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利蒼)' 인장
글: 문재봉(文裁縫)
1972년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에서 발굴된 한묘(漢墓)는 중국고대역사상의 중대한 발견이다. 그중 1호묘에서는 한구의 여자시신을 발굴하였는데, 이 시신은 지하에 이미 2100여년을 묻혀 있었지만, 출토시에 외형이 완전무결했고, 전신의 피부가 부드러웠으며, 피하지방도 풍만했고, 피부조직에는 아직 탄성이 있었고, 근육과 연골등 세부적인 구조도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체내에 방부제를 주사할 때는 혈관이 부풀어 올랐고, 손가락과 발가락의 지문도 아주 뚜렸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부장품으로는 칠기, 도기, 백서(帛書), 방직품, 백화(帛畵), 악기등 대량의 진귀한 역사문물이 있어서, 중국고대역사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왕퇴 한묘의 발굴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고고발견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중국고고학계에서는 "북에는 병마용, 남에는 마왕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마왕퇴 여자시신이 발견된 후, 그녀의 신분은 여러 사람들이 논쟁하는 촛점이 되었다. 각종 추측과 전설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기이한 주장은 마왕퇴의 여자시신이 바로 한문제(漢文帝)의 생모라는 설이었다. 심지어 텔레비전드라마 <<신추전기(辛追傳奇)>>에서는 이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떠버였다. 그렇다면 마왕퇴의 여자시신이 정말 한문제의 모친일까? 그녀의 진실한 신분은 무엇일까?
마왕퇴의 여자시신이 출토된 후, 묘에서는 "대후가(軑侯家)"와 "대후가승(軑侯家丞)"이라는 명문 및 봉니(封泥)가 나왔고, "첩신추(妾辛追)"라고 새겨진 도장이 나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묘의 주인이름이 "신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분은 "대후"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묘주인의 신분에 대하여 각종 추단을 했는데, 종합하면 아래의 네 가지이다.
제1설: 묘주인은 장사왕 오신(吳臣)의 처이면서, 대후리창(軑侯利蒼)의 딸이라는 것이다. 오신은 제1대 장사왕 오예(吳芮)의 아들로, 장사왕을 세습했다. 리창은 유방의 부장인 이기(利幾)의 아들인데, 회남왕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로를 세워 "대후"의 작위를 받았다. 묘중에 나온 "대후가" "대후가승"의 명문과 봉니, 그리고 "첩신추"라는 인장이 있는데,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리창은 조정에서 장사국의 국상(國相)으로 파견되어, 1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그러니, 딸을 장사국왕에게 시집보낼만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친정에서 혼수품을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많다. 이외에 한나라초기에 이성에 분봉한 특례로 볼 때, 조정은 아마도 리창을 파견하여 장사왕을 감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시의 편의를 위하여, 리창은 딸을 장사왕 오신에게 시집보냈을 것이다.
제2설: 묘주인은 제1대 대후리창의 처라는 것이다. 주요한 이유는 묘에서 출토된 유책(遺策) 죽간(竹簡)은 한나라초기의 글자체인데다가, "대후가승"은 대후의 부하이다. 그리고, "우위(右尉)"는 장사국승상의 부하이다. 이는 묘주인의 남편신분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대후이면서 장사국승상인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리창은 당시 장사국의 국상이다. 전집안식구가 장사에 거주했다. 그러므로, 가족이 죽은 후에 장사에 묻혔을 것이다. 이로써 추단하면, 마왕퇴의 여자시신은 제1대 대후인 리창의 부인이다.
제3설: 묘주인은 제2대 대후인 리희(利豨)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리희는 리창의 아들이고, 리창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 견해의 주요한 근거는 묘에서 발견된 한문제의 반냥전(半兩錢) 때문이다. 리창은 고후3년에 죽었으므로, 제1대 대후일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된 봉니중에는 대후국 인물의 활동흔적만 보이고, 장사국 상부관리의 활동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후가 승상을 할 때 매장된 것일 수는 없다; 그리고 묘지가 엄격하게 법도에 맞는다는 것을 보면, 한나라때 열후의 가승제도가 한문제에 이르러 정규화되었으므로, 묘주인은 제2대 대후의 처라고 할 것이다.
