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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배씨(裴氏): 재상 59명을 배출한 중국최고 명문집안

by 중은우시 2010. 2. 6.

글: 유계흥(劉繼興)

 

산서성(山西省) 희현(喜縣) 예원진(禮元鎭) 배백촌(裴柏村)은 중국의 "재상촌(宰相村)"이라고 불리운다. 이 마을의 배씨가족은 역사상 최고명문집안이라고 할 만하다. 배씨가족은 진(秦), 한(漢)부터 위진(魏晋)을 거쳐 수당(隋唐)때 전성기를 누렸다. 오대(五代) 이후에도 그 여세는 남아있었다. 가족중에 인물이 많고, 덕이 있는 자와 문장을 잘하는 자가 융성한 것도 중국역사상 극히 드문 정도였다. 청나라때 편찬한 <<배씨세보(裴氏世譜)>>에 따르면, 배씨가족은 중국역사상 재상 59명, 대장군 59명, 중서시랑 14명, 상서 55명, 상시 11명, 어사 10명, 절도사,관찰사,방어사 25명, 자사 211명, 태수 77명을 배출했다. 그리고 작위가  공(公)이 89명, 후(侯)가 33명, 백(伯)이 11명, 자(子)가 18명, 남(男)이 13명이었다; 황실과의 인적관계를 따지자면, 황후가 3명, 태자비가 4명, 왕비가 2명, 부마가 21명이었다.

 

배씨일족에서 정사에 전(傳)을 남기거나 열거된 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자만도 1000여명이상이다. 7품이상 관리들만 3천여명에 달한다.

 

배씨가족에서 배출된 인재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뿐아니라, 철학가, 사학가, 법학가, 지도학가, 시인등등도 배출했다.

 

서진(西晋)의 정치가 배수(裴秀)는 정치쪽에서 일생동안 활동했지만,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창제한 "제도육체(製圖六體)는 중국고대 지도제작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고대의 지도제작학에 수학적인 과학적 근거를 마련해준다. 이 이론은 이후 명나라말기까지 1400여년간 활용된다. 그가 쓴 <<우공지역도>> 18편은 중국 최소의 지도학의 전문서적이다. 영국의 과학기술사가인 니담은 그를 중국지도제작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유럽학자인 프톨레미와 함께 고대지도사상 동방과 서방에서 각각 빛나는 별이었다.

 

배수의 아들인 배외(裴頠)는 <<숭유론(崇有論)>>을 썼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무는 유를 창조할 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유"는 만물의 존재변화의 기초라고 하는 등 소박한 유물주의관념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그는 서진시기의 현학귀무론에 대항하는 유물주의철학사상가가 된다.

 

남조의 사학자 배송지(裴松之)는 <<삼국지>>에 주석을 다는데, 원저의 3배분량이 된다. 그는 역사서에 주석을 다는 새로운 체제를 확립한다. 송문제는 이를 읽어본 후에, "이것은 불후의 명작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아들 배인(裴駰)은 <<사기>>에 주석을 달아서, <<사기집해>> 80권을 쓴다. 이는 <<사기>>가 세상에 나온 후 처음으로 나온 종합적 주석서이다. 당나라때 사마정의 <<사기색은>>, 장수절의 <<사기정의>>와 합쳐 "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라고 불린다. 배송지의 증손인 배자야(裴子野)는 <<송략(宋略)>> 20권을 편찬한다. <<송서>>의 작자인 심약은 이를 보고 감탄한다. "내가 미칠 수가 없다" 당나라때 유지기는 "세상에 송나라역사를 말하는 자는 배(자야)의 <<략>>을 최고로 치고, 심(약)의 <<서>>를 다음으로 친다." 배송지, 배인, 배자야를 합쳐서 "사학삼배(史學三裴)"라고 부른다.

