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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모택동이 높이 평가한 세 명의 정론가(政論家)

by 중은우시 2009. 4. 17.

글: 유계흥(劉繼興)

 

모택동은 사서를 읽기 좋아했고, 역사인물을 평가하기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치국방안을 논한 정론을 읽는 것을 즐겼다. 그가 아주 높이 평가했던 정론가는 세 사람이다: 서한(西漢)의 가의(賈誼), 초당(初唐)의 마주(馬周), 그리고 중당(中唐)의 유분(劉)이다.

 

먼저 가의(賈誼)를 살펴보자.

 

가의는 가태부(賈太傅), 가장사(賈長沙), 가생(賈生)으로도 불리운다. 서한의 정치가, 문학가이다. 하남성 낙양 사람이다. 18세때, 박학능문(博學能文)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하여 군수인 오공(吳公, 진나라의 승상 이사와 같은 고향사람이면서 이사의 제자임)으로부터 인정받고, 제자가 된다. 한문제가 즉위한 후, 오공의 추천을 받아 박사가 되어 문헌전적을 관리한다. 그때 가의는 20여세에 불과했고, 박사들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견식이나 의론은 박사중 가장 연장자로부터도 존경을 받았고, 한문제로부터도 높이 평가받았다.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태중대부로 승진한다. 조정의 많은 법령, 규정의 제정은 모두 그가 주재해서 처리했다.

 

가의는 정치적으로 개혁을 주장했다. 역법을 고칠 것을 주장하고, 율령을 수정하고, 제도를 제정할 것등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부 조정신하들의 반감을 샀다. 그들은 "낙양사람이 나이는 어리고 학문도 얕은데 권력을 독단하려고 하고, 여러 일들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비난했다(사기. 굴원가생열전). 그러자 한문제도 가의에 대한 신임이 동요되고, 결국 한문제는 가의를 장안에서 내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장사왕의 태부가 된다. 후인들이 가의를 가장사, 가태부로 칭하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장사에서 재직하던 3년동안, 가의의 심정은 우울했다. 한문제 7년(기원전 175년), 가의는 장안으로 다시 불려들어간다. 그리하여 양회왕의 태부가 된다. 이때 한문제는 비록 여전히 가의의 박학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가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서 주장했던 방안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중에 양회왕은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는다. 가의는 자기가 태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자주 울면서 자책한다. 그러다 얼마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

 

가의는 걸출한 정론가였다. 그의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과진론(過秦論)>>과 <<치안책(治安策, 陳政事疏라고도 함)>>이 있다. 이들은 <<한서. 가의전>>에 실려있다.

 

모택동이 가장 좋아한 것은 가의의 <<치안책>>이었다. 이 글은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적 통치하려는데서 출발하여, 거안사위(居安思危)를 주장하며, 태평성대에 잠재된 위기를 낱낱이 열거한다. 그중 서한의 동성왕분봉제도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여러 왕이 유약하여,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장성하면, 국가에는 반드시 "종아리가 허리처럼 굵고, 손가락이 장단치처럼 굵어"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정에서는 여러 제후를 두어 그 역량을 약화시키라고 건의한다. 가의는 또한 흉노침범, 외적에 대항하는데 힘을 다하고 있지 않은 현상, 세상의 풍기가 문란해진 현상, 인의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는 현상등등 각종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가 제안한 조치들은 적절했고, 시세를 분석하는 것도 근거와 이치에 맞았다. 모택동은 일찌기 <<치안책>>을 "서한일대에 가장 뛰어난 정론", "전체 글이 당시의 사리에 적절히 들어맞느다"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사리'는 치국방략이고 현실정치를 말한다.

 

모택동이 가의를 칭한한 것은 그가 어렸을 때 쓴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연소쟁영굴가재(年少嶸屈賈才)".

그리고, 나중에 초당시인 왕발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28세된 사람으로서 16권의 시문작품을 쓰다니, 왕필의 철학(주관유심주의), 가의의 역사학과 정치학과 비견할만하다. 모두 소년시절에 재주를 발휘하였다. 가의는 죽었을 때 삼십여세이고, 왕필은 죽었을 때 스물네살이며, 이하(李賀)는 죽었을 때 스물일곱, 하완순은 죽었을 때 열일곱, 모두 소년천재였다. 아쉽게도 너무 일찍 죽었다."

