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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도광제(道光帝)의 모릉(慕陵): 역사상 가장 가식적인 황제묘

by 중은우시 2009. 8. 8.

글: 문재봉(文裁縫)

 

도광제의 일생은 비극적인 색채가 충만하다. 그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왕조가 쇠락하는 전환점에 서 있었다. 이때의 청나라는 문제가 산적하여 있었고,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각종 문제가 연이어 터져나왔고, 한 가지 문제가 터지면 온몸이 흔들렸다. 각종 조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 힘들었다. 청왕조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개인적인 능력으로 만회할 수는 없었다. 서방열강으로부터의 도전은 도광제의 치세에 설상가상이었다. 이런 시기에 처해있던 황제가 자신의 능묘문제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도광제는 일생동안 근검하고 사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유명했다. 단지 한가지 일은 그의 근검절약했던 인생을 절묘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후에 머물 장소 즉 모릉에 쏟아부은 엄청난 경비이다. 왜 도광제는 조상의 유훈을 위배하면서까지 이미 완공한 청동릉(淸東陵) 경내의 능묘를 폐기하고, 청서릉 경내에 새로운 능묘를 건설하게 했을까?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장인들이 능묘를 건설하면서, 그곳의 지하수맥이 비교적 얕아서, 지궁에 물이 새어나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하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새로 부지를 선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능묘건설을 책임진 대신 영화(英和)는 일단 그렇게 되면 앞에 투자한 거액의 자금이 물거품이 될 뿐아니라, 풍수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황실의 금기사항이었다. 도광제는 분명히 죄를 물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다. 아마도 형사책임까지 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밀어부치기로 한다.

 

영화는 장인들에게 방수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하고, 가급적 황제의 검수시 속여넘기고자 한다. 능묘가 준공된 후, 도광제가 친히 현장을 다녀갔다. 그러나 도광제는 공사검수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했다.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능묘의 기세가 웅혼한 것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하여 능을 건설하는데 관련된 대신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 그리고 효목황후 뉴호로(钮祜禄)씨의 관을 묻는 일을 주재했다.

 

도광8년 초여름, 도광제는 북경을 벗어나서 새외로 가서 사냥을 했다. 하룻밤에 돌연 꿈 속에서 이미 사망한 효목황후가 넓은 바다가운데에서 그에게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도광제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난 후 하루종일 앉아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잠이 들자마자 다시 황후의 구해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상태에서, 어렴풋이 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황후의 뒷모습이 아련거렸다. 게속 세 번이나 같은 악몽을 꾸는 바람에 도광제는 놀라서 전혀 잠을 들지 못했다. 그는 아예 옷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와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괴이한 꿈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동릉의 늠묘에 물이 차고 이미 묻힌 황후가 물에 잠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도광제는 어지를 내려, 대신을 보내어 준화 마란욕으로 가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궁을 열어보게 한다. 신하가 도착헤서 지궁을 열자, 과연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황상이 이 일로 화를 내고 상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급히 방법을 강구해서 물을 지궁에서 퍼냈다. 그러나, 지궁의 아래와 사방의 벽에서는 물이 여전히 새어나왔고 그치지를 않았다. 시찰하러 온 신하는 크게 놀랐고, 감히 더 이상 감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바로 황상에 보고했다.

 

도광제는 그 소식을 듣고는, 금방 마란욕으로 친히 가서 시찰했다. 그가 능묘의 지궁에 도착했을 때, 신발바닥이 젖는 것은 느낄 수 있었고, 벽에서는 물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도광제는 이를 보고는 크게 놀라면서, 분개했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영험했다고 느꼈다. 아마도 황후의 영혼이 확실히 이승과 저승을 헤매고 있는 것같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것일 것이다. 분개한 것은 지궁을 닫은지 멸 달만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처럼 불길한 일이 벌어지는데, 자신이 죽고나서 수십년, 수백년후에는 도대체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였다. 그때는 지궁이 이미 호수바닥에 되어 있지 않았겠는가? 자신은 바다 혹은 호수의 바닥에 누워있는 꼴이 될 것이다. 유골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갈 곳이 없지 않겠는가? 만일 황후의 사후에 영혼이 있어서 먼저 자신의 꿈에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자신이 죽은 후에 자손들이 이렇게 탁수가 흘러나오는 지궁을 본다면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될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도광제는 화가 하늘을 찔렀다. 즉시 북경의 대신들과 형부의 당상관들로 하여금 능의 부지를 선정하고 공사를 담당한 대신인 장친왕 면과, 대학사 대균원등 주요인원 및 지궁침수원인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하도록 시킨다. 명이 떨어지자, 수개월전에 상을 받고 관직이 올랐던 신하들은 기쁨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모조리 형부로 붙잡혀와서, 죄를 문책당하게 되었다.

