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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한(漢)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by 중은우시 2008. 6. 5.

글: 진명원(陳明遠)

 

기원전후의 수백년간, 고대세계에는 두 개의 '초강대국'인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병존하고 있었다.

 

기원전2세기에서 기원후2세기까지는 고대세계사상의 중요시기이다. 이전 100년간 유라시아대륙에는 풍운이 일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의 제국,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인도통일, 중국 진나라의 짧은 흥성: 이 셋은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 세 제국이 해체된 후, 서로는 지중해에서 동으로는 중국동해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은 어떻게 세계질서를 새로 세울 것인지의 이슈에 직면하게 된다.

 

한나라(서한과 동한)는 기원전3세기말에 흥성하여, 기원후3세기초에 멸망한다. 중국을 약 400년간 통치한다. 거의 동시에 로마제국이 흥기하고, 점차 지중해문명지역을 장악하며, 대제국을 건설한다. 기원3세기부터 쇠퇴하여 467년에 노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한나라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 서한과 동시에 흥기한 흉노제국은 한나라를 위협했을 뿐아니라, 하서주랑의 서역각족을 위협했다. 월지는 이들의 위협하에 서쪽으로 이주하고, 이는 중앙아시아 셈족의 이주를 유발시키며, 결국 쿠샨왕조를 만든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장기적이고 험난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기원1세기말,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주하고,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부하여, 점차 농경생활로 전환한다. 북흉노는 동유럽까지 치고 들어가, 4세기말에 노르만의 대이동을 낳고, 결국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이끈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비교

 

기원1세기 내지 2세기에 세계에는 로마, 파르티아(安息), 쿠샨, 한나라의 4대제국이 존재했다. 영토, 인구, 경제, 문화의 발전수준으로 보아, 로마제국과 한나라의 실력이 가장 컸고, 서로 비슷했다. 인구는 각각 5천만명이상이었다. 다른 두 제국은 이 둘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본문에서는 기원전후 수백년간 세계에 웅거했던 한나라와 로마제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비교해보자:

로마제국은 정복으로 만들어지고, 한나라는 통일로 만들어진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행성제(行省制)를 채택했고, 한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했다

로마제국은 다민족다문화이고, 한나라는 한민족과 한문화가 절대우세를 점했다.

로마제국은 노르만등 이민족에 망했지만,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

 

로마제국의 창건은 정복으로, 한나라의 창건은 통일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전쟁과정에서 탄생한다. 다만 로마제국의 경우는 무력정복이라면, 한나라는 무력통일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로마제국의 광대한 판도는 로마공화국후기의 정복으로 확보한 영토를 기반으로 계속 확장하여 얻은 것이다. 일찌기 공화국전기에 로마는 하나의 도시국가로 성과 주위의 사람을 '공민'으로 불렀다. 그리고 패전후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라틴인과 이탈리아인들이 동맹자였다. 기원전227년에 시칠리아에 행성을 건립할 때 시칠리아인들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공화국말기, 라틴인과 이탈리아인은 모두 로마공민권을 취득한다. 행성의 수도 대폭 증가한다. 로마제국이 정식 형성된 후에도, 공화국시기의 전통을 이어간다. 로마는 정복자이고, 법률상 로마공민이 국가권력의 ?이다. 행성의 신민은 피정복자이고, 행성은 '로마공민의 재산'이다. 행성의 도시는 왕왕 서로 다른 대우를 받았는데, 통상적으로 지방자치권을 누렸다. 행성 도시주민의 지위는 거의 동맹자에 상당하였다. 신민과 공민의 중간상태였다. 기원 1세기 내지 2세기에 로마공민권은 점차 행성의 더 많은 주민들에게 부여된다. 기원 3세기초, 로마제국의 경내의 모든 자유민은 공민권을 취득한다. 다만 이때 로마제국은 이미 군벌통치하에 있었고, 공민권은 이미 의미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공민은 군에 입대하는 의무가 있었음).