 

모택동은 1958년 4월 27일, 비서인 전가영에게 서신을 하나 쓰는데, 그에게 <<가의전>>을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가영동지:

 

시간이 있으면 반고의 <<가의전>>을 읽어볼 만하다. <<조굴>>, <<붕조>>의 2부는 읽지 않고 지나가도 된다. 가의의 문장은 절반이 망실되었고, 그저 <<사기>>의 2부 2문이 남아있다. 반고의 책에는 <<과진론>>을 생략하고 2부 1문만 실었다. <<치안책>> 1문은 서한일대의 가장 뛰어난 정론이다. 가의는 남으로 쫓겨났다 돌아오면서 이 글을 썼다. 태자를 논한 부분이 진부한 이외에 전체 문장이 당시의 사리에 적절히 들어맞는다. 아주 좋은 기분이 드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 만일 백달(伯達), 교목(喬木)도 흥취가 있으면 한번 읽어볼만할 것이다."

 

모택동은 여러번 말하는 동안에 역사상 젊어서 성취를 이룬 인물을 얘기할 때, 자주 가의를 들먹였다. 예를 들면, 1958년 5월 8일, 제8차대회 제2차회의에서 모택동은 "미신을 타파하자"는 주제로 강화를 했다. 한꺼번에 수십명의 젊어서 성취를 이룬 사례를 얘기하였는데, 그중에 가의가 들어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때 가의라고 있었다. 십여세때 한문제에게 불려갔고 하룻만에 세차례나 관직이 올라갔다. 나중에 장강으로 좌천되었는데, 2편의 부를 썼다. <<조굴원부>>와 <<붕조부>>이다. 나중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서 글을 하나 썼는데, <<치안책>>이다. 그는 진한사 전문가이다. 그는 10편의 작품을 썼는데, 남아있는 것은 두편의 문학작품과 두편의 정치작품 즉, <<치안책>>과 <<과진론>>이다. 그가 장사에서 죽었을 때 나이가 겨우 33살이었다."

 

모택동은 일찌기 부던이나 시가를 써서 가의를 칭송한 바 있다. 그가 일생동안 시가에서 두번이나 칭송한 인물은 가의가 유일하다. 한수는 1954년에 쓴 <<칠언. 영가의>>이고, 또 한수는 1964년에 쓴 <<칠절. 가의>>이다. 이 두 시는 중앙문헌출판사의 1996년 9월판 <<모택동시사집>>에 실려 있다.

 

다음으로 마주(馬周)를 살펴보자.

 

모택동은 구양수등이 쓴 <<신당서>>를 읽을 때, <<마주전>>에서 "마주상소(馬周上疏)" 페이지를 읽으면서, 모택동은 이렇게 적어두었다: "가생의 <<치안책>> 이후 제일기문(第一奇文)이다. 송인의 만언서, 예를 들어 소동파와 같은 류가 한 것은 그저 지상담병(紙上談兵)일 뿐이다". 평가를 이렇게 높게 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역대에 문단의 태산북두로 떠받드는 소동파를 폄하하면서까지 그를 끌어올렸다.

 

이것만 가지고도 부족했나보다. 모택동은 그 글에 "마주의 재능이 부설, 여망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부분에 다시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부설, 여망은 말할 가치도 없다. 마주의 재덕이 훨씬 뛰어나다." 부열(傅說)은 노예에서 상나라의 재상이 된 인물이다. 여망은 주무왕을 도와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그 강태공을 말한다(그는 呂를 봉지로 받아서, 나중에 여씨로 바꾸게 된 것이다). 마주가 신통광대한 강태공보다도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로써 볼 때 마주가 모택동의 마음 속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이 읽은 "마주상소"는 마주가 정관6년에 당태종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이 상소문은 태평성대라고 아부하지 않고, "건축물이나 바치는 기물이나, 여러 왕비의 복식은 너무 화려하다"고 직언했고; 백성들이 부담하는 요역이 너무 중하다는 점을 직언했다, "형이 가야 동생이 돌아온다. 왕복에 먼 곳은 5,6천리가 된다. 봄여름가을겨울, 쉬는 때가 없다." 결국 정관의 치세하에서도 여전히 '백성은 편안하지 못하고" "5,6년동안 백성들은 모두 원망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마주는 역사의 경험으로 치국의 원칙을 제시했다: "자고로 현명한 왕과 성현은 자신이 몸소 시범을 보여서 근검절약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래야 아랫사람이 부모처럼 사랑하고, 하늘처럼 받들고, 천둥번개처럼 무서워한다." 모택동은 이 글에 동그라미를 크게 세 개 그려놓앗다. 특히 "근검절약하고 다른 사람에 은혜를 베풀었다(節儉於身, 恩加於人)"이라는 부분에는 이중 동그라미를 그렸다. 모택동이 높이 평가한 것은 출신이 비천한 마주가 사회의 병폐를 잘 알고 있었고, 정확하게 이를 시정할 방법까지 제시했다는 점이다.

