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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 아들로 인하여 황제에 오른 인물은?

by 중은우시 2009. 9. 4.

글: 노위병(路衛兵)

 

고대 제왕의 황위전승은 살기가 충만했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남겼다. 황제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이며, 일언구정(一言九鼎)이며, 권력이 지고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나 황제가 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궁중에서는 군주를 죽이고 찬탈한 경우, 경쟁자를 살륙하고 황제에 오른 경우, 만천과해(瞞天過海), 이묘환태자(狸猫換太子)의 심기와 쟁투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황제가 되기 위하여 황자, 황손들은 온갖 머리를 짜냈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정상적인 황제위의 승계가 있는가 하면, 형을 폐하고 동생을 앉힌 경우도 있고, 여러번 폐위했다 다시 복위시킨 경우도 있다. 황군내에는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모든 용종(龍種)이 모두 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중 어떤 사람들의 운명은 보통백성들만 못한 경우도 있다. 역사상 황위승계에 이런 특수한 경우도 있었다. 황상이 그의 어느 손자를 아주 아껴서, 그에게 황위를 전하고 싶어서, 먼저 황위를 그 손자를 낳은 자식에게 넘기는 것이다. 이렇게 아들 때문에 황제에 오른 행운아도 있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는 역사상 세번 나타났다.

 

첫번째 사례는 서진(西晋)의 두번째 황제이자, 서진의 개국황제 사마염(司馬炎)의 둘째아들인,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이다. 그는 역사상 유명한 백치황제이기도 하다. 사마충이 백치라는 것에 관하여 <진서>에 두 가지 전형적인 사례를 기록해 놓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우스개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한 가지는 어느 날, 사마충이 어화원에서 놀고 있는데,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마충은 좌우의 태감에게 물었다. 저 개구리는 관부(官府)을 위해서 우는가 아니면 사가(私家)를 위하여 우는가? 부하는 머리회전이 빨랐다: '관청땅에서 우는 것은 관청을 위하여 우는 것이고, 백성의 땅에서 우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궤변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다른 한 가지는 전국에 기근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었다. 황상에게 글이 올라왔는데, 사마충은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굶어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백성들에게 먹을 양식이 없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때 사마충은 놀라운 말을 남긴다. 양식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아니냐?

 

이 두 가지 사례는 사마충이 완전히 바보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머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말해준다. 그렇다면 왜 총명하기 그지없는 사마염이 백치를 후계자로 삼은 것일까? 이것은 바로 사마충에게는 아주 총명한 아들 사마휼(司馬)이 있었다는 것과 관련된다. 사마충이 황제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마염이 사마율을 아주 아꼈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 기연은 궁중에서 불이 났을 때 나타난다. 당시 사마염은 성루에 올라가서 불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데, 사마충과 그의 아들 사마휼이 따라왔다. 이때 사마휼은 겨우 5살이었다. 그러나 아주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는 사마염의 옷자락을 잡고, 이 곳은 위험한데, 할아버지는 황상이니, 불빛이 몸에 쪼이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사마염을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이처럼 어린아니가 이런 언행을 보이다니, 이 아이는 보통이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우리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라고 감탄한다. 그리하여 백치인 사마충에게 황제위를 넘긴 것이다. 나중에 이 총명하고 영리한 손자가 황제위를 이어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마충도 아들 때문에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총명한 황손은 좋은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나중에 정권을 전횡한 황후 가남풍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사실 사마충이 백치이냐 아니냐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팔왕의 난때 조왕 사마륜이 모반을 일으켜 한때 사마충을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 적이 있다. 사마충에게 선양하라고 핍박할 때, 사마충의 당숙인 의양왕 사마위가 사마충의 옥새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사마충은 옥새를 끌어앉고 죽어라 내놓지 않았다. 사마위가 마음이 조급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사마충의 손가락을 벌려 옥새를 억지로 빼앗아 갔다. 나중에 사마륜이 타도되고, 사마충이 황제에 복귀한다. 그후 형량을 정하는데, 사마위는 그저 방조자이므로 사형에 처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보였다. 그래서 황제 사마충에게 사면을 건의한다. 그때 사마충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 손가락을 억지로 벌렸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것을 보면 그다지 바보는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여러 왕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 사마충이 쫓기는데 시중 혜소(紹)가 죽어라 황제를 지키려다가 칼을 맞고 죽었고, 사마충의 몸에 그 피가 뿌려졌다. 좌우에서 그의 옷에 묻은 피를 씻으려고 하자, 그는 "혜시중의 피다. 씻지 말라"고 했다. 머리가 흐리멍텅하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멍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사마충은 분명히 아주 총명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멍청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여러명의 총명한 황자, 황손들 중에서는 자질이 비교적 평범한 사마충이 황제에 오르다보니 여러 곳에서 중상모략을 받는 것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 사례는 명나라의 네번째 황제인 명성조 영락제 주체의 장남 주고치(朱高熾)이다. 주고치의 재위기간은 길지 않다. 겨우 1년간 황제위에 있었다. 이것도 그의 아들 덕에 오른 자리이다. 주고치는 원래 장남이니, 태자에 올라서 황위를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탈취할 때, 주고치의 동생인 주고후(朱高煦)는 남북으로 다니면서 전투를 하고,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주고후의 성격과 용모는 모두 주체를 닮았다. 그리고 생각이 민첩하고, 전쟁에도 능했다. 이와 비교하자면, 주고치는 너무나 평범했다. 주체가 주고후를 편애하였으므로, 장남인 주고치를 폐위시키고 주고후를 태자로 삼을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상의 법도를 어기는 것이어서 신하들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고치의 나날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고후 일파는 태자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며서, 갖은 방법으로 황상과 주고치의 관계를 이간질했다. 주체는 하마터면 그 말을 믿고 주고치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주고치가 겨우겨우 황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던 것 이외에 그의 아들 주첨기(朱瞻基)의 덕이 컸다. 주첨기가 태어나던 그 날에 주체는 꿈을 꾼다. 꿈에서 태조 주원장이 그에게 대규(大圭, 고대 제왕 혹은 제후가 예식을 거행할 때 손에 들던 옥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다)를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손들에게 전하면,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첨기의 출생은 그 자체가 전설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주첨기가 한 달이 되고, 주체는 보면볼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아이의 영명한 기운이 얼굴에 넘친다. 내가 꾼 꿈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것도 선입견때문일 것이다. 한 달밖에 안된 아이에게서 무슨 영명한 기운을 보겠는가. 그저 주체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기뻐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주첨기는 확실히 뛰어났다. 자라면서 글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보다 총명했다. 주체는 더더욱 그를 아낀다. 그리하여, 순행시나 정벌시에 항상 데리고 다녔다. 이것은 주고치가 순조롭게 황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비밀이다. 여기에 주고치를 지지하는 대신들까지 주체에게 말했다. 세자는 인자하고 효심이 많으니, 천하가 그를 따른다고. 주체는 결국 주고치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다.