 

한나라는 진나라의 계승자이다. 진시황이 6국을 멸망시킨 후, 진나라백성은 다른 6국의 백성들보다 높은 신분적인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진나라의 백성은 모두 '검수(黔首)'라고 불렀는데,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구분이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원래 초(楚)나라 사람이고, 반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가서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관중의 지지를 받아 동방의 항우를 패퇴시키고, 마침내 관중의 장안에서 건국한다. 유방은 초나라사람들을 '정복자'로 삼고, 진나라사람을 '피정복자'로 삼을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한나라의 경내에, 왕후귀족과 노예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편호제민(編戶齊民)'하였다. '편호'는 호적을 만들어 편입시키는 것이고, '제민'은 백성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뜻이다. 편호제민은 로마공민처럼 참정특권을 갖지도 못했고, 로마행성신민들처럼 정치권리가 배제되지도 않았다. 한나라의 백성은 서로 다른 '작위(爵位)'를 받았다. 작위가 낮은 자는 민(民)이고 작위가 높으면 관리가 되었다. 절대다수의 작위가 있는 '제민'은 그저 '민'이었다. 그러나, 원칙상 작위는 단계가 있었고, '제민'에게도 개방도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건립으로 각지의 편호제민은 통일된 것이고 정복당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개척형이고 대외통상을 중시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화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기초위에서 계속하여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지중해서부 카르타고등의 지역). 한나라도 진나라의 영토기반위에서 계속 외부로 확장했다(특히 서역지역)

 

고대에 동서간에는 중요한 상업도로가 있었다. 즉 '비단길(silk road)'이다. 이는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교통명맥이었다. 기원전2세기이전에는 파미르고원의 서쪽은 길이 열렸으나, 파미르고원의 동쪽인 중국경내는 아직 개척되지 않았었다. 기원전 138년,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장건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중간에 흉노에 붙잡혔다 기원전 126년에 비로소 귀환한다. 기원전 121년, 119년에 곽거병, 위청은 한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흉노를 대파하고,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확보하며, 흉노를 멀리 막북으로 쫓아보낸다. 이때 장건은 다시 명을 받아 오손국(오늘날 Balkash호수 동남쪽의 이리강 유역)에 사신으로 떠난다. 사마천의 <<사기>>는 장건의 두 차례에 걸친 사신행을 "착공(鑿空, 구멍뚫기)"라고 표현했다. 이는 바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의 동쪽부분은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두 갈래로 나뉜다. "옥문, 양관(돈황서쪽)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길이 두 갈래이다. 선선(오늘날 신강 약강일대) 방남산(오늘날 아르긴산, 곤륜산), 북파(순착)강(두 산의 북쪽의 여러 강이라는 뜻임)으로 서쪽으로 가서, 사차(지금의 신강 사차)로 가는 남쪽길: 남쪽길은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즉 대월지, 파르티아로 간다. 차사의 앞에서 왕정(지금의 신강 투루판서쪽), 수북산(지금의 천산), 파하(지금의 타림강)으로 서쪽으로 가면, 수륵(지금의 신강 카슈카르시)에 이르는 북로가 된다: 북로는 서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지금의 Farghana), 강거(지금의 Balkash호수와 아랄해의 사이), 엄채(지금의 아랄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쯤) 언기로 나간다. 이 두 갈래의 길은 모두 천산이남이다. 북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북으로 타림강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고, 남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으로 아르긴산, 곤륜산의 북록의 강물을 따라 서행하는 것이다. 장건이 처음 사신으로 갈 때는 흉노로부터 벗어나 대완, 강거, 대월지를 지나 대하(大夏)에 이르렀다. 그가 갔던 길은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북로이다. 돌아올 때는 '병남산'으로 왔다고 되어 있으니, <<한서. 지리지>>에서 말하는 남로임에 틀림없다. 두 길은 모두 장건이 연 것이다. 사실 이 두 길 외에 천산이북에도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장건이 두번째 사신으로 나갈 때에는 내지에서 직접 오손으로 갔고, 오손에서 각각 부사를 나누어 대완, 강거, 월지, 대하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다시 천산이북의 길을 하나 더 뚫었다. 다만, <<한서. 지리지>>에는 이 천산북로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동한시대에 반초가 서역을 경영했는데, 일찌기 기원97년에 감영을 대진(로마제국)에 보낸다. 감영은 파르티아서쪽까지 이르고, 강을 건너고자 하나(비잔틴을 향하여), 안식의 서쪽에 있는 뱃사람들에게 저지당하여 실현되지 못한다. 이는 한나라의 사신이 '비단길'을 따라 가장 서쪽까지 간 기록이다.

