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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는 네번이나 후계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

by 중은우시 2009. 1. 5.

글: 노구불로(老九不老)

 

문혁동안, 모택동은 "포타사령부(砲打司令部,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엄격히 말하면 '소자보'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벽에 붙여지지 않았다)를 써서 일찌감치 공인되었던 후계자인 국가주석 유소기를 끌어내렸다. 그후, 모택동은 일관되게 자신을 따른 임표(林彪)를 후계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 하늘에서 굴러떨어진 좋은 소식을 대하고도, 임표는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꿈에도 그리던 "떡"을 허리를 굽혀 주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임표는 1966년 8월 1일 소집개최된 제8기 11중전회를 전후하여, 4번이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사양했다. 그중 두번은 서면으로 보고서를 냈다. 모택동은 임표의 두번째 사양보고를 받고 거기에 이렇게 회신했다: "오래 동안 생각해봤다. 오직 임표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다. 위탁을 받아달라."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임표는 모택동의 회신을 받고는 아주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종이를 찢어버린 후에 가래침받이통에 던져버렸다. 섭군(葉群, 임표의 처)가 깜짝 놀라서, 주변 사람들을 내보내고, 찢어진 조각을 다시 꺼집어내어 다시 붙여놓은 다음에 금고에 넣고 잠궜다.

 

그렇다면, 임표는 왜 모택동의 호의를 거절했을까? 임표 스스로는 이를 한 마디 말로 개괄했다, 즉: "나는 윤지(潤之, 모택동)보다 먼저 쓰러지고 싶지 않다."

 

일찌기 1958년에 임표는 제8기 5중전회때 상임위원과 중앙부주석에 당선되었다. 실로 봄바람을 타고 득의만면할 때였다. 일부 친구와 부하들이 그에게 축하를 했다. 그러나 임표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만년에 편안하려면(晩年要平安)), 칼끝을 피하고(要避鋒芒), 정치를 피하고(要避政治), 회의를 피하고(要避會議), 모임을 피하고(要避聚會), 모택동을 피하고(要避潤之), 태도표명을 피하여야 한다(要避表態)"(이는 그의 부하가 나중에 임표를 비판할 때 한 말이므로, 분명히 사실일 것이다)

 

임표의 이 "칠요육피(七要六避)"는 얼마나 총명하고, 얼마나 투철한가, 그의 초기 처세의 기본이념, 기본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정치상의 하나의 발명창조이다(모택동어록에 따르면, 그의 또 하나의 발명창조는 "4개제일"이다). 아쉽다면, 그도 마지막까지 유혹을 버텨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후계자'가 되어 일시를 풍미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나중에 임표는 국가주석이 되지 못하자(모택동은 국가주석을 두는데 반대했다), 그의 후계자 지위가 공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장춘교(張春橋)로 대체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급류용퇴(急流勇退)한다. 1971년 3월 22일, 임표는 주은래를 통하여 서신을 모택동에게 보내어, 다시 한번 후계자의 지위를 사임하고, 처자를 데리고 호북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병치료를 한다. 서신에서는 문혁을 끝내고, 당, 정, 경제, 사회의 정상질서를 회복할 것을 제기하였다. 4월 20일, 모택동은 이렇게 답변한다: "사직은 타당하지 않다" "네가 여전히 부주석이다. 당장(黨章)이 규정한 후계자이다. 나는 사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요양에 힘써라."

 

당시 모택동 일인천하의 역사배경하에서, 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배에서 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것은 이때가 바로 "9.13" 사건이 발발하여 임표가 외국으로 도망치는 때로부터 반년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