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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남경 대보은사탑(大報恩寺塔)의 7가지 수수께끼 (I)

by 중은우시 2008. 7. 28.

글: 예방육(倪方六)

 

2008년 7월 12일(토요일), 발굴계획에 따라, 유명한 명나라때의 대보은사탑 지궁(地宮)이 남경에서 열리게 된다. 안에 보물이 남아 있을까? 명성조 영락제 주체(朱)가 탑을 건립하게 된 수수께끼와 주체의 생모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해결할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고고학자들과 사학계에서는 크게 기대를 걸고 있다. 만일 지궁이 아직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정말 기쁜 일이라고 생각된다.

 

중국 중세기의 세계 '칠대기관'중의 하나로 꼽히는 대보은사탑에는 수수께끼가 수두룩하다. 5,6백년이래로 사람들이 많이 논란을 벌였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중에서고 7가지 수수께끼는 진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남경대보은사의 중건과 지궁을 열게 되니, 여기서 논해보기로 하자.

 

첫번째 수수께끼: 주체는 도대체 누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것인가?

 

사서에는 아주 명확하게 쓰고 있다. 주체는 모친의 양육은혜를 갚기 위하여 건립했다고. 그러나 누가 모친인지에 대하여는 좀더 살펴보아야 한다. 최근들어 출판된 학술저작에서는 이에 대하여 거의 정론이 나온 것같다. "명성조 주체는 그의 생모 공비(妃)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했다."  예를 들면, 중국고건축의 권위자인 반곡서(潘谷西) 선생이 주편(主編)인 <<중국고대건축사. 원.명권>>(제4권)에서 이런 견해를 취하고 있다. 얼마전에 반선생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만, <<명사.성조본기>>(권5)에서는 "성조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휘(諱) 체()는 태조의 넷째 아들이다. 모친은 자효고황후이다. 홍무3년, 연왕에 봉해지다"라고 적고 있다.

 

이 "자효고황후(慈孝高皇后)"는 주원장의 본부인인 유명한 대각황후(大脚皇后) 마수영(馬秀英)이지, 조선에서 온 공비가 아니다. 이러한 기록은 책임있는 글이다. 주체는 원나라 지정20년 사월 십칠일(1360년 5월 2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응천부(남경)이다. 당시 주원장은 황제가 아니었을 뿐아니라(1368년에야 황제를 칭함), '왕'도 아니었다(1363년 진우량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에 비로소 '오왕'을 칭한다). 그러므로, 대보은사 및 탑은 주체가 그의 생모인 공비를 기려서 건축한 것이라는 것은 포풍착영(捕風捉影)의 혐의가 짙다.

 

"그의 생모 공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주장의 근원은 야사(野史)이다. 전설에 따르면, 공비는 억울하게 죽었고, 친아들인 주체 본인도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모친의 낳고 길러준 은혜를 보답한다는 명목으로 절과 탑을 지어 그녀를 기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직접적인 증거는 모두 <<강남태상시지(江南太常寺誌)>>의 글자이다. 그중 효릉의 신위(神位)에 관한 기록에서, "왼쪽 첫번째는 숙비 이씨로 의문태자, 진민왕, 진공왕을 낳았고, 우�의 첫번째는 공비로 성조 문황제를 낳았으며, 모두 능전에 배향되었고, 사관(祀官)이 장관하였고, 삼백년동안 바뀌지 않았다"

 

다만, 민간에는 당시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주체가 황제위를 찬탈하고, '정난지변'으로 조가 주윤문을 황제에서 쫓아낸 일에 대하여 조야의 상하에서 모두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방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드높았다. 그중 한가지 목소리는 바로 주체가 마황후가 낳고 기른 것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이었다. 혈통에 문제가 있고, 잡종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친조카를 없애고 황제위를 차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체는 한편으로는 언론을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도를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 자기가 마황후의 소생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북경으로 천도할 때인 영원10년(1412년)에 토목공사를 하여 대보은사와 탑을 지어서, 마황후의 양육의 은혜에 감사하였고, 자신에게 덮인 역사의 시비를 씻어버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금릉대보은사탑지>>는 1937년 중화민국시기의 출판물인데, 작자는 학자인 장혜의이다. 그는 각종 판본의 주장을 끌어모았는데, 이런 기록도 있다: "영락10년, 북으로 천도하다. 고황제의 깊은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6월 15일 정오에 착공하여, 선덕6년 8월 초하루에 완공하니 모두 19년이 걸렸다. 공부시랑 황립공에게 명하여 대내의 도면과 방식에 따라, 9층5색의 유리보탑하나를 세우게 하니, 제일탑이라 한다. 이로써 선황태후의 덕을 드높였다" 다만, 역사가 과연 이러했는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특히 모두 공비가 주체의 생모라고 하고 있어서, 사정은 더욱 복잡해 졌다. 이 보은사탑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지은 것인지 지금까지도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실제로, 주원장이 황제를 지낼 때, 공부시랑 황립공이 주청을 올린 적이 있으나, 국력문제로 즉시 착공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주체가 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계속 미뤄왔던 것을 허가한 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체가 탑을 지은 것이 선황태후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둘째 수수께끼: 왜 장간리(長干里)에 만들었을까?

