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경친왕(慶親王) 부자: 청나라말기 귀족의 진면목

by 중은우시 2009. 10. 15.

글: 장명(張鳴)

 

청나라말기의 마지막 십여년에 가장 잘나가던 만주귀족은 경친왕(慶親王) 혁광(奕)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던 원세개 마저도 그에게 잘보이려 애썼다. 비록 태평천국의 난 이후에 청나라의 천하는 한족들이 굴기하여 지켜냈다고 말할 수 있고, 총독, 순무의 권한이 강화되고 한족세력이 상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정국을 좌우하던 대신들도 한족이 많고 만주족이 적다고 할 수 있지만, 최고지도자인 서태후가 진정으로 믿었던 것은 역시 만주족이었다. 특히 종실의 친인척과 귀족들이었다. 정규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도 없는 이 여인은 뼛속에서부터 본질적으로 시골사람의 경극영향이 컸다. 위인처세는 모조리 시골냄새가 났다. 뿌리깊은 의식은 "싸움에는 친형제(親兄弟), 전투에 나갈 때는 부자병(父子兵)"이라는 시골사람의 의식이 박혀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조정에서 가장 주요한 대신 예를 들어 수석군기대신이나 총리아문왕대신은 항상 종실귀족이 차지했다. 기용하든 안하든 항상 곁에 두어야, 양심전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경자(庚子)년이후, 경친왕이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종실귀족이 된다. 비록 혈연적으로는 약간 멀었지만, 그러나 혁광은 일처리에 있어서 적어도 큰 일은 흐리멍텅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무술정변때 서태후는 대노하여, 한때 광서제를 폐위하려고까지 했다. 종실귀족중에서는 유일하게 그가 나서서 죽어라 간언했다. 바지에 똥오줌까지 싸가면서. 의화단의 난 때에도 그는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그후 신정(新政)을 할 때에도 대체로 장지동, 원세개등과 일치된 입장을 취했다. 예비입헌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시기에 만주족들은 이백년동안 편안하고 걱정없는 생활을 하다보니, 일찌감치 정기가 사라져버렸다. 황실귀족도 마찬가지였다. 경친왕 혁광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재물을 탐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관매직과 뇌물수수가 일상사가 되어버린다. 바로 이 점때문에, 용모가 동치황제를 닮았다는 것때문에 서태후의 신임을 받던 구홍기(瞿鴻)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또한 당시 바른말을 하기로 이름난 어사삼림(三霖) 즉 조계림(趙啓霖), 강춘림(江春霖), 조병린(趙炳麟)은 여러번 탄핵상소를 올렸다. 그래도 혁광은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혁광보다 사리에 밝았던 서태후가 혁광의 약점을 모를리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아들과 닮았어도 그는 아들이 아니다. 대청강산은 어쨌든 만주족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만주족을 곁에 남겨두어야 했다.

 

혁광의 장남인 대진(戴振)은 부친을 잘 둔 덕에 30살에 새로 설립된 상부(商部)의 상서(尙書)가 된다. 그후 조정된 후에는 농공상부(農工商部)의 상서를 맡는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 새로 발행한 지폐의 위에 인쇄된 것은 모두 대진의 두상(頭像)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년득지(少年得志)의 대진 패자(貝子, 이때 대진의 작위는 패자였다. 친왕 아래의 제4급에 해당한다. 이것만 해도 지위는 아주 높았다. 원래 황제의 아들도 처음에는 패륵, 패자에 봉해졌다)는 어려서부터 비단 옷에 좋은 음식을 먹어서, 돈에 대하여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미녀였다.

 

그리하여, 가장 돈많은 부서의 상서를 맡은, 대진 패자는 두 건의 스캔들을 일으킨다. 첫번째는 기녀와의 사이에 발생했고, 두번째는 여예인(女藝人)과의 사이에 발생한다. 당시 진문(津門, 천진)의 명기로 재색을 겸비한 사산산(謝珊珊)이 있었다. 연회석에서 산산은 대진 패자의 총애를 믿고 상부 관리의 얼굴에 지분을 묻히며 놀았다. 모두 가가대소를 하며 웃고 넘겼고 모두 별 것아니라고 치부했다. 아마도 어느 관리가 술에 취했는지, 연회가 끝나고 문을 나서면서도 지분을 지우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드러난다. 어사가 탄핵을 하였다. 다행히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관리들이 기녀와 놀지 못하게 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그러한 규제가 느슨해져 있었다. 서태후가 이를 알고는 그냥 혼만 한번 내고 끝냈다. 그래도 경친왕 혁광은 아들에게 하루종일 꿇어앉아있게 하는 쇼를 하기는 했다. 외인들이 들어올 때까지 그러고 있는 것으로 징벌을 끝낸다.