제4설: 묘주인은 한경제(漢景帝)의 비(妃)인 정희(程姬)라는 설이다. 1973년 제9기 <<문물>>에 발표된 <<마왕퇴의 여자시신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글이 있는데, 작자는 육갑풍(陸甲豊)이다. 문장은 상세하게 <<태평환우기>>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장사현의 옆 10리에 쌍녀분(雙女墳)이 있다", 그리고, "쌍녀묘는 바로 장사왕의 정(程), 당(唐)의 이희(二姬)의 무덤이다. 무덤의 높이는 7장이다" 이 마왕퇴묘의 실제상황과 들어맞는다는 것이며, 묘에서 발견된 '대후가'등의 명문이 있는 칠기에 대하여 작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내준 부장품'이라고 본다. 마왕퇴한묘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묘의 주인의 신분이 공주, 귀인, 비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하면 여자시신은 정희라는 것이다"
이러한 4가지 추측은 모두 근거가 있고 이치에 맞는 부분이 있다. 그리하여 서로 대립하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이로 인하여 여러가지 추측과 전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진상은 금방 밝혀지게 된다.
1973년말에서 1974년초에 고고대는 연이어 마왕퇴한묘의 제3호묘와 제2호묘의 발굴을 시작했다. 며칠간의 노동끝에, 제2호묘에서 "리창(利蒼)", "대후지인(軑侯之印)"이라는 두 개의 도장을 발견했다. 다시 자세히 찾아보니 "장사승상(長沙丞相)"이라는 관인도 찾아냈다. 3개의 인장 중에서 "리창"이라는 도장은 옥으로 되어 있고, 정방형으로 길이와 너비가 2센티미터씩이다. 글자체는 음각 전서체이다. 이외에 2개는 귀뉴유금동인인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2.2센티미터이다. 마찬가지로 음각 전서체로 '대후지인'과 '장사승상'이라고 썼다. 발굴된 이 세개의 도장은 <<사기>>, <<한서>>의 관련기록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에 이르러, 마왕퇴 주인의 신분은 아주 명확해진다. 2호한묘의 주인은 대후 리창이고, 1호한묘의 주인은 대후 리창의 부인인 신추인 것이다. 3호묘의 주인은 대후의 아들이다. 즉, 위의 제2설이 정확했던 것이다.
신추의 신분은 명확해 졌으나, 그녀의 신세내력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유감인 것은 모든 역사자료를 뒤져보아도, "신추"라는 이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왕퇴 여자시신의 신세내력은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민간에서는 그녀에 대한 상상과 추측이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호남사람이아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남사람이라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강소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신추가 한문제의 생모라는 것은 실제로 거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오해는 바로 한문제의 며느리를 한문제의 모친으로 착각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태평환우기>>의 기록을 근거로 마왕퇴의 여자시신이 한경제의 비인 정희라고 추측했었다. <<한서. 장사왕발전>>의 기록에 따르면, 장사왕인 유발(劉發)의 모친인 당희는 원래 한경제의 비인 정희의 시녀였다. 한번은 한경제가 정희를 불렀는데, 정희가 일이 있어 회피하고 한경제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시녀인 당아가 저녁에 한경제를 모셨다. 한경제는 술에 취해서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한경제와 당희의 사이에 유발을 낳게 되니, 당희는 실제로 한문제의 며느리였다. 그런데, <<태평환우기>>에서는 장사현의 옆 10리에 쌍녀분이 있고, 쌍녀분은 바로 장사왕이 정,당 이희를 묻은 것으로 높이가 7장이라고 하였다.
마왕퇴의 한묘가 출토된 후, 어떤 사람은 '쌍녀분'이 바로 마왕퇴한묘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마왕퇴의 여자시신에 대하여 호기심에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마왕퇴의 여자시신이 바로 한경제의 비라고 생각한다. 즉, 한문제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일반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 와전되다보니 당희가 한문제의 모친으로 되었다. 전기소설과 드라마에서 마음대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민간에서는 이 여인에 대하여 더욱 큰 오해를 하게 되었다.
사실상, 고고학적인 발굴은 이미 마왕퇴한묘가 '쌍녀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왕퇴 여자시신인 신추는 자연히 한경제의 비가 아니다. 하물며 마왕퇴한묘는 '쌍녀분'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마왕퇴의 여자시신은 한문제는 한경제의 부친이므로, 한문제의 며느리가 될 뿐이다. 이로써 볼 때 근거없는 추측은 역사를 상당히 왜곡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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