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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영(英)씨가족 5대의 전설

by 중은우시 2009. 11. 18.

글: 인물화보

 

제1대: 영화(英華): 대공보와 보인대학의 창시자

 

영화(英華, 英斂之)의 일생은 전설적이다. 그는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너무나 가난한 집안이어서 성조차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주 뛰어나서, 문무에 모두 능했다. 바로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애신각라 숙중(愛新覺羅 淑仲)의 가정교사가 된다. 숙중을 가르치다가 두 사람은 눈이 맞고, 결국 생쌀이 익어 밥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숙중이 누구인가? 바로 청나라황족이다.

 

결혼후에 영화는 무술변법에 참가한다. 그러나 변법은 실패로 끝나서, 그는 지명수배되고 변방으로 도망치게 된다. 1902년 서태후는 영화에 사면령을 내리고, "영(英)"씨성을 하사한다. 이리하여 그는 비로소 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태후의 호의를 거절하고, 광서제가 친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대공보(大公報)>>를 창간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서태후를 욕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대공보>>의 '뭐든지 감히 말하는' 전통을 세우게 된다.

 

영씨가족의 모든 영광과 꿈은 영화에서 비롯된다. 그는 58세까지밖에 살지 못했지만, 3가지 큰 일을 해낸다. 하나는 대공보를 창간한 것이고, 둘째는 보인대학(輔仁大學)을 창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향산고아원(香山孤兒院)을 만든 것이다.

 

제2대: 영기량(英驥良): 언어의 천재

 

영기량은 두 살때 글자를 알아보고, 12살때 영국의 캠브리지로 보내어진다. 24살때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해에 장개석은 영어가 가장 뛰어난 두 명의 통역을 구하는데, 한 사람이 전종서(錢鍾書)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영기량이다. 그는 당시 보인대학 비서장 겸 서양어학과 교수였다.

 

장개석이 영기량을 높이 평가한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조국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따. 죽어도 일본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항전이 발발한 후, 주작인(周作人)이 북경대학을 지킨 것과 마찬가지로, 영기량은 보인대학을 지켰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모두 국공양당의 항일인사들과 열혈학생을 보호해봤다. 그러나 주작인은 공개적으로 일본에 투항했지만, 영기량은 암중으로 국민당에 가입한다. 그리하여 두 차례나 친일정권에 체포되고, 나중에 15년의 중형을 언도받고, 1년여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그후 국공내전이 발발할 때, 영기량은 북경교육국장, 교육부 사회교육사 사장, 중화교육영화제작창 창장등을 지낸다.

 

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칠 때, 영기량을 데려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만으로 간 후에, 영기량은 대만대학 외국어학과 주임과 대만보인대학 부총장을 맡는다. 1969년에는 간병이 도져서 객지에서 사망한다.

 

제3대: 영약성(英若誠): 문화부부부장

 

영약성은 영기량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일생도 전설에 가깝다. 그는 3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3년간 문화부 부부장을 지냈다. 그는 북경인민예술극원의 황금시기에 대들보중 하나였다. 그는 유명한 번역가이면서 <<낙타상자>> <<차관>> <<영업원의 죽음>>등의 극에서 주연을 했다.

 

영약성은 정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생동안 정치에 연루되었다. 옥에서 나온 이후, 1년간 하방(下放)을 당한다. 그러나 결국 인민예술극원으로 되돌아왔다. 1986년, 영약성은 문화부 부부장에 임명된다. 당시의 문화부 부장은 작가인 왕몽(王蒙)이었다. 2003년 영약성은 병사한다.

 

이외에 영약성의 처인 오세량(吳世良)도 공연예술가이자 번역가였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오여사는 조우(曹)의 비서 겸 주은래 총리의 통역을 맡았다.

 

제4대: 영문삼걸(英門三傑): 오락계의 거물들

 

영달(英達)이 감독한 <<아애아가(我愛我家)>>, <<후차대청(候車大廳)>>, <<한인마대저(閑人馬大姐)>>등의 국내 시트콤 코미디극은 모두 '유명'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것은 그와 송단단(宋丹丹)의 결혼이었다.

 

영장(英壯)은 더더국 중국 희극무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실 영장은 영달의 친동생은 아니다. 그는 영약성의 넷째동생의 아들이다. 즉, 영달과 당형제간이다.

 

제4대에 또 다른 유명한 인물이 있으니 영녕(英寧)이다. 그는 영약성의 다섯째동생의 아들이다. 영달, 영장이 감독한 TV드라마에서 그는 제작자를 맡았다.

 

제5대: 영여적(英如鏑): 아이스하키계의 야오밍을 꿈꾸다.

 

영여적은 3살때부터 아이스하키를 접했다. 2007년초, 그가 속한 북경 호자대(虎仔隊)는 같은 나이대의 아이스하키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그리고 NHL 보스톤 브루인스의 눈에 들어,  보스턴 브루인스 소년팀에 들어갔다.

 

아들 영여적을 기르기 위하여, 영달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여러번 미국과 중국을 왕복하고 있다. 그는 아들 영여적을 아이스하키계의 야오밍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아마도 영씨가족의 전설을 또 다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