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앙(劉仰)
"청백리(淸官)"는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청백리"라는 단어는 중국정통사학의 개념은 아니다. 중국고대사에서 관리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일반적으로 "양리(良吏)", "순리(循吏)", "염리(廉吏)"라는 말을 쓴다. 비록 고대에 관리에 대한 평강서 "청렴"이 중요한 기준이기는 했지만, 현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청백리'의 개념은 민간에서 나온 것이다. "청백리"의 개념은 중국역사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기의 '청백리' 개념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서로 다른 사회현실과 수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제1단계
청백리(淸官)개념의 기원은 아주 이르다. 그것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미 나타난다. <<진서.왕표지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왕)표가 황상에게 글을 올려 아뢰기를: ....평범하고 못난 사람은 많고,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은 적다. 재능있는 사람은 세상에 적으나 조정의 관직은 많다. 어찌 현비공관(賢鄙共貫), 청탁동관(淸濁同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남사>>는 남조 송제양진 4개왕조의 역사서이다. 거기에 유준고(劉遵考)의 일생을 소개하면서 이런 문자가 있다: "아들 계련은 자가 혜속이고, 일찌기 청관(淸官)을 역임했다" 어떤 사람은 이 두 개의 기재를 중국최초의 "청관"에 대한 기록으로 본다. 실제로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기록에 나오는 "청관"은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당시의 특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조조는 <<단가행>>에서 이렇게 썼다:"주공토포, 천하귀심(周公吐哺, 天下歸心)". 이 싯구는 조조가 천하의 인재를 망라하고자 하는 갈망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진시대의 사회현실도 반영한다. 그 당시 문화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관료는 민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명문세가집안에서 나왔다. 이들을 "문벌"이라고 했다. 조조의 이 싯구에 나오는 바램은 사실 이런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한미한 집안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확실히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성과가 결정적이지는 못했다. 그후, 전체 위진남북조시대에, 관리의 원천은 여전히 문벌세가가 위주였다. 가족이 별볼일없는 일반사람은 비록 관직에 오르더라도, 주류가 되지 못했따. 그러므로, 그 당시에 <<진서>>와 <<남사>>에서 말하는 "청관"의 실제의미는 명문세가에서 대대로 누리는 특수한 관직을 말한다. 이를 "청자관(淸資官)" 혹은 "청직(淸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의미는 직무가 비교적 한가하고, 지위는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한다. 하루하루 바쁘게 일하는 중하급관리는 "탁관"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등급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 글에서 언급한 <<남사>>의 유준고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청관"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유준고는 남조 송무제 유유의 친동생이다. 유유가 즉위한 후, 유준고는 후(侯)에 봉해지고, 높은 관직을 지냈다. 역사기록으로 보자면 그의 행적은 절대로 현대적인 의미의 '청백리'가 아니다. 잔혹하고 욕심많은 자였따.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청관', '청탁동관'은 오늘날과 의미가 전혀 다르다고.
제2단계
수나라는 과거제도를 건립했다. 그리고 이 제도는 당나라에도 답습되었다. 그리하여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더 공평하게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누렸다. 그러나, 전체 수, 당시기에 문벌세가의 세력은 여전히 컸다. 비록 무측천과 같은 황제가 대거 과거를 통한 보통사람을 선발하고 발탁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문벌세가가 진정 몰락하고, 한족(寒族)이나 보통사람으로 대거 교체된 것은 송나라때부터이다. 그리하여, "청관"의 개념도 최초의 역사적인 개념과 달라지게 되고, 제2단계에 진입한다. 이 단계의 대표인물은 포증(包拯, 즉 포청천)이다. 포증이 살아있을 때, '청관'이라는 칭호는 없었다. 포증의 청백리 이미지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교체기에 세워진다. 특히 원나라의 잡극에서 포증에 대한 곡목들이 나오면서, 나중에 이를 '청관희(淸官戱)'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포증은 왜 원나라때, 청관, 즉 청백리의 대표가 되었을까?
현대적인 의미에 접근하는 청백리 개념은 남송의 중후반기에 형성된다. 다만, 그것은 남송의 경내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금나라 경내에서 나타났다. 금나라의 문학가인 원호문(元好問)이 쓴 "청관"은 확실히 이미 남북조 시대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백성들이 '좋은 관리'를 부르는 하나의 칭호가 되어 버렸다. 이 시기의 '청관'의 개념은 하나의 특색이 있다. 그것은 관리들이 '염결(廉潔, 청렴)'하다는 것은 가리키지 않으며, '공정(公正)'하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포청천은 이 개념을 나타내는 하나의 부호이다. 그는 '염결'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이 특징은 원나라 잡극과 포증과 관련된 '청관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왜 이런 상황이 나타났을까?
