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위금계(衛金桂)
2000년은 유명한 애국장군 섭사성(聶士成)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민족영웅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진시정부는 원래의 섭공비(聶公碑)가 있던 자리에 높이 4.18미터의 섭사성동상을 세워주었다. 섭사성을 이야기할 때면, 중국의 교과서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의화단(義和團)과 협력하여 팔국연합군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영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의화단이 죽였던 것이다.
섭사성은 안휘(安徽) 사람이다. 군대에 들어간 후에는 염군(捻軍,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1884년에는 프랑스군이 대만을 침입하자, 섭사성은 명을 받고 부대를 이끌고 바다들 건너 대만으로 지원을 갔다. 거기서 여러번 프랑스군과 싸워서 승리했다; 청일전쟁(갑오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북양대신 이홍장이 섭사성에게 부대를 이끌고 제독 섭지초(葉志超)를 따라 조선으로 가도록 한다. 섭사성의 부대는 완강하게 싸우고, 용맹하게 적을 죽였다. 그 전공으로 그는 직예제독이 된다(원래의 직예제독 섭지초는 목숨이 아까워 도망치다가 청나라 조정에서 참수해버렸다)
1900년 4월, 의화단이 보정(保定)에서 철로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직예총독 유록(裕祿)은 부장(副將) 양복(楊福)으로 하여금 저지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양복은 의화단에 의해 죽는다. 서태후가 의화단으로 하여금 팔국연합군과 싸우도록 결정하였기 때문에, 당시 의화단에 대하여는 정부에서 비호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의화단은 계속하여 황촌철로(黃村鐵路)를 파괴했다. 섭사성은 작은 분대를 이끌고 가서 제지했다. 그러나 의화단은 오히려 그의 부대를 습격해서,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홍장은 섭사성을 보내어 이를 협상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섭사성의 부대가 낙벌(落垡)에 이르렀을 때, 의화단의 3천여명은 낭방철로를 파괴하고 있었다. 섭사성이 여러번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의화단은 오히려 섭사성의 부대에 공격을 가한다. 섭사성은 어쩔 수 없이 항거하게 된다. 이리하여 의화단은 섭사성을 원수로 대한다. 조정에서 의화단을 기용하자고 주장한 대신들은 섭사성을 엄벌에 처하자고 주장한다. 유록은 마침내 섭사성에게 경성을 떠나 다른 곳을 지키게 한다. 이때 의화단은 북경주변에 벌써 이만여명으로 늘어났고, 섭사성의 무위군(武威軍)을 보기만 하면 즉시 붙잡아서 죽였다. 섭사성 본인도 어쩔 수 없이 독부(督府)로 몸을 피해야 했다.
당시 대신인 재의(載漪), 강의(剛毅)등은 섭사성을 질시했다. 그리하여 의화단을 이용하여 그를 죽여버리기로 결정한다. 유록은 압력에 밀려, 태도를 바꾼다. 그리하여 섭사성에게 의화단에 양보하라고 한다. 그리고 의화단의 폭력에 항거하지 말도록 한다. 그리하여 의화단이 철로를 파괴하는 것을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러나, 섭사성은 이를 거절한다. 그 동안 섭사성은 군대를 이끌고 팔국연합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유록은 그의 공로를 모두 의화단의 공로로 보고했고, 의화단에 많은 하사품과 돈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섭사성의 부대는 전투의지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섭사성에게 부대를 이끌고 천진조계로 떠나게 한다.
이같이 궤이하고 험악한 현실 앞에서, 섭사성은 용감하게 적과 싸운다. 당시 교전에 참가했던 외국인은 "중국과 싸운 이래로 섭사성의 군대만큼 용맹한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의화단은 서태후의 지지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사방에 헛소문을 퍼트렸다. 섭사성은 서양인과 내통하는 이모자(二毛子)라고. 조정에서도 섭사성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그는 아래 위에서 압력ㅇ르 받았다. 매번 전투에 나설때마다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하루는 섭사성이 팔국연합군과 한참 싸우고 있는데, 의화단에서 그의 모친과 딸을 끌고 갔다. 섭사성을 사람을 이끌고 추격했다. 의화단은 섭사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소리쳤다. 섭사성의 군대내에 있던 의화단의 내응(內應)이 뒤에서 총을 쏘았다. 섭사성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총알 수십개를 맞았다. 창자가 몸밖으로 수촌을 흘러나와 결국 죽고 만다. 의화단은 시신을 빼앗아가서 나누고자 했으니, 팔국연합군이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의화단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하여, 시신이 난도질당하는 것은 면하게 된다. 섭사성이 죽고 3일만에 천진이 함락된다. 청나라조정은 섭사성의 죄는 물어야 하지만, 이전의 공로가 있으니, 용서한다고 하였다.
섭사성이 죽은지 100년이 흘렀다. 천진에는 애국주의교육기지가 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중국에 침입한 후, 섭사성은 부대를 이끌고 천진을 지켰다. 7월 5일, 섭사성의 군대와 의화단이 합심하여 자죽림 조계를 공격하여, 적과 8일밤낮동안 격전을 펼쳤다. 7,8일에 미국 프랑스등의 지원군이 조계내로 들어왔다. 9일 새벽, 팔국연합군 6000명은 팔리대를 지키고 있넌 섭사상의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력차이가 커서, 섭사성의 군대는 팔국연합군의 포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섭사성은 침착하게 지휘했고, 연합군과 2시간여의 격전을 벌였다. 나중에 탄약이 떨어져서 섭사성부대는 포위망을 뚫고 팔리대부근으로 간다. 이때 섭사성은 양다리에 모두 부상을 입었다. 영병 송점표가 그에게 퇴각하자고 권했지만, 섭사성은 칼을 빼어들고 말 위에 타서 다리 앞에 버티고 전투를 독려했다. 그리고 좌우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이다. 이곳을 한 걸음이라도 벗어난다는 사나이가 아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포탄 하나가 주위에서 폭발했따. 섭사성의 배는 포탄조각에 명중된다. 창자가 체외로 수촌 흘러나왔다. 섭사성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이때 다시 총알이 머리, 가슴을 꿰뚫었다. 섭사성의 군대가 흘린 피가 가득하고 시신이 곳곳에 널렸다. 장렬히 순국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중국영웅의 전형적인 죽는 방식이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침략자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가 내국인들간의 내분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면, 특히 그가 자신의 모친과 딸을 쫓아가다가 중상을 입었다면 민족영웅이나 애국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서도 꾹 참고 지내다가, 죽고나서도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진짜 흉수가 누구인지 찾아내지도 못했다. 이렇게 억울한 영웅이 바로 중국특색이 아닐까?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연영(李蓮英)의 거액재산은 어디로 갔는가? (0) | 2009.10.17 |
---|---|
경친왕(慶親王) 부자: 청나라말기 귀족의 진면목 (0) | 2009.10.15 |
도광제(道光帝)의 모릉(慕陵): 역사상 가장 가식적인 황제묘 (0) | 2009.08.08 |
의화단의 우두머리는 사기꾼인가? (0) | 2009.07.24 |
가난한 관료 좌종당(左宗棠)과 부유한 상인 호설암(胡雪巖) (0) | 200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