 

도광제는 동릉에서 부지를 선정하는데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신의 능묘를 서릉에 건설한 것인가? 아마도 이것은 그저 그의 핑계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관련인원중 아무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능묘는 산을 따라 지어졌고, 지궁은 지하에 깊이 있다. 지궁에 습기가 있고, 물방울이 있고, 물이 새어나오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 예전에 막 완공한 지궁에서 물이 새어나온 적이 있지만, 개보수를 거쳐서 수십년간 물이 새어나오지 않은 사례도 있다. 보화욕 지궁은 유릉(裕陵)의 선례에 따라, 지궁을 보수공사할 수도 있었다. 한걸음 물러나서 말하더라도, 지궁을 새로 건설할 수도 있었고, 동릉 경계내에서 또 다른 부지를 고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수백리 떨어진 서릉에 새로 능묘를 짓는 것보다는 훨씬 절약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조상때부터 내려온 유훈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당시에 일부 견식있는 대신들은 현지의 지궁을 수리하거나 동릉의 또 다른 장소에 부지를 찾자고 건의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서열하도통 송균은 "효릉의 오른쪽, 유릉의 동북일대에서 풍수에 능한 자로 하여금 상세히 알아보게 하자"고 주장했다. 도광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짐에게 생각이 있다. 천천히 하겠다"

 

도광제가 능묘를 동릉에서 옮겨간 후에 청동릉 경내에는 2개의 황제릉, 2개의 황후릉과 2개의 비빈묘원이 더 들어선다. 동릉에 이처럼 많은 풍수길지가 있었는데, 왜 도광제는 동릉에 능묘를 건설하지 않았던 것일까? 도광제는 "소목상건(昭穆相建)"의 조상유훈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자신은 동릉에 묘자리를 골라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서릉으로 옮겨서 새로 짓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법도를 잘 준수하는' 모범황제로 하여금 이같이 조상의 유훈과 가법을 어길 용기를 냈을까? 도광제는 그 자신의 시 두 수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황고인종예황제, 황비효숙예황후가 창릉에 봉안되어 있다. 산천에 왕기가 있고, 상서롭다. 용천욕은 창릉의 서쪽에 있고, 서로 8리가 떨어져 있고, 오색구름이 바라보니, 일맥상승한다. 아들로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 숙원에 부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용천욕은 창릉에 가까우니, 부모의 슬하에서 오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의 '부친을 따라 묻히고 싶다'는 숙원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도광제가 청동릉의 능묘를 버리고, 청서릉에 새로 능묘를 마련한 진짜 원인이다. 효도는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은 댓가가 너무 크다. 황제릉을 만드는데, 도광제는 국가에 거대한 낭비를 조성했다. 백성들에게는 크나큰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여겼고, 정리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그의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위중로의개복, 용천상시대어오(毋謂重勞宜改卜, 龍泉想是待於吾)" 그 뜻은 그의 능묘를 동릉에서 서릉으로 옮긴 것이 백성을 힘들게 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용천욕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도광제가 평소에 반복하여 나타냈던 '각준성헌(恪遵成憲)', '절검(節儉)', "애석민력(愛惜民力)"이 그의 내심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된다.

 

도광제는 최종적으로 청서릉에 부지를 정한다. 도광제는 자신의 뜻을 이룬 것이다. 도광11년 십일월 초팔일 유시, 용천욕의 능묘는 공부상서 목창아, 호부좌시랑 경정, 예부좌시랑 보흥, 공부우시랑 아이방아가 친히 보는 가운데, 착공된다. 착공전에 도광제는 이렇게 말한다: "일체의 규모는 반드시 검약하고, 번잡하게 하지 말라. 이 땅을 가진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한번은 친히 용천욕 만년길지의 공사에 대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내려보낸다. 그의 어지에는 "보성의 계획을 바꾸어, 방성, 명루, 천당제권, 유리화문, 석상생은 모두 두지 말라. 대전은 3칸짜리 단일처마로 해라. 용로는 대홍문까지 연결될 필요가 없다. 지궁의 보정, 월대, 단계 및 건석패루 1개는 의논한대로 처리하라. 궁문앞에 하나의 삼공교를 건설하라" 확실히, 완공후의 모릉은 청나라의 다른 제왕릉의 건축구조와는 다르다. 대비루, 석상생, 화표, 이주문, 삼좌문, 방성, 명루등의 건축이 생략되었고, 약간의 건물도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융은전은 이중처마 5간에서 성경복릉, 소릉의 단층처마 3간의 회랑식으로 바뀌었다. 대전과 월대는 사방의 석난간을 철거했다. 동서 배전은 5간에서 3간으로 줄였다. 융은문앞의 신도교는 삼로삼공교에서 단로삼공교로 바꾸었다.

