 깊은 동굴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린아이는 횃불을 들고, 동굴을 들어가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아왔다.
원래 이 깊은 동굴은 진시황릉의 묘에 있는 지궁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아이는 아래로 깊이 들어가다가 조심하지 않아서 횃불을 놓쳐버린다. 그리하여 지궁이 불에 타고, 화재가 발생한다. 진시황의 관도 불에 타서 없어졌다. 이 기록은 <<수경주>>, <<삼진기>>등의 책에도 실려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를 깊이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시 나중에 한나라말기에 적미군(赤眉軍)이 진시황릉을 도굴한다. 적미군은 한나라황제의 능을 모두 도굴한 후에, 다시 눈길을 진시황릉으로 향했다. 당시 반란군은 병기가 부족했다. 그리하여 고대능묘에서 청동기를 도굴하여, 용해시킨 후에 전쟁때 필요한 동모대도(銅矛大刀)를 만들었다. 반란군은 어떻게 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당시의 사회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한시대 중엽에, 관청과 민간에서는 모두 고대묘에서 청동기를 도굴해서, 이를 가지고 동전과 금속기기를 만들었었다.
적미군이 진시황릉을 주목하게 된 것은 아마도 당시 진시황릉을 만들 때 대량의 귀금속을 사용했고, 많은 청동을 사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관을 안치하기 전에 장인들은 먼저 용화된 구릿물을 바깥에서 부어서 1층을 만든 후에 다시 관을 하관시켰다고 생각했다. <<사기. 진시황본기>>(권6)의 "하동이치곽(下銅而致椁)"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적미군은 진시황릉의 지궁을 연 후에, 안에 있는 동곽(銅椁)을 부숴거리고 구리를 용해시켜 병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적미군이 진시황릉의 동곽으로 병기를 만들었다는 전설에 대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어떤 사람은, 적미군 사병이 유방의 황후 여치의 시신을 시간하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황당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석계룡은 마찬가지로 진시황릉에 들어있는 청동기를 탐냈다. 사서에는 석계룡이 진시황릉을 도굴한데 대하여 아주 간단히 적고 있다. 바로 한 마디 이다: "우사굴진시황총, 취동주주이위기(又使掘秦始皇塚, 取銅柱鑄以爲器, 다시 진시황무덤을 발굴하게 하여, 구리기둥을 취해서 기물로 주조하였다)"
비록 단 한마디이지만, 정보량은 상당하다. 첫째, 석계룡은 진시황릉에서 구리기둥과 같은 유형의 청동기를 훔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구리기둥을 고온의 용광로에서 녹였다는 것이며; 셋째는 용해한 구리기둥으로 기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석계룡이 생전에 골동품을 수장하기를 즐겼던 것과 비교하면, 그가 주조한 기물은 아마도 적미군과 같은 병기가 아니라, 아마도 진열할만한 물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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