 

'비단길'이 개통된 후, 한나라의 비단은 대량으로 서방에 팔린다. 로마제국에서는 귀족들과 부호들이 옷과 장막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외에 중국의 철기, 칠기등도 서방에 수출된다. 로마제국의 유리제품, 모직품, 인도의 보석, 향료등도 '비단길'을 통하여 한나라에 수입된다. 이외에 불교도 이 길을 따라 한나라때 중국에 유입된다. 동시에 유입된 것은 간다라미술이다.

 

육로이외에 <<한서. 지리지>>의 끝부분에는 한나라가 서방과 통한 '해상비단길'을 소개하고 있다. 이 해로는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육상 '비단길'이 막혔을 때는 그렇다. 예를 들어, 인도(천축)는 한화제때 여러차례에 걸쳐 사신을 육로로 중국에 보내는데, 동한후기에는 서역길이 끊긴다. 기원 159년, 161년에 인도사절은 해로로 바꾸어 중국으로 온다. 기원166년, 동로마제국의 사절이 동한제국을 방문한다. 역시 해상 '비단길'로 왔다.

 

한나라가 파견한 장건, 반초가 서역으로 가고, 동로마제국의 사신이 중국을 왔다. 중국과 서양은 육로와 해로의 두 '비단길'을 열었던 것이다. 중화문명과 서방문명이 교류를 시작하였으니 시대를 긋는 의미가 있다. 아쉽게도,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모두 멸망한 이후, 중서방의 교통은 장기간 막히게 된다.

 

한나라의 군현제, 로마제국의 행성제

 

한나라와 로마제국은 모두 광활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으므로, 행정구역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로마는 행성제를 실시했고, 한나라는 군현제를 실시했다. 둘은 모두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어서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점에서는 양자간에 뚜렷한 차이도 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군현제를 계승하여, 중앙이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일련의 행정시스템을 갖춘다. 군에는 군수(郡守, 나중에는 太守라 함)와 군의 관리 약간명을 두었다. 군의 아래에는 현(縣)을 두고, 큰 현에는 현령(縣令), 작은 현에는 현장(縣長)을 두었고, 각각의 현에도 관리를 약간명 두었다. 관리는 모두 국가가 임명한다. 그리고 제도에 따라 국고에서 봉급을 받는다(오수전과 양식). 현이하의 향(鄕)은 향의 삼로(三老)가 다스리는데, '삼로'는 지방관리가 현지백성중에서 선발한다. 명을 받아 현을 관리하고,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는다. 한나라때의 중국에는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는 없었다. 한무제이후, 제후왕국도 이름뿐이었다. 그저 서역과 같은 변방지역에서만 군현제가 시행되지 않았을 뿐이다.

