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남월왕 조타, 그는 중국역사상 화제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유방보다도 먼저 황제를 칭했다. 그리고 조타를 황제로 취급해준다면, 그는 중국고대에 가장 장수한 황제이기도 하다. 조타의 출생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기원전203년에 즉위했고, 기원전 17년에 사망했으니, 100살이상을 살았다. 그는 진시황, 한고조, 한문제,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두 황조의 4명의 임금을 겪었다. 그는 아들조차 모두 죽어버려서, 할 수없이 손자가 황제위를 이었다.
조타가 죽은 후, 어디에 묻혔을까? 이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아직도 찾지를 못했다. 조타의 능묘는 아주 컸다고 전해진다. 산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왜 역대의 사람들이 조타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관심을 보였을까? 그것은 묘안에 부장된 보물이 무수하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남월국은 지금의 광저우(廣州)를 중심으로, 영남일대의 지역을 통치했다. 남뤌국은 남해에 접해서, 도성인 번옹(番禺)은 영남지역에서 각종 특산물의 집산지였고, 기진이보가 가득했다. 조타는 생전에 문화재수장의 취미도 있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천하의 기진이보를 긁어모았다. 그는 당시에 한나라 황제에게 '산호(珊瑚)"를 선물했는데, <<서경잡기>>의 묘사에 따르면, 이 산호는 "봉화수(烽火樹)"라고도 부르는데, 밤에는 빛을 내는데 마치 불타고 있는 불꽃과 같았다고 한다. 한나라궁전의 적초지(積草池)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의 많은 보물들은 그가 죽으면서 묘에 묻혀버렸다.
조타의 묘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묻혀 있을까? <<교광춘추>>에서는 개략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타의 묘는 산으로 분묘를 만들었다. 그 농영(壟塋, 무덤)이 호화사치스럽고 컸다. 묘안에는 각종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바로 조타의 능묘에 부장된 보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신비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만 그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도굴범들도 계속하여 찾아다녔다. 조타가 죽은 후 300년만에 오(吳)나라의 황제인 손권도 그에 유혹당한다. 조타의 묘를 도굴하는 것을 '국가대사'로 삼는다. 이를 찾아서 국가재정수입을 증가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조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남월로 보내었다. 비록 손권이 광주성을 거의 다 뒤집어엎었지만, 그의 묘는 찾아내지 못했다.
조타의 묘는 확실히 찾기 어렵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밀한 탐측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고고학자들이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에 발견된 제2대남월왕릉은 아주 뜻밖에 찾아낸 것이다. 눈먼 고양이가 죽은 쥐를 잡은 꼴이다. 조타의 묘는 왜 찾기가 어려운가? 원래, 조타는 비장(秘葬)을 실행했다. 묘내에 부장된 보물이 부지기수이므로, 도굴을 방지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간교한 조타는 생전에 이를 위하여 온갖 머리를 짜냈다.
조타는 어떻게 비장을 했는가? 북송의 정웅이 쓴 <<번옹잡지>>에 따르면, "조타의 의총(疑塚, 가짜무덤)은 현 동북 200보에 있다. 전해지기로 조타가 죽은 후에 묘를 여러 곳에 만들고나서 묻었다고 한다. 장례행렬이 사방으로 나갔으므로 어디에 묻었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여러개의 묘를 만들고, 죽은 후에 4방의 문으로 장례행렬이 나갔다. 이는 진나라 사람 광범이 <<교광춘추>>(이미 전해지지 않음)에서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 "(조)타는...죽어서 비이신밀(秘異神密)한 묘에 묻혔다". <<교광춘추>>는 전해지지 않지만, 본문에서 언급하는 글들은 청나라사람 굴대균이 <<광동신어.분어>>(권19)에 인용해놓은 것들이다.
필자는 중국고대의 장례자료를 찾아보았다. 일찌기 춘추시기에 "허총(虛塚)"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공자가 죽은 후에, 제자는 5개의 허묘(虛墓)를 만들었다. 소위 '허총'은 '가분(假墳)', 허묘(虛墓), 허장(虛葬), 잠장(潛葬), 잠매(潛埋)등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가짜로 만든 분묘를 말한다. 진짜 분묘는 비밀리에 숨겨놓는 것이다. 이런 가짜묘는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와 같지만, 열어보면 묘안이 텅 비어 있다. 도굴범들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는 바로 이런 '허총'이다. 엄청나게 고생을 해서 팠는데, 가짜인 것이다. 현대고고학에서도 이런 일은 수시로 벌어진다.
그후, 비장은 제왕들의 사랑을 받는다. 비장을 가장 떠받든 사람은 삼국시기의 도굴광인인 위무제 조조이다. 조조는 생전에 '72개의 의총'을 만들어 두었다. 죽은 후에는 업성의 여러 성문으로 장례행렬이 나갔다. 어떤 사람은 진짜 시신은 업성밖의 장하(漳河) 아래에 묻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그후에 십육국의 제왕들도 '허총'을 사랑했다. 여러곳에 가짜묘를 만들어서 도굴범들을 속였다. 십육국시기의 제왕들은 거의 모두 비장제를 시행했다. 예를 들어, 후조의 창업자인 석륵, 무제 석계룡이 모두 자신의 묘를 여러 곳에 만들어 둔다. 석륵은 심지어 한밤중에 장례행렬을 출발시키기도 했다. 관을 들고 깜깜한 밤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도 고고학계에서 이 시기의 제왕묘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비장의 전설중 가장 신비스러운 것은 명태조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죽기 전에 후계자로 손자인 주윤문을 정한 후, 구유(口諭)를 남긴다. 사후에 신속히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주윤문은 말을 잘 들었다. 주원장이 죽은 후 칠일째 되는 날, 매장을 마친다. 이는 중국고대제왕들 중에서는 보기드문 속장(速葬)이다. 장례식이 있던 나, 남경의 13개 성문은 동시에 열리고 관이 나간다. 한꺼번에 상여가 나간 것이다.
조타의 능묘는 도굴방지수단이 뛰어났고 성공적이었다. 성공적으로 역대의 도굴범들을 뿌리쳤다. 심지어 도굴황제인 손권마저도 미궁에 빠트렸다. 아마도 조타의 묘가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너무나 찾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글로서 도굴의 쾌감을 느끼고자 한다.
당나라때, 이를 근거로 황당한 도굴소설이 쓰여진다. 이름은 <<최위(崔煒)>>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최위는 신선의 도움을 받아, 조타의 묘에 들어간다. 묘의 공간은 아주 넓었다. 최위는 그 안에 각종 호화스럽기 그지없는 물건과 기진이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설상 조타와 함께 순장된 것으로 알려진 동구왕 요와 민월왕 무제가 바친 4명의 시녀를 보았다. 조타는 그가 들어온 것을 안 후에, 제왕 전횡의 딸인 전부인을 최위에게 시첩으로 주고, 서아시아 대식국의 야광주를 1개 선물한다.
조타묘는 도굴되었을까? 기남대학의 한 역사학 교수는 조타의 묘가 이미 당나라때 도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바로 도굴소설 <<최위>>이다. 이유는 도굴소설에 묘사된 광경은 1980년에 광저우에서 발견된 제2대 남월왕묘의 고고발견에서 나타난 것과 놀랄 정도로 닮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친히 겪은 사람이 묘사하지 않았다면, <<최위>>는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조타의 묘가 도굴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고고학적 발견을 대체할 수는 없다. 만일 조타의 묘가 정말 도굴되어 훼손되지 않고, 어느 곳인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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