 

명신 배구(裴矩)는 후주, 수, 당의 3조원로이다. 정치를 함에 있어서 청렴하고 조심했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민부시랑, 내사시랑, 상서좌승, 이부상서등의 직을 지냈다. 수양제때, 배구는 명을 받아 장액(지금의 감숙)으로 가서 서역각국과의 무역을 담당했다. 각국 상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는 서역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등에 대한 대량의 정보를 획득한다. 이를 책으로 정리해서, <<서역도기>> 3권을 쓴다. 책에서 서역각국의 상황을 대량 소개하고, 여러 지도를 그린다. 돈황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3갈래의 길을 표시하는데, 그중에 중도(中道)와 남도(南道)가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이다. <<서역도기>>는 중국의 수당시기 서북지역 사회상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수나라때의 명신 배정(裴政)은 저명한 법학자이다. <<수서>>에 따르면, 배정이 재판을 할 때, '법을 적용함에 관대하고 평등하게 대하여, 억울하거나 지나친 경우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심을 크게 얻는다. 그는 직언을 서슴지 않아서, 조정내외에 명성이 높았다. 수문제가 즉위한 후, 배정등은 명응ㄹ 받아 수나라의 법률인 <<개황률(開皇律)>>을 저술한다. 배정은 위, 진, 제, 량등 남북조때 남북 각국의 형법전을 참고하여 전대의 효수, 편태(鞭笞)등 혹형을 폐지한다. 그리고 심문시에 사용하던 대봉(大棒), 독장(毒杖), 차록압과등 혹형을 모조리 폐지한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억울함이 있는데, 현에서 접수하지 않으면, 차례로 군, 주, 성으로 상소할 수 있고, 여전히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면 형부에 직접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개황률>>은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역대 어느 율령보다 개명한 것이다. 이는 시대의 획을 긋는 고대의 형법전이다. 후세에 따르는 모델이 된다. <<당률>>, <<송형통>>은 모두 여기서 유래한다. 명나라때 대사상가 왕부지도 높이 평가했다: "오늘의 법률은 개략 수나라때 배정이 만든 것이다."  이를 보면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수양제는 청치가 배온(裴蘊)의 정치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모열법"을 추진하여 호구를 통제하고 인구를 통제하며 세금을 늘여서 수나라의 국고를 충실하게 한다.

 

수나라때의 문림랑 배세청(裴世淸)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대표하여 방일우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간 외교대신이다. 중일우호의 물꼬를 그가 텄다. 수나라 대업3년(607년), 일본은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해 3월에 장안에 도착한다. 배세청은 수양제의 명을 받아, 수나라사절단 일행 13명을 데리고 일본에 답방한다. 그리고 일본천황을 만나서, 국서와 문물을 바친다. 그가 휴대한 국서는 일본의 <<일본서기>>에 보존되어 있고, 영원한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있다.

 

당나라의 개국공신 배적(裴寂)은 수나라 말기 군웅이 할거하고,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이연을 도와서 거병하고 당나라를 세운다. 당고조 이연은 배적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여기에 이른 것은 공의 힘때문이다." 그는 배적의 말이라면 모두 따랐다. 그리고 그를 "배감(裴監)"이라고 부르고 직접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그의 신분의 고귀함은 당시 세상을 떨칠 정도였다.

 

배행검(裴行儉)은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병법"으로 돌궐을 수차례 평정한다. 그는 당나라초기의 저명한 군사가이다. 동시에 그는 서예가이기도 했다. 초서 예서에 능했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수량은 붓과 먹이 좋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 붓과 먹을 가리지 않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우세남 뿐이다."

 

배기(裴垍)는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 그는 이강, 최군, 위관지, 배도, 이이간등을 추천했다. 이들은 나중에 차례로 재상이 되고, 명성을 떨친다. 사서에서 "배공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조정내에 그만한 자가 없었다."고 적었다.