 

로마제국에서는, 각 행성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받는 대우도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에 설치된 행성은 로마에서 총독을 한 명 파견하여 그 곳의 로마군대를 통솔했고, 그곳의 최고재판권을 장악했다. 이외에 2명의 재무관을 파견해서 재정세수를 담당했다. 총독과 재무관은 모두 매년 임명되고, 그들의 아래에는 일련의 관료조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현지의 일은, 여전히 로마총독에 종속하는 각각의 소국이 스스로 관리했다. 행성의 로마제국에 대한 최대의 의무는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시칠리아는 거둔 금액의 1/10이었다. 또한 이집트는 황제의 개인재산으로 되어,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총독과 재무관등 고급관리는 로마인이 맡았지만 사람수는 적었다. 그들은 그리스출신의 관리와 세금징수인을 두어 보조하게 하였다. 이집트인들의 원래 기구는 그대로 존속시켰다. 기원 1세기 내지 2세기때, 적지 않은 행성은 모두 자치 혹은 반자치의 도시를 둔다. 각각 크고 작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로마의 행성체계에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지방자치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이렇게 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보면, 로마제국은 한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마제국의 다민족다문화, 한나라의 한민족한문화 절대우세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모두 다민족국가이다. 각각 1 민족이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지위에 있었다. 이것은 양자간에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을 보면, 양대국은 민족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로마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로마족은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인은 언어, 경제와 문화적으로 로마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공동으로 천하를 정복한 핵심역량이다. 그리스인은 로마문화의 선구자이다.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신민을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로마민족은 제국통치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한다. 그러나, 열세에 처한 부분도 있었다. 먼저, 그들은 로마제국에서의 인구비율이 소수였다. 한 추측에 의하면, 전체로마제국의 인구는 약 5400만이며, 그중 로마족은 600만이라는 것이다. 겨우 1/9을 점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에서, 유구한 문화전통을 지닌 동부각족이 있고, 걸출한 문화공헌을 한 그리스족이 있다. 로마족 자체는 법학에서 공헌을 한 것을 제외하면, 문화적인 면에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하물며, 제국의 '로마화' 정도도 그다지 심화되지 못했다.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를 통용했으니, 그리스화한 지역이다. 서부는 라틴어를 통용했으니, 로마화지역이다. 또한 동부, 서부를 불문하고,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는 정부와 도시에서나 통용되었고, 농촌에서는 여전히 각지의 현지언어를 사용했다.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못했으며, 결국 서(라틴어지역)와 동(그리스어지역)의 큰 두 조각 및 그외 일부 작은 조각들로 갈라진다.

 

한나라는 한족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족은 선진시기의 화하족(華夏族)과 이적(夷狄)각족이 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중원지구는 화족과 이족이 섞여서 하는 현상이 보편적이었고, 춘추시대까지는 화족과 이족간의 풍속이 서로 달랐고, 언어도 서로 통하지 않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화족과 이족의 구별이 중원지구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예를 들어, 중산국(中山國)은 원래 이족의 하나인 선우인(鮮虞人)이 건립한 ㄳ인데, 하북 평산에서 발견된 전국시대 중산왕묘의 명문을 보면, 그들은 화하족과 이미 차이가 없게 되었다. 화이의 교류와 융합으로 형성된 민족공동체가 한나라에 이르러 합쳐서 "한인(漢人)"으로 불리게 된다. 한나라에서 한족은 총인구의 대다수를 점유한다. <<한서. 지리지>>에 다르면 기원2년(평제 원시2년)의 전국인구총수는 59,594,978명이고, 여기에는 각군,국의 인구수가 나와 있다. 중원한족거주인 각군의 인구총합계는 한족과 소수민족이 혼거하는 변방지역의 인구총수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서한초기에 일찌기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를 보더라도 그들의 총인구는 한나라의 군(郡) 하나만도 못했다고 하고 있다. 나중에 남흉노가 한나라에 귀부하여 한나라의 중요한 소수민족의 하나로 되었는데, 총인구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적었다. 한족인구는 한나라의 절대다수를 점했고, 이러한 점에서 로마제국과는 차이가 있다.

 

한족은 인구적으로 국가의 주체일 뿐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국가의 주류였다. 선진의 찬란한 문화와 한나라의 문화는 일맥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한무제는 유가학설을 정통으로 확립하고, 사상 통일로 국가를 통일시켰다. 이는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이 하지 못한 일이다.

 

서로마제국은 노르만족에 멸망당하나, 한나라는 흉노를 제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