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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상호오해

by 중은우시 2009. 8. 29.

글: 이건아(李建亞)

 

진한(秦漢)과 로마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의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한은 로마를 대진(大秦)이라고 불렀고, 로마는 진한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다. 그들의 눈에, 상대방은 모두 '전설상의 국가'였다. 이 두 개의 전설상의 국가를 연결한 것은 후세인들이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부르는 상인의 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실크로드를 통한 연결은 그저 간접적인 연결이었을 뿐이다.

 

1. 소통

전성시대, "나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다.

 

기원전 3세기이래, 한나라와 로마는 둘 다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발달한 고대제국이었다. 높은 산과 넓은 사막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비록 그러했찌만, 한족은 로마에 호감이 충만했고, 그들을 "대진"이라고 불렀다. <<후한서. 서역전>>에서는 그 인민은 모두 장대평정(長大平正)하여, 중국과 유사하다. 그래서 "대진"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손기는 "로마와 중국을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파트너라고 묘사했다. 이것이 분명한 증거이다"

 

기원전221년, 진시황은 육국을 통일한다. 그후, 한무젠느 강토를 적극 개척했고, 북으로 흉노를 격파하여, 천산남북을 장악한다. 동으로는 조선반도에까지 이르고, 남으로는 월남, 버마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고대로마도 가장 전성기였다. 영토가 가장 넓었을 때는 기원116년이다. 그해에 로마의 오현제(五賢帝)중의 하나인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을 정복했다. 두 제국의 전성시대에 그들간에는 단지 박트리아와 파르티아(安息國)이라는 양대제국과 일부 소국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거의 절반을 양대제국이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다. 장안성에서 출발하여, 초원, 고비사막을 지나서 교류하면서 한나라와 로마는 관계를 맺기 시작했따.

 

2. 중전(中轉)

비단길, 간접교류

 

다만, 기원전2세기중엽까지는 비단길을 거치는 동서무역이 아주 드물고 소규모였다. 중간중간 끊어지고 중간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기원전138년, 흉노와 원수지간인 대월지(大月氏)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흉노를 치기 위하여, 한무제는 장건을 서역에 사신으로 보내는 모험을 한다. 십여년후, 장건은 다시 사신으로 떠난다. 부사는 심지어 안식(이란)까지 도달한다. 이때부터, 중국과 서아시가간의 육상교통노선이 정식으로 개통된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동방과 서양의 경제, 문화교류의 막을 열었다. 은은히 들리는 낙타의 방울소리 속에서 그 막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진한과 로마의 교류는 많은 학자들이 보기에 그저 간접교류에 불과했따. 한 구간 한 구간, 한 나라 한 나라를 연결시킨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외관계사, 서역사를 연구하는 경승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동한 한화제때 반초는 감영을 대진에 사신으로 보낸 적이 있고, 도중에 조지(條支), 안식등 여러나라를 지나 페르시아만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기가 어려워 돌아왔기 때문에 로마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두 나라간에는 아직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아시아내륙을 관통하는 동서의 육상교통노선은 장안을 기점으로 하여, 하서주랑, 신강, 중앙아시아를 거쳐, 안식에 이르고, 안식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렀다. 전체길이는 7000여킬로미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할 점은 "진한시기의 교류는 비록 간접교류이기는 하지만 동로마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경승은 당시의 동로마지역은 시리아, 이라크등지라고 말한다. 중국의 비단, 철기등의 물품이 계속하여 서방국가로 수출되었고, 서방의 물산도 이 문화전파의 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 19세기하반기,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육상교통노선을 실크로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후 국내외사학자들은 이 설을 지지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3. 지선(支線)

해상무역, 아마도 존재했었던 듯.

 

육로교류이외에, 해상항선도 점점 학자들의 집중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려면 남해에서 인도양으로 가서 서북으로 홍해로 간다; 홍해와 지중해의 사이에는 좁은 수에즈해협이 가로막고 있다. 혹은 뱃머리를 돌려 서남으로 가서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으로 가서 북으로 가면 유럽이다. 이 항해라인은 아주 길다.

 

현대학자도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해상비단길"의 역사적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일남 장색, 서문, 합포에서 배로 5개월을 가면 도원국이 나온다; 다시 배를 타고 4개월을 가면 읍로몰국이 나온다; ....부감도로국에서 배로 2개월여를 가면 황지국이 나온다; 황지국은 민속이 주애(朱崖)와 유사하다....황지의 남에는 기정불국이 있다. 한나라의 사신이 여기서 돌아갔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해상항로는 대체로 남해로 인도양으로 가는 길이다. 황지국은 사학계에서 아마도 지금 인도 동남부의 Conjeeveram이라고 추정한다. 기정불국은 지금의 스리랑카로 추정한다. 중국의 해상운송화물은 인도를 거쳐 서쪽으로 운송되어 유럽까지 간다.

 

그러나, 이 해상노선이 정말 당시의 상업항로였는지는 학술계에서 지금까지 논쟁이 있다. 양홍은 조선술의 한계로, 진한시대에 해로무역이 있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고고학자가 보기에, 역사의 환원은 사서기록외에 고고실물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로무역은 우리가 출토문물을 통하여 한 구간 한구간의 노선을 고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출토문물을 보면, 진한시기의 해상비단길의 노선도는 환원시킬 수가 없다."

 

4. 오해

비단은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다.

 

로마인들은 진한을 세레스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한의 비단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세레스는 비단의 나라라는 뜻이다. 동한초기에 누란국은 이미 한나라에서 직조한 "장수명광금(長壽明光錦, 남색 바탕에 황색, 갈색, 녹색의 삼색의 실로 가로방향의 운뢰문을 나타내고, 가운데 호랑이, 용, 벽사등의 상서로운 동물을 채웠으며, 중간에 소전체로 '장수명광'이라는 길상어를 써놓았다)" 그리고 누란은 비단길의 중요한 통과지점이다.

 

로마인들은 특히 중국의 비단제품을 좋아했다. 공화국말기의 케사르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극을 보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는 중국과 서양의 교류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이때 비단은 로마에서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제국시기에 이르러, 로마성내의 두스크스지구에 이미 중국비단을 파는 시장이 나타난다. 2세기때, 비단옷을 입는 것이 유행했고, 이는 더욱 서쪽에 있는 브리튼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피차간에 직접교류가 없으므로, 반복되는 중간상인을 거쳐, 로마제국에 도달한 한나라의 비단은 신비화되었따. "로마인은 심지어 비단이 나무위에서 열리는 것으로 알았다" 경승은 그때는 로마와 직접 거래하는 서아시아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비단을 신비화하였다고 말한다.

 

사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히 파는 사람도 있다. 서방인과 인도양 연안의 상인들은, 주보(珠寶)와 유럽의 상품을 가지고 광주로 왔다. <<사기. 화식열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번우(番禺)도 큰 도시이다. 주기, 서각, 대모, 과일, 포(布)등이 많다" 당시 로마는 유리제품으로 유명했다. 진한시대의 유적지에는 로마의 유리제품이 일부 출토되고 있다.

 

광주 소북로 횡지강 1호의 서한중기묘에는 3건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따. 동위원소 X선분석에 따르면, 인산칼슘 유리계통이고, 제작방식, 원소성분으로 판단하면, 그것은 지중해 로마에서 기원전 1세기에 만든 유리제품이다.

 

세상은 평등해졌다. 사람들은 나무에서 비단을 수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중국인도 유리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비단과 유리에 새겨진 동서문명의 차이는 시종 없애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