금나라가 남하한 후, 중원의 많은 지역은 금나라에 점령당한다. 여진인들은 자신의 역사발전이 한계를 나타냄에 따라, 점령지역의 한인에 대한 통치가 낙후되고 야만적일 뿐아니라, 차별적이고 불공평했다. 이런 불공정한 통치하에서, 점령지역 한족의 불만이 폭발한다. 그들은 옛날 송나라를 그리워한다. 왜냐하면 여진인들과 비교하자면, 송나라의 통치자들은 최소한 더욱 공정했었기 때문이고, 법률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이 더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왜 '청관'의 개념이 금나라 점령지역에서 먼저 나타나고, 송나라 경내에서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원나라에 이르러, 몽골인들의 등급제도는 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원잡극에서 '청관희'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한족백성들의 원나라의 불공정한 제도에 대한 반항이었다. 역사연대가 그리 멀지않은 북송의 포증은 이 시기에 반항의 부호와 의지처가 된다.
그리하여, 원잡극에는 포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포증의 진실한 역사는 아니다. 원나라의 한인들은 당시의 사회현실에서 옛것을 빌어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원나라의 백성들에 있어서, 포증의 역사이야기가 진실하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현실을 반영하고, 현재의 백성들의 바램을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했다. 이런 불만을 표시하는 반항방식은 백성들의 지혜의 산물이다. 이러한 현상은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후에 나타난 시내암의 소설 <<수호전>>에서도 볼 수 있다. 시은, 장문신을 예로 들어, 시내암이 이런 인물들을 묘사하는데, 우리는 역사적 진실성은 따지지 않는다. 시내암이 역사에서 일부 현상을 끄집어 내어, 그저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면 족한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예술적 가공만 거치면 된다. 이런 가공된 이야기가 후세인들에게 역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지 아닐지는 시내암이 주요하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제3단계
청백리개념의 제3단계는 명나라중후반에 나타난다. 그 전형적인 대표는 해서(海瑞)이다. 이 시기의 청백리(청관) 개념은 포증으로 대표되는 공정의 기초 위에, 다시 해서로 충분히 표현된 '염결'이 추가된다. 청관개념의 이러한 변화는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 백성들에게 있어서, 불공정이 더욱 심각했다면, 그래서 그들은 공정한 청백리를 원했다면, 명나라 백성들에 있어서는 부패가 심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청렴한 청관을 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청관의 개념은 관부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백성들로부터 나왔다. 나중에 청나라는 이를 이용한다. 비록 청백리 개념이 포증에서 해서로 변화하였지만, 후세 내지 오늘날에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청백리의 이미지는 실제로 '공정' '청렴'등 여러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부패척결, 상사에 대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것,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 백성들을 도와주는 것등이 포한된다.
현재 일부 지식인들은 '청백리'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강렬하게 이를 무시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포청천이 세상을 풍미하는 것은 백성의 불행이다" "사람들의 청백리에 대한 호감이 깊을수록, 찬송이 강할수록, 법률의 비극은 더욱 심각해진다" "청백리콤플렉스가 있느냐 없느냐가 노예와 현대국민의 근본적인 구분이다" "청백리의 시대와 고별해야 한다" "청백리는 좋은 것이 아니다"등등을 얘기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이런 의견을 발표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유준고를 현대적인 청관으로 얘기하도 한다. 이를 보면, 그들이 중국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 수 있다. 당연히, 위에 열거한 이러한 주장들은 청관개념이 형성된 역사적인 환경으로 보면, 하나의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극단화된 사고의 오류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병이 나지 않으면, 약이 무슨 소용있는가? 언뜻 듣기에는 맞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히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이다. 이것을 가지고 약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비록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고생시키게 된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없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어떤 사람의 병은 뿌리뽑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약의 효능을 부정하여서는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대중의 심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간이 만들어낸 청백리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보편적인 민의, 광범위한 민심을 대표하는 부호이다. 여전히 완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백성은 아마도 청관개념의 역사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연구하여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많은 경우에, 청관은 백성의'좋은 관리'에 대한 모든 상상과 요구조건을 대표한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이 관리에 대하여 하는 평가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청백리 이미지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 현실을 형량하는 저울이다. 그것은 백성들이 부패를 대하는 하나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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