 

이 도광제는 확실히 그의 능묘에서까지 근검절약하는 이미지를 유지한 것같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생각해보라 보화욕에서 그런 문제가 터졌었는데, 어느 대신이 감히 새로운 능묘에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용천욕의 모릉공사에는 비록 여러 건축물을 생략했지만, 조사해보면, 모두 백은240여만냥이 소모되었다. 건축이 훨씬 거대하고 공예가 정교했던 건륭제의 유릉보다오 37만여냥을 더 소모했다. 그리고 사치의 극을 이루고 호화무비하게 지은 서태후의 정동릉에 227만냥을 소모했으므로, 역시 13만냥을 더 소모했다. 그렇다면, 모릉에 이렇게 많은 돈을 들인 것은 도대체 다른 황제릉과 비교하여 어디가 그렇게 호화스러웠던 것일까?

 

첫째, 능묘주위의 성벽을 쌓는 방식이 달랐다. 일반적인 능묘의 둘레를 쌓은 벽은 아랫쪽은 벽돌을 갈아서 틈을 맞추고, 틈사이를 메우는 방식을 쓰고, 윗쪽은 그냥 벽돌을 쌓고 바깥에 붉은 회를 바른다. 벽돌을 갈아서 틈을 맞추고 틈사이를 메우는 방식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공법이 아주 복잡하다. 그런데, 모릉은 아래부터 꼭대기까지 모두 이 방식으로 벽을 쌓았다. 그리고 담장의 위에는 황색 유리기와를 덮었다. 

 

둘째, 모릉은 세개의 문을 줄였지만 그것은 공법이 간단한 벽돌, 기와 목석구조를 완전히 거석으로 만든 3칸 4개기둥, 3개루의 패방 1개로 3개의 문을 대체한 것인데, 패방의 신수, 두공, 연비, 염방등은 모두 나무로 만들지 않고, 모조리 청백석을 원료로 정교하게 조각하여 만들었다. 이 공법은 정교해야 하고, 조각의 난이도가 높은 공사이다. 그 비용은 나무로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셋째, 동서배전과 융은전의 나무는 모조리 비싼 금사남목(金絲楠木)이다. 금사남목은 남방의 복건, 광동, 강소, 절강, 사천, 귀주등지에서 나는 것인데, 역대제왕은 남목건축을 모두 좋아했다. 남목에는 벌레먹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을 뿐아니라, 맑은 향을 내어 사람의 폐부를 시원하게 해준다. 그러나 여러해동안 베어서 쓰는 바람에, 명청시기에 남목은 이미 아주 진귀하고 희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옹정제의 태릉의 융은전은 문, 창, 대들보, 기둥만 금사남목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나무로 대체했다. 심지어 융은전내의 8개의 기둥도 남목의 두께가 불충분하여 바깥을 다른 것으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두께를 맞추었다. 그 원인은 바로 명십삼릉의 대전에서 쓰던 두꺼운 남목은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모릉이전의 청효릉, 경릉, 태릉, 유릉, 창릉 및 각 황후의 늠요에서도 어느 한곳도 삼전의 나무를 모조리 금사남목으로 쓴 곳이 없다. 그러나, 묘릉은 기둥, 양방등 모조리 남목 통나무로 만들었으니,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융은전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다는 것이다. 모릉 융은전은 단층처마이다. 바깥에는 십수개의 목영으로 순회주랑을 만들었다. 특히 대전내의 천정은 채색그림이 아니고, 남목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남목건축물 중에서 조각형식으로 천정을 처리한 것은 승덕피서산장의 담박경성전외에 모릉 융은전이 유일하다. 담박경성전의 천정은 735조각이고, 매 조각의 도안은 간단한 오복방수의 부조이다. 그러나, 모릉 융은전의 천정은 약 900조각이며, 모조리 금사남목을 써서 고부조와 투부조를 결합한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문양이다. 평면에서 60여센티미터 튀어나와 있고, 머리를 들고 올려다본다. 용머리가 만나는데, 입을 벌인 곳에서는 구름이 뿜어져 나오는 것같다. 여기에 남목이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맑은 향기까지 겹쳐서 사람들은 용의 입에서 향이 뿜어져 나오는 광경에 처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융은전의 문, 창, 기둥, 대들보등에도 모조리 운룡 혹은 반룡을 각양각색으로 조각했다. 마치 용들이 바다위에서 파도위를 날아가는 것같다. 융은전에는 남목에 용을 조각한 것이 714개이다. 삼전을 합하면 용을 조각한 것이 이천여개에 이른다. 만일 용 한 마리를 조각하는데, 정교한 장인들이 반달을 조각했다고 치더라도, 3만여시간이 들었다. 이는 백은 3만냥가량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렇게 용을 많이 조각하게 된 것이, 당시 보화욕 능묘의 지궁에 침수현상이 나타난 이유가 여러 용들이 구멍을 파고, 용의 입으로 물을 뿜어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다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광제는 장인들에게 삼대전내외에 수천의 용을 조각하게 시켰다. 특히 천정등의 높은 곳에는 더욱 정교하게 하도록 했다. 그 뜻은 용들이 높은 곳에서 하늘의 물을 놓고 싸우지, 더이상 지궁으로 물을 뿜지 말라는 것이다. 이 네가지 다른 점만 보더라도, 도광제가 요구한 '근검'한 황제릉의 신면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청나라의 능묘제도는 황제릉의 능명은 모두 묘주인이 죽은 후, 후임황제가 확정하다. 그러나, 도광제의 모릉은 도광황제가 스스로 붙인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가.