 

대보은사탑의 구체적인 장소는 남경성의 남쪽에 있는 동장간리(東長干里)이다. 현재의 우화로 동쪽이 된다. 이 곳은 중국의 고전적인 낭만이 남아 있는 곳이다. 당나라때의 대시인 이백은 <<장간행>>을 지었는데, 그 안에는 명구인 "낭기죽마래, 요상농청매, 동거장간리, 양소무혐시(郎騎竹馬來, 繞牀弄靑梅, 同居長干里, 兩小無嫌猜, 그대는 대나무말을 타고 와서, 우물가를 돌면서 푸른 매실을 가지고 놀고, 함께 장간리에 살면서, 어린 두 꼬마는 서로 싫어하거나 시기하지 않았지요)"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매죽마(靑梅竹馬)", "죽마고우(竹馬故友)", "양소무시(兩小無猜)"등의 고사성어가 나오게 되는데, 그 장간리가 바로 이 곳이다. 민간의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는 기이한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주체가 탑을 짓기 전에, 이곳에는 일찌기 아육왕불탑(阿育王佛塔)이 있었다. 불교를 숭상하던 양무제 소연(蕭衍)은 대동8년(543년)에 탑을 개조하고 장간사(長干寺)를 다시 지었고, 장간탑(長干塔)이라고 탑명을 고쳤다. 송나라 천희연간에 다시 천희사(天禧寺)로 개칭되고, 성감탑(聖感塔)을 짓는다. 원나라 지정연간에 다시 천희자은정충사(天禧慈恩旌忠寺)로 고치고, 원나라말기에 탑이 무너진다. 양무제는 왜 장간사를 재건했을까? <<행아육왕사조>>에 따르면, 그때 하늘에 기이한 기운이 일었기 때문이다: "달이 오거(五車)를 범하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탑을 다 지은 후에, 돌연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아육왕은 원래 철륜왕이라고 하는데, 전설에 다르면 하루낮 하루밤만에 귀신을 시켜 8만4천탑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 탑도 그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탑은 양무제가 개조하기 전에 여러번 중건되었다. 그런데, 탑을 지은 후에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람에 불문성지로 된다.

 

주체는 보은사탑의 건축지를 이 곳을로 정하는데, 이러한 것을 고려했을까? 여기에도 하나의 전설이 있다. 주체는 '정난지변'을 일으킬 때 일찌기 마황후에게 맹서한 바 있다는 것이다. 황제에 오르면 절과 탑을 하나 지어 보답하겠다고. 병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널 때, 강에서 돌연 하나의 보탑이 나타나서, 주체까 깜짝 놀랐는데, 돌연 거사를 일으킬 때 한 맹세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황제가 된 후 다음 날, 또 하나의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천희사에서 돌연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누군가 황제인 주체에게 보고했고, 주체는 이를 들은 후 불을 끄지 말라고 지시하여, 큰 불은 절을 깨끗이 불태운다. 불이 꺼진 후, 주체는 사람을 시켜 절부지의 모든 잿더미와 잡물을 제거하게 한 후, 장강에 버리게 했다. 그리고 원래의 부지에 새로 절과 탑을 지었으니, 이것이 바로 대보은사와 대보은사탑이다.

 

주체가 친히 쓴 <<어제대보은사좌비>>에 보면, 주체의 생각은 이곳이 불교와 인연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새로 바꾸어, 탑을 새로 만드니, 높고 아름답기가 전대보다 더 하다. 이름을 바꾸어 '대보은사'라 하고, 신령에게 기도하여, 위로는 선황과 선황후의 복을 기리고..."