 

세번째 사례는 청나라의 다섯째 황제인 강희의 넷째아들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아들이 많았다. 황위를 잇기 위하여 너죽고 나살기식의 싸움이 있었다. 그중에서 넷째아들인 윤진이 돌출한 것은 그 자신의 재능과 수완뿐아니라 그의 아들도 큰 역할을 했다. 윤진은 사실 그다지 뛰어난 점이 없었다. 강희제가 좋아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강희의 여러 특출한 자식들 중에서는 그다지 눈에 들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희가 좋아하는 아들, 즉 나중에 건륭제가 되는 홍력이 있었다. 홍력은 강희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용모도 뛰어났다. <<청사고>>에는 '융준기신(隆準身, 코는 높이 솟고, 몸매는 날씬하다)"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에 홍력은 언행도 비범했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면 암송했다. 강희가 자연히 아주 아끼고 좋아한다. 한번은 강희제가 사냥을 하다가 곰을 한 마리 쏘아서 쓰러뜨렸다. 그런데, 곰이 완전히 죽지 않아서 막 말에 오르는데, 곰이 다시 살아나서 다가왔다. 모두 놀라서 두려워하고 있는데, 홍력은 말 위에 단정하게 앉아서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력은 보통 사람이 가지기 힘든 것이었다. 돌아온 후에 강희제는 태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명이 귀하고, 복이 나보다 나을 것이다" 홍력은 당연히 강희제가 생각하는 제3대 황제의 최우선 후보자였다.

 

사실 청나라의 공식적인 견해에 따를 때, 강희제가 죽기 전에 넷째아들 윤진에게 황제위를 전하기로 결심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홍력을 잘 보았기 때문이다. 건륭은 유릉에 묻혔는데, <<신공성덕비>>를 세웠다. 위에는 건륭의 일생동안의 문치무공을 기록한 외에, 황위계승문제에도 해답을 적어놓았다. 거기에는 홍력이 12살때 부친(옹정)을 따라 성조(강희)를 처음 만났는데, 모란대에서 연회를 하고 있었다. 강희가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복이 나보다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더욱 좋아했다. 뒤에는 "태왕이손(太王貽孫)의 귀감이 되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태왕이손"은 이런 유래가 있다. 주나라의 창시자인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태백, 차남은 우중, 작은 아들은 계력이었다. 계력의 아들이 희창(姬昌)인데, 태왕이 손자 희창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을 흥성하게 만들 자는 바로 (희)창이다" 태백, 우중은 부친의 뜻을 깨닫고는 만황의 땅으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계력에게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이 바로 "태왕이손"의 유래이다. 이를 보면, 강희제가 홍력을 다다음대의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옹정은 아들 때문에 황제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