 

당나라때의 재상 배요경(裴耀卿)은 조운(漕運)을 정돈하는데 힘을 다했다. 남쪽의 양식을 북쪽으로 운송하는 수로를 순탄하게 만들고, 당왕조에서 수십년간 문제되었던 양식문제를 해결한다.

 

일대의 현상(賢相) 배도(裴度)는 대대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당나라때의 정치가 중에서, 배도의 이름은 당나라초기의 위징등과 나란히 이름을 날린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은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번진의 할거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했다는 것이다. 특히 회서번진 오원제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태도를 견고히 하여, 기울어가는 대세를 되돌렸으니, 공적이 대단했다. 이리하여 당나라가 다시 통일을 이루고, '원화중흥'의 정치국면을 맞이한다. 회서의 난이 평정된 후, 당헌종은 배도를 상주국 겸 진국공에 봉한다. 나중에 간신의 모험으로 세번이나 쫓겨났다 다시 들어오면서 여러번 재상을 지내고 여러번 변방으로 쫓겨간다. 배도는 당헌종, 당목종, 당경종, 당문종의 4대황제의 아래에서 재상을 지낸다. 그는 국가를  20여년간 운영했고, 역사상 '중흥현상(中興賢相)'으로 불리운다. 백거이도 그의 공적이 소하, 조참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한 바 있다.

 

당나라때의 소설가 배계는 <<어림(語林)>>을 쓰고, 배형은 <<전기>>를 쓴다. 이는 각각 중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지인소설이면서 소설이라고 이름지은 문체의 작품이다. <<어림>>은 "배씨학"이라고도 불리운다.

 

동위, 북제의 두 왕조에서 관료로 있으면서 관직이 중서사인에 이른 배양지는 천하에 이름을 떨친 대시인이다.

 

배흥노는 당나라 현종때의 비파연주가이다. 그는 조강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다. 당시 사람들은 "조강은 오른 손이 있고, 흥노는 왼손이 있다"고 읊었다.

 

배민은 검무를 잘 추었다. 당문종은 조서에서 이백의 시가, 배민의 검무, 장욱의 초서를 "삼절(三絶)"이라고 칭하였다.

 

천고에 전해지는 희극 <<유서호>> <<이혜낭>> <<배항우선기>> <<백사전>>등에서 쓴 것은 모두 배씨집안과 관련된 일이다. 명극 <<백사전>>의 법해는 바로 당나라초기의 정치가이자 서법가인 배휴의 아들이다. 역사상의 법해는 원래 좋은 사람이었는데, 명청소설에서 나쁜 사람으로 그려졌다.

 

배씨가족의 고향에는 배씨종사(裴氏宗祀)가 있는데, 당나라 정관3년(629년)에 짓기 시작했다. 규모가 크고, 기세가 대단하여, 역대이래로 계속 중건했다. 현재는 전전, 후전, 장원방등 건축유적만 남아있다. 배씨비랑은 중국 서예석각의 백과전서라 할 만하다. 원래는 고배 수십개가 있었고 사학과 서예에 큰 가치가 있었다. 유명한 것은 "배홍비" "배경민비" "배광정신도비"와 "평회서비"이다 이들 진귀한 석비는 천백년후에 겁난을 당하고 마니 정말 아쉬운 일이다. 겨우 "평회서비"만 남았다.

 

배씨의 족보는 배송지가 쓴 <<배씨가기>>부터 시작한다. 청나라 가경제때의 <<배씨세보>>는 지금까지 가장 완벽한 족보이다. 이 족보는 배씨 62세손 배솔도와 그의 아들 배종사, 그의 손자 배정문의 조손3대가 이어서 완성한 것이다. 거의 1세기에 걸쳐 완성된다. 다행인 것은 76대손이자 당시 족장인 배부인이 문혁의 겁난중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6권의 <<배씨세보>>를 기름종이로 싸서, 몰래 마을의 큰 홰나무 가운데 숨겨두었다. 그리하여 족보가 완벽하게 보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