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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청나라 팔기(八旗)와 북경지명

by 중은우시 2008. 11. 6.

 

 

글: 윤균과(尹鈞科)

 

해전구(海澱區) 청하진(淸河鎭)의 북쪽에, 서삼기(西三旗), 서이기(西二旗)라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창평구(昌平區) 동남부의 북칠가진(北七家鎭)에는 동삼기(東三旗), 동이기(東二旗)라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북경의 도시건설이 발전하고,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이 몇 개의 마을은 이미 옛날처럼 시골의 면모가 없어지고, 건물과 별장이 줄지어 들어섰고, 주택단지도 바둑판처럼 들어섰다. 이 몇개의 마을의 지명도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특히 서삼기는 팔달령 고속도로의 도로표지에도 나오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마을이름에 "기(旗)"가 들어 있으므로, 사람들은 쉽게 청나라때의 상황기, 정황기, 정백기(이상을 上三旗라 함), 상백기, 정홍기, 상홍기, 정남기, 상남기(이상을 下五旗라 함)의 팔기군(八旗軍)을 연상한다. 심지어 이 몇개의 마을은 청나라때 팔기군이 주둔지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삼기등 마을의 형성이나 명칭은 청나라때의 팔기군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서삼기, 서이기, 동삼기, 동이기의 몇개 마을의 형성과 명칭은 명나라때 일부 군대가 이 일대에서 말을 기른 결과이다. 명나라때의 군제는 일부 요지에 위(衛)나 소(所)를 설치하여, 국가를 보위하는 책임을 맡겼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위(衛)에는 5,600명이 있었다. 하나의 천호(千戶)는 1,120명이 있었고, 하나의 백호(百戶)에는 112명이 있었다. 매 소(所)는 2개의 총기(總旗), 10개의 소기(小旗)를 거느린다. 매 하나의 소기에는 10명의 병졸이 있고, 매 총기에는 50명의 병졸이 있다. 이로써 볼 때, 명나라군대의 편제에서, 가장 하급단위가 "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의 "분대"와 같은 것이다. 명나라때는 몽골세력이 권토중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로 장성을 개축하는 동시에, 장성을 따라서 9개의 진(鎭)을 두었는데, "구변(九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곳은 많은 위,소의 관병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킨다. 주둔군데에 필요한 전마를 공급하기 위하여, 내지에 많은 목마초장(牧馬草場)과 마방(馬房)을 두었다. 일부 관병을 뽑아내서 전문적으로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관부를 위하여 말을 기르는 번거로운 임무를 맡았다. 명나라때, 북경지역에 목마초장과 마방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 서삼기의 동쪽에 있는 황토점(黃土店)이 바로 그 한 곳이었다. 이곳을 황토점마방이라고 불렀다. 그때, 황토점의 주위에는 마을이 몇 개 되지 않았고, 도처에 푸른 풀이 무성한 넓다란 공지였다. 황토점마방에 파견되어 말을 기르는 관군은 소의 편제인 '소기'의 번호에 따라 나누어져서 말을 길렀다. 서삼기, 서이기, 동삼기, 동이기등의 마을은 바로 명나라때 말을 기르는 각각의 소기(小旗)의 관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나중에 마을이 된다. 그리서 당시 '소기'의 번호와 주재하던 방향을 따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청하진의 동쪽, 청하북안에 '마방(馬房)'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바로 명나라때 청하마방의 유적이다. 창평 소탕산의 남쪽, 온유하북안에도 '마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소탕산마방의 범위에 속한다. 명나라때 북경에는 마방이 아주 많았다는 것을 이런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북경교외에 청나라 팔기군의 주둔으로 형성되고 이름을 얻은 마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원명원(圓明園)주위와 향산(香山)부근에서 볼 수 있다.

 