 

이후, 대보은사탑에는 이상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예를 들어, 명효종 주우당이 죽은 후, 17세인 주후조가 황제에 올랐다. 주후조가 황제가 된 첫해(1506년)에 여러해동안 아무 일없던 대보은사탑에 문제가 발생한다. 번개를 맞은 것이다. 명나라의 신하들은 즉시 수리할 것을 건의하지만, 이 건의는 반대에 부닥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불길한 징조이며, 신황제를 경고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 것이다. <<명사. 증감전>>(권185)에 따르면, "정덕원년, 번개가 남경 보은사탑을 때리다. 수비중관 부용이 수리할 것을 청했다. (증)감은 하늘의 뜻이 경고를 보인 것이므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건의해서, 이를 멈추었다."

 

셋째 수수께끼: 죄수들이 탑건설공사에 참가했는가?

 

보은사와 탑을 건립하는데, 시간이 비교적 길었고, 공사량도 엄청났다. 앞뒤도 19년(일설에는 16년)이 소요되었다. 주체는 생전에 이 탑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그가 북벌도중에 불행히 병을 얻어 죽을 때도 여전히 완공되지 못했었다. 그의 손자인 주첨기가 황제에 올라있던 선덕6년(일설에는 선덕2년)에 비로소 완공된다. 이렇게 큰 공사에 인력이 매우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모두 10만명이 공사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일반적인 견해는 "군장부역(軍匠夫役)을 징집"하였다는 것이다. 주로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병사이고 하나는 백성이다. <<명사>>에서 토로한 상황을 보자면, 현장에 군인들이 확실히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반드시 노역을 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즉, 질서유지와 안전보안업무를 담당했을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시공현장에 있었다는 것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인부들이 도망칠 것을 우려한 것일까? 민간의 전설에는, 정말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보은사와 탑은 죄수들이 건축했다는 것이다. 공사에서 특히 노동자들 특히 막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모두 죄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서에서도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명사. 정진전>>(권157)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남경은 황상의 명으로 보은사를 지었다. 죄수 만명이 동원되었다. 역부들이 비난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서 이들이 변을 일으킬까 우려되어, 정진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상의 문제에서 보자면, 보은사를 지을 때의 공사조건은 아주 열악했고, 죄수들의 원성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고, ㅜ주체는 정진을 보내어 조사하게 시켰다는 것이다. 죄수들이 열심히 일하게 하기 위하여 주체는 조서를 내려, "죽을 죄를 지은 자들은 절이 완공되는 날, 사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다만 이렇게 큰 황실의 공사를 모두 죄수들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나라초기의 장인들은 주로 원나라때의 장호(匠戶)이다. 장인은 기술직이고, 아래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은 역부이다. 모든 장인에게는 5명의 역부를 붙여주었다. 장인은 윤반제(輪班制)를 시행하여 3년에 한번씩 돌아갔다. 즉, 소집된 장인은 3년후에 비로소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유리를 굽는 장인은 1년에 1번씩 돌아갔다. 그리고 한번 오면 연속 3개월은 최소한 일해야 했다. 이외에 좌주제(坐住制)를 실시했다. 군인들을 격려하고, 장인의 노동열정을 장려하기 위하여, 주체는 "군인, 장인이 1년이상 일을 하면서 시종 업무를 벗어나지 않은 자는 1인마다 현금 10정(錠), 포 양필을 상으로 내린다; 장인은 잡차역, 군인은 남은 군역기간을 각 2년씩 면제해준다."

 

넷째, 공사기술이 실전된 것은 장인이 '멸종(滅種)'되었기 때문인가?

 

보은사탑은 중국고건축사상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일찌기, '중국의 대골동(大古董), 영락의 대요기(大器)"라고 불리웠다. 탑을 덮은 기와와 공문(拱門)은 오색의 유리로 만들었고, 탑은 2000냥의 황금으로 만들었다. 비마, 비양, 사자, 백상등의 도안이 있었는데, 생동감있고 아름다웠다. 전체 탑에 풍령(風鈴)을 152개 달았고, 탑안에 기름등(油燈)을 모두 146잔(盞) 달았다. 밤낮으로 환하여 '장명등(長明燈)'이라고 불렀다. 매일 저녁에 기름을 64근씩 소모했다.