 

그러나, 3년이후, 대진 패자의 사건은 더욱 커지게 된다. 이 일은 단지귀(段芝貴)라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이 사람은 북양의 사람으로, 원세개가 이홍장에게서 넘겨받은 오래된 장수이다. 소참에서 병력을 훈련시킬 때 오른팔격이었다. 그리고 단기서(段祺瑞)와도 관계가 밀접했다. 사람들은 단기서를 노단(老段)으로 부르고, 단지귀를 소단(小段)으로 불렀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를 때, 그는 극력 옹립한다. 원세개가 죽은 후에, 단지귀는 민국역사상 무슨 역할을 한 것이 없다. 5.4운동때, 소문으로는 그가 진압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 직환(直)전쟁때에 그는 환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러나 싸움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냥 패배한다.

 

이 당시의 단지귀는 한창 기세가 오를 때였따. 그는 진통제(鎭統制, 지금의 사단장급)를 지내고, 천진경찰업무도 책임졌다. 그는 관직이 좀 더 올라서 한 지방을 다스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의 주인인 원세개도 부하를 계속 승진시키는데 재미를 붙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이 일이 원세개와 관련있다고도 말한다. 어찌되었건, 기회가 왔다. 대진이 명을 받아서 동북삼성으로 가서 공무를 보게 되었다. 천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기로 되어 있어, 며칠간 머물게 되었다. 단지귀는 천진에 있었으므로 그를 ㅈㅂ대했다. 그러다보니 명기, 미녀와 술이 빠질 수가 없었다. 당시 천진에는 유명한 여자예인으로 양취희(楊翠喜)가 있었다. 그녀는 북경과 천진에서 알아주는 여배우였다. 인물도 예쁘고, 공연도 뛰어났다. 14살때부터 무대에 서서 연기를 했다. 당시 중국에서 곤령(坤伶)은 아주 적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금방 인기를 얻는다. 이숙동(李淑同)이 한때 그녀의 재주를 아끼고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인기를 얻은 양취희이지만, 그녀는 그저 양부에게 돈벌어주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연회석에서 양취희가 재주를 뽐내자, 대진 패자는 맛이 가서 온몸이 흐늘흐늘해졌다. 이어서 단지귀가 불에 달구어졌을 때 쇠를 내리쳤다. 높은 가격으로 양취희를 사서, 대진 패자에게 보내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삼성에 총독순무를 두게 된다. 단지귀는 파격적으로 흑룡강순무(대리)로 승진한다.

 

그러나, 배우가 무대를 떠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이 일은 금방 혁광, 대진의 정적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어사 조계림은 바로 탄핵상소를 올린다. 대진 패자는 다시 골치아파졌다. 다행히, 원세개는 일처리가 깔끔한 사람이다.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기 전에, 단지귀는 천진경찰에 있는 친구 양이덕(楊以德)을 시켜, 바로 염상(鹽商) 왕익손(王益孫)을 어레인지한다. 왕익손은 원래 양취희와 옛날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그가 앞장서서 막아낸다. 일시에 아무도 모르게 양취희가 천진으로 되돌아간다. 모든 매매절차는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사실, 원래 그녀를 사는 돈중에 상당부분은 염상 왕익손이 낸 것이었다. 이제 그가 넘겨받으니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건을 조사하던 사람은 이 골치거리 사건을 처리하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시간을 끌다가 사람이 천진으로 돌아오고, 모든 일은 적당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이렇게 일처리를 잘하는 양이덕은 나중에 천진이 경찰두목이 된다. 그리고 5.4운동때에는 천진의 학생운동을 진압하고, 주은래등을 붙잡아 감옥에 넣기도 한다.

 

이렇게 되니, 대진 패자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게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오히려 어사 조계림이 관직을 잃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너무 컸다. 사건은 무마되었지만, 사람들의 입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 단지귀는 지방독무를 잠시 포기한다. 대진 패자는 미인도 잃고 관직도 잃는다. 다행히 경친왕 혁광은 여전히 서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지위도 여전했다. 몇년후 만주족 귀족들이 대거 나서서 권력을 회수한다. 대진 패자도 이 때 다시 나선다. 그러나, 아쉽게도 만주족의 강산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진 패자는 할 수 없이 천진으로 가서 거처를 마련한다.

 

통치집단에서 가장 믿을만한 종실귀족의 가장 큰 취미가 겨우 재물과 미녀였다. 이렇게 재물과 미녀를 좋아하는 귀족들은 믿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강산에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