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어투와 밍주는 모두 강희제에게는 오른팔, 왼팔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강희제를 도와 청나라정권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그들 둘이 이끄는 양파는 무한한 투쟁을 계속했고, 이것은 정치에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어투는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 강희초기의 4대보정(輔政)중의 우두머리였던 소니(索尼)의 셋째아들이다. 소니는 청나라의 개국공신이며, 순치제가 임종시에 4명의 대신을 보정으로 임명하여 강희제를 도우도록 하였는데, 소니가 그중 우두머리였다. 소어투의 세 형제중에서 두 사람은 1등공으로 한 사람은 1등백을 받았다. 소어투의 질녀는 또한 강희제의 황후로서 황태자인 윤잉의 생모였다. 그는 명문집안출신으로 명성이 혁혁했다. 소어투는 일찌감치부터 강희제의 심복이었고, 청나라중신의 신분으로 러시아와의 <<니부츠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의 국경선협상을 마무리짓는다. 소어투는 아오바이(鰲拜)를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됨에 따라 1669년 1등시위에서 대학사로 승진하고, 다시 영시위내대신이 되어 조정대신중 가장 중요한 실권자가 되며, 곧바로 "태자당"의 우두머리가 된다. 소위 태자당은 황태자를 위하여 계책을 바치는 정치집단이고, 소어투는 정교하게 기획하여 황태자제도를 만든다. 당시 황태자에 대한 예의는 황제와 거의 같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황태자의 복식은 모두 황색을 사용하고, 대신들을 황제를 배알한 후 반드시 황태자를 배알하여야 했다. 강희제는 소어투와 그의 집단이 사사로운 권력욕심을 가진 것으 ㄹ보고는 그를 구금시킨다. 그리고 1701년에 그를 은퇴시킨다.
밍주도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그는 황장자(皇長子, 큰아들)인 윤지의 친외삼촌이 된다. 즉, 혜비 나라씨의 친오빠이다. 출신문벌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그는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나중에 1품고관에 오르고 소어투와 함께 조정을 좌지우지한다. 밍주가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그가 1673년 병부상서를 맡아서 이룩한 업적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강희제는 밍주를 중용한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철번(오삼계등 삼번을 철폐할 것인지 문제)"을 논할 때, 밍주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철번을 주장한다. 이것은 강희제의 뜻에 완전히 부합했다. 그는 동시에 공개적으로 소어투와의 사이에 중대한 문제를 처리할 때 이견을 제시한다. 밍주가 정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후에도 소어투와의 사이에는 출신과 성격상의 차이등으로 인하여 계속 서로 다른 개성을 드러내고, 대치하며 갈등이 발생한다. 그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황장자 윤지를 도와서 대학사 여국주등의중신과 연결시켜주고, "장자당"의 세력강화를 꾀한다. 이로써 그는 "장자당"의 중심인물이 된다. 곧이어 태자당과 장자당의 알력은 빙탄불상용의 지경에 이르게 되고, 1687년 겨울, 강희제는 밍주, 여국주등의 매관매직의 행위를 발견하고 밍주의 대학사 직위를 박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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