청나라초기, 만주팔기이건 몽고팔기, 한군팔기이건 관병은 모두 북경 내성(內城)에 거주했다. 상황기는 안정문안에, 정백기는 동직문안에, 상백기는 조양문안에, 정남기는 숭문문안에 있었고, 이 4기를 "좌익(左翼)"이라고 불렀다, 정황기는 덕승문안에, 정홍기는 서직문안에, 상홍기는 부성문안에, 상남기는 선무문안에 있었는데, 이 4개를 "우익(右翼)"이라고 불렀다. 당시, 북경내성에 나누어 거주하던 청나라 팔기관병은 분명하지만 규칙적이지는 않은 권층(圈層)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중 만주팔기가 황성(皇城)의 주위에 나누어 거주했는데, 가장 안쪽의 권층을 형성한다. 그 바깥에 몽고팔기가 있고, 다시 그 바깥에 한군팔기가 있었다. 이런 상태는 청나라통치자들이 서로 다른 족속의 관병에 대한 신뢰감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강희연간에, 청나라황실은 북경서쪽교외의 황가원림(皇家園林)을 짓기 시작한다. 먼저, 이미 황폐해진 명나라 무청후 이위(李偉)의 청화원(淸華園)을 기초로 창춘원(暢春園, 현재 북경대학교 서쪽)을 만들어, 강희황제와 황태후가 피서하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는다. 강희48년(1709년)에는 다시 창춘원의 북쪽에 원명원을 짓고, 황사자 윤진(나중에 옹정제)에게 하사한다. 강희61년(1722년) 11월 강희제가 죽은 후, 옹친왕 윤신이 즉위하고, 옹정제가 된다. 이후 건륭년간까지, 다시 대규모로 원명원을 확장한다. 그리고 동쪽의 수마촌(水磨村)에 장춘원(長春園)을 짓는다. 다시 원명원의 동남쪽 담장바깥에 교휘원(交輝園)을 위시한 몇 개의 사원(私園)을 몰수하고 개조하여, 기춘원(綺春園)이라고 칭한다. 이렇게 하여, 서로 연결된 원명원, 장춘원, 기춘원을 합하여 "만원지원(萬園之園)"이라고 불리우는 아름답고 휘황한 황가이궁 - 원명삼원이 탄생한다. 옹정제이후, 건륭, 가경, 도광, 함풍등 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매년 원명원에 몇 달씩 머물고, 거기서 조정의 정사를 본다. 원명원은 자금성을 제외한 또 하나의 황궁이 된다. 원명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정2년(1724년)부터 원명원 팔기호군영(八旗護軍營)을 둔다. 원명원의 주위에 영방(營房) 여덟 소(八所)를 두고 매소의 영방은 관방 1천5백여칸으로 만들고 담장을 쌓는다. 북경성내의 만주팔기중에서 뽑힌 일부 관병이 이곳으로 와서 주둔했다. 그 중에, 상황기영방은 원명원의 뒤 수촌의 서쪽에 있고, 정백기영방은 수촌의 동쪽에 있었고, 상백기영방은 장춘원의 동북, 정황기의 영방은 원명원 서북모서리바깥의 소가하촌의 북쪽, 정홍기영방은 북안하교의 서북쪽, 상홍기영방은 옥천산 동북, 정남기영방은 해정의 동쪽, 상남기영방은 청의원(이화원)의 남쪽 남전창에 있었다. 정백기가 한 곳의 소영방을 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는 모두 한 곳에 집중하여 주둔했다. 매 영방에는 관병이 사,오백명이 있었고, 군내직급의 고저에 따라 거주하는 방을 분배받았다. 많은 자는 13칸, 적은 자는 2,3칸을 받았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이들 원명원 팔기영방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촌락으로 바뀌어 주민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모두 원명원 유적지의 주위에 흩어져 있다. 남기영(藍旗營), 상백기, 정황기, 상홍기등의 지명은 이들 마을의 내력을 말해준다.

 

건륭14년(1749년), 향산에 일종의 '특수병(特種兵)'을 설치한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운제(雲梯, 공성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을 공격하는 기술과 전법을 훈련하는 곳이었고, 이름을 건예운제영(健銳雲梯營)이라고 했다. 건예운제영의 관병은 모두 이전에 대금천전투, 소금천전투에 참여했던 정예병사들 중에서 뽑아서 아주 용감했고, 전투를 잘했다. 당시 8기관병 천여명이 좌우양익으로 나뉘어, 좌익에는 상황,정백,상백,정남의 4기가, 우익에는 정황,정홍,상남,상홍의 4기가 있었다. 좌익은 4층짜리 조루(樓) 14개를 지었고, 3층 조루 18개를 지었다. 우익은 5층조루 2개, 4층조루 10개, 3층조루 24개를 지어서, 관병들이 운제를 기어올라 성벽에 오르는 훈련을 했다. 건예운제팔기병은 나중에 천여명이 다시 증원된다. 건륭15년(1750년) 향산 정의원(靜宜園)에 왔을 때, 건예운제영의 군사들에게 음식을 하사하며, 관심을 표명한 적이 있다. 나중에 건륭제는 여러번 향산의 건예운제영에 와서 훈련상황을 검열했고, 크게 칭찬했다. 예를 들면, 건륭37년(1772년) <<어제열무시>>를 지어 칭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건륭제가 신강의 회부를 평정할 때, 건예운제영의 병사들은 위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산의 건예운제영팔기의 영방은 향산의 동쪽산록에 흩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향산공원의 앞에 있는 단성(團城), 열무루(閱武樓)와 상황북영, 상황서영, 정백기, 상백기, 정남기, 정황기, 정홍기, 상홍기, 상남기등의 마을과 지명의 유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