 

마주는 산동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다. 고아로 자랐지만, 널리 배우고, 경륜을 지녔다. 성격이 호방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고, 천하를 유랑했다. 나중에 장안에서 중랑장 상하의 집에서 문객으로 있는다. 한번은 그가 주인 상하를 대신하여 상소문을 썼는데, 당태종이 높이 평가했다.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다, 639년(정관12년), 마주는 중서사인이 된다. 당태종은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하루라도 마주를 보지 않으면 그가 생각난다. 이를 보면, 마주는 이세민에게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재상인 잠문본도 마주의 재능은 한나라의 장량과 종군에 비견할 만하다고 했고, 마주의 재능에 아주 감탄했다. 645년(정관18년)이 되어 마주는 재상(중서령)이 된다. 그는 동시에 황태자 이치의 스승이 된다. 그가 이치를 가르킨 것은, 나중에 이치가 황제가 된 후에 큰 작용을 하게 된다.

 

당태종은 마주가 국가에 거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표창하기 위하여, 친히 마주를 위하여 글을 써준다. "난봉능운, 필자우익, 고굉지기, 성재충량("鸞鳳凌雲, 必資羽翼, 股肱之寄, 誠在忠良)" 마주의 모든 것에 대하여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이 명신들이 운집하고, 현신들이 속출한 당나라초기에도 이런 평가는 아주 드문 것이다.

 

649년(정관22년), 마주는 국사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장기간의 업무로 인한 피로가 병이 되여, 결국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 당태종은 마주가 병으로 쓰러지자, 바로 당시 의술이 가장 뛰어난 명의를 보내어 치료하게 해준다. 필자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마주가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에, 당태종은 친히 마주를 위하여 약을 달였다. 그리고 황태자 이치에게는 제자의 예로서 마주를 찾아가게 해서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하게 했다. 아쉽게도 이러한 치료는 모두 효과가 없었다. 마주는 바로 이 해에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48세때의 일이다. 그는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그가 이 십여년간 황제에게 올렸던 모든 상소문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관중과 안자는 자주 국군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나는 그런 자가 되고 싶지 않다. 마주가 죽은 후, 당태종은 그를 위하여 아주 격이 높은 국장을 치러준다. 그리고 특별히 마주의 유체를 자기의 황릉 옆에 묻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은 "유분(劉賁)"이다.

 

유분은 자가 거화(去華)이고, 당나라때 유주 창평(지금의 북경시 창평) 사람이다. 중당 대화2년(828년)에 그는 '현량방정'의 선비로 시험을 보는데, 환관들이 득세하는 현상에 대하여 대담하게 책문을 올린다. 유분은 올린 책문에서: "궁위장변, 사직장위(宮將變, 社稷將危, 궁중에 변이 생기고, 사직이 위험해질 것이다)", "환관들이 황제를 폐립하는 권력을 가졌다", "사흉(四凶)이 조정에 있으니, 반드시 주살해야 한다" 이렇게 환관들의 정권을 독점하고, 군주를 폐위시키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며, 국가에 위해를 가한다는 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을 죽여버리라고 주장한다. 시험관은 유분의 문장을 크게 칭친한다. 그러나 환관의 전횡이 두려워 그를 감히 채용하지 못한다. 영호초(令狐楚), 우승유(牛僧孺)는 모두 그를 자기의 막료로 끌어들여서 일을 시켰고, 나중에 비서랑의 직위를 준다. 결국은 환관들의 모함을 받아, 유주사호참군으로 좌천되고 객지에서 사망한다.

 

감히 창끝을 당시 권력을 잡아 기고만장하던 환관들에게 들이밀었다는데서, 유분의 담량이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논술도 당시의 폐해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당나라 일대의 준걸이라고 할 만하다.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은 유분에 관하여 5수의 시를 남긴다. 그중 4수는 유분이 죽은 후 그를 애도하는 것이다. 이는 유분을 위하여 울면서, 그 자신을 위하여 우는 것이고, 그 불행했던 어두운 시대를 위하여 우는 것이다.

 

모택동은 <<구당서. 유분전>>을 읽으면서, 유분의 정론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하여 곁에 "기특기(起特奇)"라고 적어두엇다.

 

1958년, 모택동은 유분을 읊은 <<칠절. 유분>>이라는 시를 쓴다. 이 시도 중앙문헌출판사의 1996년 9월판 <<모택동시사집>>에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