 

전해지는 바로는 도광제가 동릉 보화욕의 능묘를 철거하고 서릉 용천욕에 새로 지은 후, 다시한번 지궁이 침수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높은 지대를 선정했을 뿐아니라, 자주 능이 건설되는 곳을 순시했다. 도광15년, 용천용의 부지가 준공되기 직전에, 도광제는 다시 한번 서릉으로 왔다. 그후, 효목, 효신의 두 황후의 관을 용천욕의 대전 안으로 옮겼다. 능묘가 완공되면 지궁에 봉안할 계획이었다. 그때, 도광제는 친히 제사를 주재하면서 감개무량하여 눈물을 흘렸다. 대전 월대에 서서 붓을 들고 동북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붓을 휘둘러 "기모여모야(其募與募也)"라는 글을 쓴다. 붓을 내려놓고, 도광제는 18살된 넷째 혁녕과 여섯째 혁흔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 둘에게 읽게 시킨다. 읽기를 마치자, 사람들에게 그가 쓴 글을 융은전의 동난각내에 보관토록 시킨다. 이일이 있은 후 2년도 되지 않아, 도광제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조에 따라 즉위한 함풍제 혁녕은 도광제의 유조를 다시 한번 읽어본 후, 특히 그 중에 "기모여모야"라는 문구를 본다. 예전의 광경이 생각나서 돌연 깨닫는 바가 있다. 원래 황부는 장래 "모"자를 능의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암시한 것이었다. 도광30년(1850년) 이월 초구일, 함풍제는 명을 내려 용천욕 능묘를 "모릉"이라고 정식 명명한다. 다행히 함풍제는 이년전에 능침대전내에 보관해두었던 그 붉은 글자의 유지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 함풍제는 총명했고, 즉시에 도광제의 고심한 바를 알아냈다. 만일 함풍제가 그 유지를 잊었더라면, 혹은 아직 잊지 않았더라도 부친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더라면, 아니면 나중에 알아차렸지만, 능의 이름을 이미 지은 후라면, 도광제가 자신의 능묘의 이름을 암시해준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그러면 구천지하에서 도광제는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을 것이다.

 

도광제는 왜 "모"자를 선택해서 능묘의 이름으로 한 것일까? 후세인들은 이렇게 추측한다. 도광제가 이 유지를 쓸 때는 대청제국이 급전직하하는 국면이었다. 국내의 반란이 속속 일어날 뿐아니라, 서방의 열강도 호시탐탐 중국을 노렸다. 이는 국면을 되돌릴 능력이 없는 도광제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조 누르하치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세상을 풍미하며 청나라를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나, 강희, 옹정, 건륭의 전성기에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은 평화로왔다 모두 도광제로서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시대였다. 바로 부친 가경제가 재위한 25년간도 역시 수성의 군주로서 직책을 다했고, 대청강산의 쇠퇴를 막아왔다. 그러나, 도광제는 이때 이미 황제위에 오른지 15년이 되었지만, 대청왕조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위기일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보니, 도광제로서는 조상들의 공덕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광제의 씁쓸한 심정을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