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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성씨

by 중은우시 2008. 9. 3.

글: 호각조(胡覺照)

 

촉한의 후주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정재갈씨, 제재과인(政在葛氏, 祭在寡人)."  그 의미는 자신은 그저 하늘, 땅, 조상에 제사지내는 의례적인 활동이나 주관할 뿐이고, 군사, 정치, 재정등의 대사는 모두 갈씨(葛氏)성을 가진 대신이 처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갈씨성의 대신은 도대체 누구일까? 삼국시대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을 왜 갈씨라고 불렀을까? 그의 '제갈'이라는 복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제갈량의 조상이 갈(葛)씨였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갈'이라는 단성이 '제갈'이라는 복성으로 바뀐 원인에 대하여는 <<삼국지>>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해석이 있다.

 

첫째, 제갈량의 조부인 제갈풍(諸葛豊)은 일찌기 사례교위(司隷校尉)를 역임했다. 동한때, 전국행정구역은 13개주로 나뉘었다. 그리고 수도는 장안과 낙양이었다. 그리하여, 관중(섬서), 진남(산서남쪽), 낙양, 예서(하남서부)의 일대를 사천(司川) 혹은 사례(司隷)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이 곳에서 명령을 발하면 전국을 통할한다는 뜻이었다. 사례교위라 함은 수도의 치안과 관리를 감독하는 것이었고, 관청소재지는 낙양의 동북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낭야양군(琅邪陽郡, 지금의 산동성 기남)으로 옮겼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는 유명인사는 전 일족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했다. 이주할 때, 일족중 대부분이 따라갔다. 그 마을은 원래 갈씨성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유명한 사람과 한집안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제갈풍이 유명하다보니 그를 찾아오는 외지사람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잘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물으면, '그 마을 사람들은 여러(諸) 갈씨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여기의 '제'는 제군(諸君), 제위(諸位)라고 할 때와 같이 불특정다수를 의미하는 말이다. 성씨의 변화과정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제갈'이 그냥 새로 이사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특유한 성씨가 되어 버렸다. 이는 <<삼국지. 제갈근전>>의 배송지 주석에 나오는 내용이다.

 

둘째, 진나라 말기에 진승, 오광이 난을 이르킬 때, 갈영(葛영)이라는 부하장수가 있었는데 아주 유명했다. 그런데, 억울하게 피살되고 만다. 유방의 한나라는 농민반란을 통하여 건국의 기초를 닦았으므로, 다른 역대통치자들과는 달리, 진승, 오광을 도적으로 능멸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그 공적에 대하여 높이 평가해주었었다. 그리고 사후처리를 잘 해주었다. 한문제때, 어떤 사람이 갈영이 억울하다고 제기했다. 그리하여 갈영은 명예가 회복되고,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해주면서, 후손들을 제현후(諸縣侯)에 봉해주었다. 제현은 현재 산동성 제성이다. 그리고 후작중에서는 두번째로 높은 작위이다. 후작은 높은 순서로, 도후(都侯), 현후(縣侯), 향후(鄕侯), 정후(亭侯) 그리고 채읍지가 없는 관내후(關內侯)가 있다. 갈영의 후손들은 봉지가 제현이므로, 현내에서는 첫손꼽히는 명문집안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현의 이름과 갈씨를 붙여서 '제갈'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러한 습관은 후세에 성씨가 안정화된 이후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원세개를 원항성(항성은 원세개의 고향)이라고 부른다든지, 이홍장을 이합비(이홍장은 합비출신임)라고 부르는 등이다. 관적은 더 이상 성이 아니라 이름을 대신하기는 했지만...이를 통하여 그에 대한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건, "제갈"이라는 성은 동한말기에 마침내 형성되었다. 특수한 가족인 갈씨성에서 전환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제갈근의 아들인 제갈각, 제갈량의 당형제인 제갈탄이 각각 동오와 조위에서 삼족이 멸해지므로, 이 두 갈래에서는 겨우 제갈교, 제갈정의 두 사람만이 살육을 면했다. 그리하여 비록 1800여년을 이어왔지만, 중국의 성씨중에서 제갈씨는 극히 적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