 

대보은사탑은 건축에서 유리조각을 썼다는데 있다. 유리(琉璃)는 사실 도자기기술의 하나이다. 탑을 건설하는데 쓴 유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구웠다. 유리는 중국고대문헌에서 여러가지 명칭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구림(琳)', '유리(琉璃)', '육리(陸離)', '청금석(靑金石)', '청옥(靑玉)', '파려(頗黎)', '파리(璃)'등이 그것이다. 일찌기 유리라 함은 자연보석이나 인조보석, 파리, 유약을 바른 도자기등을 가리켰다. 원,명이래로 유리는 유약을 바른 도자기제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유리는 도자기 흙을 가지고 1200도정도의 고온에서 구워서 만드는데, 표면에 유약을 바른 후 다시 800도가량의 저온으로 구워서 완성한다. 이에 따라 저온색유에 속한다. 산화납이나 유황을 촉진제로 쓰고, 철, 동, 코발트, 망간등을 착색제로 쓴다. 다시 석영을 배합하여 완성한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어떤 배합을 쓰는지는 모두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유리공예는 심지어 민국시대의 것까지도 모르고 있다. 1970,80년대에 남경 중산릉의 한 곳에 있는 유리부분이 벼락을 맞아 부서졌다. 그래도 적합한 것을 찾아서 대체하지를 못했다. 중국근현대건축설계의 개척자중 하나이자, 이미 사망한 저명한 건축학자 양정보는 이를 듣고 아주 유감으로 여겼다.  국민당이 지었는데, 건국한지 수십년된 공산당은 수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대보은사탑의 유리장인은 모두 외지에서 왔는데, 산서출신이 많았다. 제조공법이 실전된 것은 아마도 중국전통공법의 전승방식과도 관련이 되는 것같다. 유리제조기술, 특히 유약배합비법은 외부에 전하지 않았다. 과거 유리제작은 장인들이 대대로 전해내려가거나 스승과 제자로 전해졌다. "부전자, 자전손, 유리부전외성인(父傳子, 子傳孫, 琉璃不傳外姓人, 아버지가 아들에 전하고, 아들은 손자에 전한다. 유리기술은 다른 성에는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자부전녀(傳子不傳女, 아들에 전하고 딸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습속이 있었다. 시간이 오래 흐르면 실전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또 하나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원인이 있다. 유리제조공법의 배합비법은 색깔있는 유약을 잘 섞이게 하고, 반짝거리게 하기 위하여 납을 쓰는데, 납에는 독성이 있다. 당시 유리제조에 종사하던 가족들 중에는 납중독으로 단명하는 사람이 많았고,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절종(絶種, 씨가 끊어짐)'되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유리공예의 실전을 불러온다. '유리의 고향'이라는 산서에는 옛날에 유리산지로 이름을 날리던 후손들이 지금은 거의 소식조차 없다. 바보가 되기도 하고, 멍청이가 되기도 했다. 이것도 아마 이와 직접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전문가에 따르면, 고대의 유리공예비법은 실제 실전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기술은 도자기업계내에서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찌기 유리제조공예에 대하여 전문적인 조사연구를 한 남경공업대학 건축학원장 왕영평 교수는 이런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송나라의 <<영조법식>>, 명나라의 <<천공개물>> 및 일부 문인의 글에서 모두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날기와를 만드는데서, 완성품에 이르기까지, 20가지 공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안의 '화후(火候)'가 중요하다. 첫번째 구울 때는 경험있는 장인이 흙기와를 굽는데, 나중에 유약이 잘 발리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리를 제작하는 흙을 북방에서 "감자토(子土)", "아근석(牙根石)'이라고 부르고, 남방에서는 "백토(白土)"라고 부른다. 그것의 산지는 아주 널리 분포되어 있다. 명나라때는 안휘 당도(當塗)의 백토를 가장 좋은 것으로 쳤다. 회백색을 나타내는데, 굽고 나면 백색이 된다. 대보은사탑의 유리도 이곳의 백토로 구워졌다.

 

공법이 실전되었는지 아닌지를 말로만 해서는 소용이 없다. 남경에는 전문가가 기록에 따라 비밀리에 공법시험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만들어낸 물건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유리제조를 가장 잘 하는 곳은 북경의 문두구일대이다. 고궁의 수리할 때 쓰는 재료는 이 곳에서 난다. 그러나, 명나라때의 공법과는 서로 다르다. 비록 각 공장에서 서로 자기가 가장 정종(正宗)의 공법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고궁을 수리할 때 쓰는 유리가 믿을만한지, 정종인지는 시간이 흘러야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