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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역사상의 "후태자(後太子)"는 왜 모두 깡패기질을 가졌는가?

by 중은우시 2009. 7. 7.

글: 정만군(程萬軍)

 

역사상 정통태자인 형을 처치하고 황위위 '합법적 승계인'이 된 둘째, 막내아들들은 "후태자"에 속한다. 그들은 거의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부분이 중요한 순간에 법과 도덕을 무시하는 무뢰배적 성격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깡패기질이다.

 

왜 이들 역사상의 "후태자"들은 모두 깡패기질을 가졌을까? 그리고 이러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왕왕 성공적으로 "후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몇몇 우리에게 익숙한 사례를 가지고 분석해보는 것이 그 해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같다.

 

부소(扶蘇)는 호해(胡亥)의 큰 형이다. 진나라때는 비록 아직 유가의 "큰 형은 부친과 같다(長兄爲父)"라는 강상전통은 마련되지 않았지만, 장유의 서열은 여전히 존재했다. 호해는 처음에 큰 형인 부소에게 아주 공손했다. 그러나 조고의 말에 현혹되어 황위를 다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그의 깡패기질은 바로 드러난다. 그리고 큰형과의 다툼에서 우세를 점한다.

 

어린 동생과 비교할 때, 큰형인 부소는 너무 인자했다. 인자하다보니 우유부단한 지경에 이르고, 그리하여 어린 깡패는 손쉽게 후덕한 큰 형을 처치할 수 있었다.

 

비록 부소가 진시황의 황위의 적법한 계승자였지만, 호해는 진시황의 영혼의 적법한 계승자였다. 부소와 호해를 비교하자면, 잔혹하고 살인을 즐기는 호해가 진시황의 깡패본색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영혼과 정신의 근저를 보자면 호해가 진시황과 죽이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주와 능력을 놓고 말하자면, 호해는 부친과 비교했을 때 그저 어린 깡패에 불과했다. 비록 그는 대숙청을 실시했고, 형제 12명을 죽이고, 고굉대신 몽염을 죽이고, 형벌을 더욱 엄하게 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손속을 전혀 봐주지 않았지만, 어쨌던 그의 부친처럼 한편으로 잔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천하를 웅패하지는 못했다. 그는 마음은 있어도 힘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호해가 부소에 이긴 것은, 그가 진시황의 정신의발 즉, 잔혹하고 살인을 좋아하는 깡패본색을 이어받았고, 부소는 인간적인 성격으로 스스로를 묶어두었기 때문에, 작은 깡패와의 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수나라의 황위계승자 경쟁에서, 큰형인 양용(楊勇)은 왜 둘째동생 양광(楊廣)에게 밀렸을까? 왜냐하면 양광이 오독구전(五毒俱全)의 깡패이기 때문이다. 양용은 동생과 비교하자면 아직 깡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양용은 성격이 솔직하고, 위장하지 않았으며, 희노애락이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덕하여 대신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장남으로서, 이러한 성격은 차남과 맞싸울 때는 아주 불리하게 작용했다. 양광의 최대장점이라면 첫째는 위장이고 둘째는 비열한 수단도 마구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부모의 총애를 받았고, 후자는 직접적으로 황위를 빼앗는데 도움을 주었다. 부친을 죽이고 형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 앞에서 양광은 조그만큼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이를 보면 그는 철두철미한 깡패이다.

 

이세민과 이건성을 비교하더라도, 전자가 후자보다 악독했다. 천고일제인 이세민을 철두철미한 깡패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큰형을 처치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최소한 깡패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그저 호해나 양광과 같은 순수한 깡패와 비교하자면 수단이 훨씬 뛰어났을 뿐이다.

 

이건성의 성격이나 기질은 양용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이세민은 양광보다 훨씬 고명했다. 분명히 오랫동안 계획한 정변임에도, 사학자들의 붓끝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반격하여 큰 형을 처치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현무문사변의 전체 과정에서, 우리는 그저 이세민이 병력을 배치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큰형의 군대가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뛰어난 수준의 깡패라도 이세민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친형제를 죽이고서도 "어쩔 수 없이 나서서 국면을 바로 잡았다"는 찬사를 듣다니.

 

재능으로 보자면, 이세민은 큰형 이건성보다 월등하다. 그러나 분란을 일으키고 결국은 나라를 망친 호해나 양광은 부소나 양용보다 못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황위경쟁에서 이겼을까?

 

호해가 부소를 도태시키고, 양광이 양용을 도태시킨 것은 재능의 우열이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나타나는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원래 중국역사에서 천자(天子)의 자리는 훔치지 않으면 빼앗는 것이다. 호해와 양광과 같이 태자의 자리를 빼앗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아무런 도리도 따지지 않는다. 이처럼 무뢰한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둘도없는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깡패기질을 가진 황자(皇子)들이 큰형을 밀어내도 대통을 이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막나가는 놈이 다 먹는다"는 중국역사의 한 게임규칙을 보여준다. 중국의 2천년봉건역사무대에서 가장 많이 차지한 유형은 바로 깡패이다.

 

깡패의 생존철학은 대협(大俠)과도 일맥상통할 뿐아니라, 천자(天子)와도 맥이 일치한다. 만일 봉건사회를 큰 새장이라고 본다면, 오로지 영웅과 깡패만이 새장 바깥에서 뛰어다닌다. 양민과 어진 사람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땅에 줄을 그어서 감옥으로 만들어놓으면 영원히 바깥으로 뛰어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이에 깡패와 영웅의 역할은 계속 바뀐다. 성공하면 영웅이고, 실패하면 깡패이다. 천자가 되고 나서 영웅인가 깡패인가를 평가할 때면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였느냐는 겉으로 드러내는 당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외에 황위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을 수 있느냐가 유일한 검증기준이 된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큰형을 처치했지만, 결국은 패가망신한 호해와 양광은 깡패이고, '천고일제' 이세민은 대영웅인 것이다. 역사의 화장술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